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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38)화 (138/167)

138.

“누구…… 읍!”

“쉿.”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한 큰 손. 그에게서 나는 익숙하지만 좋은 향기.

나는 이 향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은월……?

내가 진정하고 그를 차분히 바라보자, 그가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 냈다.

“은월, 여기 어떻게…….”

“아무리 조심스럽게 들어왔대도, 백령과 내가 네 기운을 모를 리가 없잖아?”

그렇다는 건…… 아까는 일부러 모른 척해줬다는 거야?

잠깐, 그렇다면 백령도 알고 있다는 거잖아?

“은월, 그럼 지금 백령은 뭐 하고 있어?”

“이랑과 면담.”

……아.

자동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랑에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백령과 이랑이 면담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속으로 애타게 날 찾고 있을 이랑이 눈에 훤했다.

미안해, 이랑.

“그 작은 똥개 형님이랑 단둘이 면담해? 부럽다!”

이랑이 들었으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 소리를 포포가 아무렇지 않게 했다.

뽀뽀,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이랑을 떠올리며 명복을 비는 와중에, 은월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내 옅은 빛이 번지고, 그의 얼굴이 선명히 눈에 담겼다.

“어쩌려고 혼자 여기 온 거야?”

은월이 인상을 쓰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그, 그게……. 내가 흑기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너희가 반대할까 봐.”

“그렇다는 건, 너도 이게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단 거잖아.”

그가 눈을 휘며 웃었지만, 괜스레 양심에 찔린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은월이 고개를 숙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난 그냥 걱정하는 거야, 너를.”

그의 말에 회색빛 눈을 더 이상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의 눈을 피하며 곤란해하자, 은월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쨌든, 흑기를 만나고 싶단 거지?”

은월이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이끌었다.

그를 따라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가자, 어느새 지하 감옥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때마침 흑기를 가두고 나오는 청아와 산과 마주쳤다. 청아와 산이 화들짝 놀라며 나와 은월을 번갈아 보았다.

“으, 은…….”

청아와 산은 ‘은월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라며 물으려 했던 것 같지만, 은월이 고개를 젓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두 신수의 눈치에 새삼 감탄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청아와 산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짧은 인사를 했다.

은월이 손짓으로 청아와 산을 올려보냈다. 청아와 산의 모습이 멀어지자, 은월이 손가락으로 지하 감옥 끝을 가리켰다.

“저 끝. 저기가 흑기가 갇혀 있는 곳이야.”

그가 작은 소리로 흑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가도 돼?”

은월과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지만, 은월이 곁에 있으면 흑기는 아무것도 내게 말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물음에 그가 나의 손을 놓았다. 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예쁜 회색빛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날 불러.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은월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품에 안은 포포를 바닥에 내려두고 천천히 흑기가 있는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스산한 기운이 주위를 감돌았다. 흑기의 기운인지, 아니면 지하 감옥이 원래 이런 건지, 또 아니면 나 혼자라 이런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흑기가 있는 감옥 앞에 당도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들어 흑기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이렇게 굼떠? 기다리느라 지루했잖아.”

그는 마치 내가 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의 흑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알아.”

그가 여유롭게 나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내게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거야?”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나는 그에게 꼭 대답을 들어야만 했으니까.

“그래도 물어볼게. 저번에 말 한 네 이름…….”

“나랑 놀이 하나 하지 않을래?”

웬 놀이?

그가 갑자기 내 말을 끊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철창이 있어서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의 기운이 확연히 느껴지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여기는 너무 무료해서 말이야. 놀이는 간단해. 내가 문제를 내면 너는 맞추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가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묻는 것처럼.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할게.”

그리고 그걸,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감옥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신수에 관한 문제니까, 별로 어렵진 않을 거야.”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응시했다.

“옛날에, 너와 닮았다는 신수에 관해 많이 들었겠지? 아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거야.”

“……시호.”

그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시호라는 신수가 가진 두 개의 구슬 중 하나가 네게 있지. 주인님은 그걸 손에 넣고 싶어 하고, 나는 그걸 도와주는 대신 받기로 한 게 있지.”

받기로 한 게 있다고? 그렇다면 흑기가 주인을 섬기는 게, 충성심 때문은 아니라는 건데…….

“시호는 참 아름다운 신수였어. 그녀는 너와 달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지.”

시호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고?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거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기분 나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여기서 문제. 시호를 진심으로 사모하던 이는 누구일까요?”

“백……령.”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심스레 내가 생각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그가 비웃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백령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그의 표정에 나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백령으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데.”

그가 부르르 떨었다. 마치 백령을 증오한다는 듯이.

나는, 그에게서 답을 듣지 않아도 이제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또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너…… 가휘구나?”

나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내게로 다가왔다.

“드디어 날 알아보는구나, 시호?”

그의 눈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물음에 부정했다.

“난 시호가 아니야. 그리고 널 알아본 게 아니라, 네 일기장을 보고 추측했을 뿐이야.”

“뭐?”

그가 다시 한번 얼굴을 굳혔다. 이내 두려움을 느낀 나는 벽에 붙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운에 온몸이 조금씩 떨렸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넌 시호가 아니지.”

그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날 응시했다. 곧이어,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그가 철창을 잡고 비틀었다. 철창은 힘없이 구겨졌고, 돌연변이 흑기, 아니, 가휘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걱정 마, 시호. 내가 모든 걸 돌려놓을 테니까.”

그가 낮게 깔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흑색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찡그렸다.

“그러려면, 네가 필요해.”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경직된 나는 순간적으로 구슬의 힘을 사용해 그의 손을 튕겨냈다.

“이런 힘으로는 날 죽이지 못해, 아리야.”

그가 가소롭다는 듯 입을 비틀었다. 그러던 중, 검은 칼날이 빠르게 그를 향했다.

가휘는 칼날을 피하고자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쉽네. 실수로 죽였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었는데.”

칼을 휘두른 자는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그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부르라니까. 다친 데는 없어?”

그의 다정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 모습에 경직되었던 내 몸이 어느 정도 풀렸다.

가휘가 악의에 찬 눈으로 은월을 노려보았다.

“흑호, 네 녀석이 또 방해하다니.”

악에 받친 가휘의 말에 은월이 어이없다는 듯 미소지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내 일을 방해한 게 대체 몇 갠데.”

은월과 가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휘는 은월을 노려보다가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날 응시했다.

“하.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아닌 것 같네. 다음에 호랑이 없이 보자고, 아리야.”

그의 말에 은월이 칼로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럴 일 없을 텐데. 설령 네가 여기서 죽지 않아도 아리 곁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은월은 그리 말한 후 칼을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내, 울리는 지면에 은월이 그에게서 물러났다.

“왔나 보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아리야.”

그가 천장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자, 천장에서 홍화관을 이루던 자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있다간 위험해.”

은월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포포는?”

날 안고 지하 감옥을 벗어나는 은월을 향해 묻자, 그가 날 바라보았다.

“아리야, 나 여깄어!”

포포가 나와 은월 사이에서 뽁, 하고 튀어나왔다.

대체 언제 여기에 있었던 거야?

은월 덕분에 빠르게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하 감옥을 벗어나자, 감옥뿐만 아니라 홍화관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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