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그래서 물어볼 거란 게 뭐야?”
나와 은월은 항상 만나던 정자에 앉아 차를 기울였다. 나의 물음에 은월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별것 아니야. 그날 흑기와 관련해서.”
“아…….”
백령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는데…….
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한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걱정 마. 대충 백령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백령한테 들었다고?
은월에게는 말을 해준 건가?
은월은 잠시 그때를 회상하는 듯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런데도 내가 널 만나러 온 건, 네게 듣고 싶었기 때문이야.”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그가 나를 보며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왠지, 네게 와야 할 것 같았어.”
“응? 왜?”
내가 되묻자, 그가 턱을 괴며 잠시간 사색에 잠겼다.
“글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리 말하며 은월은 다시 한번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말에 나는 회색빛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요즘 왜인지 은월의 시선을 회피하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이럴 때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와 은월이 한동안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자, 포포가 은월의 옆으로 총총 걸어갔다.
“싸부, 그런데 그 뱀은 어떻게 됐어?”
“뱀? 아, 비천을 말하는 건가.”
은월의 물음에 포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라며 중얼거렸다.
“비천은 바랑의 궁에서 지내는 중이야. 예로부터 그게 관례였고.”
하긴, 홍화관은 서쪽 땅에 있으니까.
비천이 바랑의 궁에 머무는 건 비천도, 바랑도 반기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은월 님. 여기 계셨군요.”
갑자기 나타난 자타가 정자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정자에 당도하자 은월과 내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자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두루마리 하나를 은월에게 건넸다.
“미호 님의 전언입니다.”
“미호의?”
은월이 두루마리를 펼쳐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이내 은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 읽은 두루마리를 자타에게 돌려주었다.
“이 사안이 결정이 난지 얼마나 됐지?”
“미호 님께서 조금 전에 결정한 일입니다. 아마 지금 아는 분은 은월 님뿐일 겁니다.”
은월이 잠시간 생각에 잠긴 듯했다.
“중앙 회의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겠군.”
은월의 말에 자타가 수긍하듯 고개를 숙였다.
중앙 회의?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은월을 바라보자, 그가 자타를 향해 이제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자타가 물러나자, 은월이 내게 두루마리의 내용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서쪽 땅에서 중앙 회의가 열릴 거야.”
흑기가 탈출했고, 홍화관이 무너졌으니 회의가 열린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지만, 서쪽 땅에서 열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놀란 토끼 눈으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홍화관이 무너졌다는 건, 서쪽 땅이 불안정해졌다는 거야. 그러니까 서쪽 땅에서 중앙 회의를 개최하는 거지.”
그런 거구나…….
그런데,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는 건 내 성인식은 또 미뤄지겠구나.”
나의 말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중대한 행사는 다 미뤄지겠지. 그 일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결정할 거야.”
이번에 열리는 중앙 회의는 지니는 의미가 상당히 많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운 건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은월의 말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장 중대한 사안은 아무래도 사화에 대한 조사겠지.”
“사화에 대한 조사?”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번 중앙 회의의 진짜 의도를.
“혹시, 흑기의 배후가 사화라는 거야?”
“그렇다고 의심하는 중이지. 그날, 언제쯤 너와 이연이 중앙 숲으로 향할 것이란 걸 아는 자는 동쪽 땅을 제외하면 사화와 그녀의 측근들뿐이니까.”
네 땅의 신수중, 흑기를 도운 게 사화라면…….
사화를 의심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아마 미호와 은월도 그녀를 의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네 땅의 신수중 배후가 있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런데 여태껏 그녀를 조사 못 한 데에는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조사에서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그녀를 배후라고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르다.
그렇기에 은월도 아직 ‘의심’이라고 말한 거겠지.
“그런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석연치 않은 부분?”
“정말 사화가 흑기의 배후라면, 그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종적을 감췄어야 정상이니까.”
하지만 사화는 너무나도 태연히 궁에서 지내고 있다는 뜻이구나.
그럼 남는 신수는 바랑과 천강.
천강 또한 흑기의 배후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한때, 네 땅의 주인 중 한 명이었으니까.
“사화에 대한 조사는 그럼…… 은월이 하는 거야?”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사화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북쪽 땅으로 떠난다면, 한동안 또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예쁜 미소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겠어, 아리야.”
그의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렇게 또다시 한동안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
은월의 말에 의하면, 사화에 대한 조사는 청아와 산이 도맡을 것이라 했다.
나는 그전에 가휘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아리야? 또 어디 가?”
“서고.”
“힉. 거길 또?”
분명 서고에 가휘에 관해 기록한 서책이 있을 것이다. 가휘는 동쪽 땅에 머물렀다고 했으니까.
서고로 향하던 중, 누군가가 이쪽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이랑?
“아리야!”
그가 황금빛 눈을 반짝이며 내 앞에 당도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이랑, 무슨 일이야?”
“하원, 하원이…….”
하원?
그러고 보면 지금쯤이면 하원과의 수업이 재개되었겠구나.
“이랑!”
그때였다. 이랑의 이름을 매섭게 부르며 하원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원이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이랑이 내 손목을 잡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정신을 차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아니, 왜 나까지 하원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건데!
이랑이 나를 데리고 열심히 달려간 곳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구석에 있는 별채였다.
“여기쯤이면 하원도 포기하겠지?”
이랑이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하원을 경계하더니, 하원이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그의 싱그러운 미소에 나는 절로 화가 났다.
“이랑,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맞아, 맞아. 아리 옷자락 붙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
포포가 나의 호통에 동의하며 맞장구쳤다. 그러자, 이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렇지만, 하원이 너무 무섭게 달려오잖아? 그래서 위기를 느낀 나는 너를 지키고자…….”
이랑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머리를 짚었다. 곧장 하원에게 달려가 이랑의 위치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홍화관에 갈 때 나를 도와준 일이 떠올라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한숨을 쉬자, 이랑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된 거야?”
“응? 뭐가?”
“네가 흑기를 쫓아가고 나서 흑기가 도망가버렸잖아.”
“아…….”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져선 안 된다, 아리야.’
이랑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건…….”
“아, 그건 말이야…….”
포포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의 꼬리를 세게 잡았다. 그러자, 포포가 헙,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려가는 길에 은월을 만나서.”
“그래? 그래서 은월이랑 같이 나온 거구나.”
이랑은 그렇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었다. 누군가를 속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재빠르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랑은 서쪽 땅이 걱정되겠다. 홍화관이 무너졌으니까.”
“별로.”
이랑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바랑이 널 그리워하겠어.”
“……삼촌이?”
잠시였지만, 일순간 이랑의 표정이 굳어진 것 같았다. 마치 괴로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이내, 이랑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미소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하운이 있으니까. 서쪽 땅은 괜찮을 거야.”
“이랑?”
무언의 이질감을 느낀 나는, 그를 불렀지만, 그는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날 바라볼 뿐이었다.
“아리, 넌 서고로 향하는 길이었지?”
“응?”
이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이랑, 바랑이랑 무슨 일 있었어?”
자리를 피하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런 일도 없었어.”
그의 미소에 쓴맛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인 걸까?
“그것보다 그거 알아? 네가 내 손목을 잡았던 적이 상당히 적다는 걸.”
이랑이 내게 잡힌 손목을 가리키며 기분 좋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의 말에 내가 손목을 놓으려 하자, 그가 반대편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조금만, 이렇게 있어 주면 안 될까.”
그가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오늘따라 이랑이 이상한 것 같았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동안 그의 손목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네가 좋아, 아리야.”
이랑의 예쁜 황금빛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이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며 읊조렸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