141.
이랑과 헤어진 후 서고에 도착한 나는 가휘에 관한 기록이 있는 서책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서고를 뒤지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해.”
“뭐가, 아리야?”
포포가 고개를 기울이며 영문을 표했다.
“모든 기록이 다 있는데, 가휘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을 서책만 없어.”
“응? 에이, 설마. 다시 한번 잘 찾아 봐봐.”
포포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나는 몇 번이고 서책들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가휘에 관한 서책만 쏙 빠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빼낸 것처럼.
나는 몸을 움직여 가휘의 일기장이 있던 상자를 열어 보았다.
……없어.
가휘의 일기장이…… 사라졌다?
누구지? 누가 가져간 거야?
상자에 먼지가 쌓인 것으로 봐서는 최근에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백령은 이곳에 가휘의 일기장이 있는 줄 몰랐을 거야. 그러니까 이 상자 안에 있었던 것일 테고…….
애초에 서고는 기록을 쌓아두는 용도였지, 대부분의 신수는 출입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랑?
내가 서고에 들락거리는 걸 유일하게 아는 신수였다. 하지만 이랑에겐 가휘의 일기장을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이랑이 가휘의 일기장을 가져가서 어디다 쓴단 말인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아리야?”
서고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지루해진 포포가 입을 내밀며 물었다.
일기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기록은 유용했을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언제든 와서 보면 된다고 생각하고 가휘에 관한 기록을 더 찾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땐 가휘가 돌연변이 흑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만 가자.”
나는 결국 포기하고 상자를 닫았다. 그런데, 거기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건…… 뭐지?
너무나도 평범한 작은 구슬이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 나는 구슬을 소매에 넣었다.
이 구슬, 어디서 많이 봤는데…….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어디서 봤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중앙 회의를 위해 서쪽 땅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보다 중앙 회의는 더욱 빨리 잡혔다. 아마 시기가 시기이니, 최대한 일정을 당긴 것 같았다.
“아리 님……. 저어.”
여노가 몇 번째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래, 여노?”
나의 물음에 여노가 망설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되어서요. 회의는 백령 님만 가도 무관하니 그냥 여기에 계시는 게…….”
그녀의 연둣빛 눈망울엔 깊은 걱정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서 내게 자꾸만 일이 생기니 여노가 불안해하는 것도 유난은 아니었다. 나는 내 머리를 만져주던 여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여노.”
출발을 위해 여노에게 치장을 받고 밖으로 나오자, 백령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거라.”
나는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을 바라보며 그가 내민 손을, 꼭 잡았다.
서쪽 땅에 도착하자, 전과 달리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홍화관이 무너졌기 때문에 백성들도 불안해하는 것일 테다.
우린 곧장 바랑의 궁으로 향했다. 바랑의 궁엔, 이미 많은 신수가 도착해 있었다.
“오, 왔네.”
바랑이 백령과 나를 보며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우린 하인의 안내대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회의의 중심인 미호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미호, 오랜만이야.”
내가 먼저 그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를 본 미호가 아주 잠시, 표정을 풀고 내게 눈으로 인사했다.
단 한 신수만 빼고 모든 신수가 회의장에 도착했다. 나는 비어 있는 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저곳은, 북쪽 땅의 주인인 사화의 자리였다.
“사화는?”
미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백령과 은월을 제외한 모두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하운이 공손히 미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늦는구나. 사화가.”
미호가 힘을 주며 말했다. 매우 탐탁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분위기 속에, 누군가가 회의장으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그녀는 사화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인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가 여유롭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어나라, 사화.”
미호의 말에 사화가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쫘악-
순식간이었다. 미호가 사화에게 손찌검을 한 것은. 돌아간 사화의 뺨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워낙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라, 부은 부분이 더욱 눈에 띄었다.
“하인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또한, 네 불찰이 아니냐. 그런데 어찌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구나.”
미호의 한기 어린 말에 모두가 굳었다. 미호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함부로 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 은월, 그리고 백령은 알고 있었다.
지금 미호가 사화에게 손찌검을 한 것은, 비단 늦은 것 때문만이 아니란 것을.
“회의를 시작하지.”
미호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사화는 한동안 자리에 앉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은 건, 회의 중반쯤이었다.
은월의 예상대로 내 성인식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고, 홍화관에 대한 회의를 시작할 때였다.
“홍화관이 무너져 내린 것은 안타깝지만, 지금 홍화관을 짓는 데에 인력을 보충할 수는 없어.”
은월의 냉정하고도 현실적인 발언에 비천이 입에 거품을 물며 반박하기 시작했다.
“은월, 홍화관은 신국의 주축 중 한 곳입니다. 행정 일을 모두 도맡아 하는, 위대한 곳이란 말입니다.”
“흑기가 깽판을 치는 이 시국에서, 그 위대하다는 행정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바랑이 비천의 말을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비천이 바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비천이 바랑의 궁에 머물고부터 둘 사이는 여간 안 좋은 게 아닌 것 같다.
“그럼 벌레 녀석들을 빨리 잡던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내가 나서면 그깟 벌레쯤은 식은 죽 먹기죠.”
바랑은 전혀 신뢰가 안 가는 비천의 말에 계속해서 빈정거렸고, 회의의 주제는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둘 다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구나.”
미호가 매섭게 둘을 쏘아보며 말하자, 오늘만은 비천과 바랑이 흠칫하며 미호의 눈치를 살폈다.
“홍화관은 이 일이 마무리된 후,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바랑의 궁에 머물면 되는 일이니.”
미호의 엄포에 두 신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꼬리를 내렸다.
왜인지 비천의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여전히 비천 같은 변태는 싫었지만, 홍화관이 무너진 것은 어쩌면, 내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호.”
나의 목소리에, 미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한기는 온데간데없고, 자상하기 그지없는 그녀였다.
“지금 신국의 상황은 알지만, 홍화관 또한 신국의 주요 기관임에는 틀림없잖아.”
“그건 그렇지.”
미호가 내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화관을 짓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다고 홍화관을 이렇게 내버려 두는 것 또한, 신국에 영향이 간다고 생각해. 이미 백성들은 많이 불안해하고 있고.”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천천히 나의 의견을 표현했다.
“그러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임시로 홍화관을 만드는 건 어떨까? 그러면, 그리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거고 백성들 또한 안정을 되찾지 않을까? 물론, 일이 마무리된 후에는 정식적으로 홍화관을 짓고.”
일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괜히 나선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그,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비천이 갑자기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소리쳤다. 미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수긍하는 듯했다.
“알았어, 고민해볼게, 아리야.”
그리고, 이제 정말로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리고 사화.”
미호의 말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가라앉은 미호의 목소리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당분간 네 권능을 박탈하겠다.”
미호의 말에 사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볼은 아직 빨갛게 부어있었다.
“미호 님, 어째서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것이냐?”
미호의 차가운 어조에도 사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반박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한들, 그게 제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에 미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이내 미호가 굳은 표정으로 사화를 응시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하인의 잘못도, 네 불찰이라고.”
미호의 단호한 말에 사화의 황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월, 북쪽 땅의 궁을 샅샅이 조사해라. 그리고, 이제부터 설산에 대한 출입을 허가한다.”
이제 사화는 더 이상 설산에 대한 출입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 인해, 회의가 종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회의가 종료되자, 비천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에 나는 절로 몸을 움츠렸다.
“아리, 어째서 날 도운 거죠?”
“딱히 난 널 도운 게 아니라…….”
비천은 심각한 표정을 하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도움을 받은 게 기분이 나쁜 건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날 바라보던 비천은 곧이어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경계하며 지켜보던 백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을 잃더니 뱀이 정신이 나갔나 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백령의 말에 동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