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크윽.”
하원이 오만상을 쓰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영아가 하원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하원 님?”
이내 하원의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시야가 선명해지자 보이는 건 영아의 자색 눈동자였다.
하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일어났다.
“대체 어떻게 된…….”
하원은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흑기에게 공격을 당한 것까지는 기억에 있었지만, 쓰러진 이후의 기억은 희미했다.
“사경을 헤매셔서 기억이 없으신 걸 거예요.”
“내가 사경을 헤맸다고? 겨우 흑기의 공격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묻자, 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보통 흑기가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요.”
하원은 흑기에게 당한 것이 분했지만,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렇기에 그는 대충 수긍했다.
“그래, 어쨌든 고마워, 영아.”
“감사 인사는 제가 아니라 아리 님이 들어야 할 것 같군요.”
영아가 진통제를 만들어 하원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하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문 담긴 표정으로 영아를 바라보았다.
“저로서는, 이리 빨리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보는 상처였으니까요. 보통 흑기의 상처가 아니었어요, 하원 님.”
하원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일단 두통을 잠재우기 위해 진통제를 마셨다. 이내 영아가 또 다른 약을 제조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리 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설의 약재, 천도를 구해온 날. 저는 다짐했답니다. 오로지 아리 님을 위해 남은 천도를 사용하겠다고.”
영아가 품속에서 천도의 조각을 꺼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천도의 조각을 잠시간 바라보다 제조하고 있던 약에 미련 없이 넣었다.
천도가 스며들어, 약은 희미한 빛을 내며 이질적인 기운을 풍겼다.
“하지만 아리 님이 하원 님에게 천도를 사용하라 명하셨지요. 이건 아리 님의 천도니, 저는 명대로 남은 천도의 일부분을 사용해 약을 만들었죠.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하원 님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 한계인가 보군요.”
영아가 하원의 등에 남아 있는 상처를 힐끗 보았다. 상처가 많이 아물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아마 하원이 지금 두통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제조한 약을 하원에게 내밀었다.
“아리 님이 구해오신, 마지막 천도의 조각을 사용했습니다. 이것까지 드셔야 완전히 나으실 겁니다.”
하원이 영아가 내민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에 비친 그의 짙은 남색 눈동자에는, 많은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이내 하원은, 천도가 스민 약을 남김없이 마셨다.
***
이연을 인간세계로 보낸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나의 꿈에 관련해서 열심히 알아보았지만, 허탕 치기 일쑤였다.
“내 꿈의 남자가 누굴까……. 일단 그것부터 알아야 하는데.”
꿈에 나타난 남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야 모든 실마리가 풀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의 얼굴이 지워진 거지? 왜 볼 수 없는 거야?
“아리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해?”
포포가 다과를 먹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있어, 그런 게.”
“오늘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백령과 은월이 흑기를 심문하는 날이다.
날 데려가지 않으려 하겠지만, 나와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내가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그 흑기에 관해 거슬리는 게 있었다. 그가 이름을 분명 말하려 했었던 것.
이름을 듣지 못한 걸 후회할 것이란 것.
포포를 품에 안고 청마를 불렀다. 청마는 내 명에 곧장 나의 앞으로 날아왔다.
“아, 아리야. 나는 왜…….”
“너 나랑 떨어지면 아프다며.”
포포를 품에 안은 채 청마에 타려던 순간, 한 가지 작은 문제가 떠올랐다.
홍화관이 대체 어디야……?
저번에 분명 바랑의 궁과 서화원은 갔었지만, 홍화관은 발도 붙인 적 없었다.
홍화관이 어디에 있는지 언질 또한 받은 적 없던 나는, 청마에 타려던 자세 그대로 경직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품에 안긴 포포를 내려다보았다.
“뽀뽀……. 혹시 홍화관 어디 있는지 알아?”
“홍, 뭐?”
그래, 내가 물어볼 신수한테 물어봐야지. 여우가 뭘 알겠어.
자타나 자하, 혹은 여노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날 못 가도록 말릴 게 뻔했다.
서쪽 땅의 지리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면서 날 도와줄 신수…….
있다, 있어. 지금 이 궁에, 날 도와줄 적합한 신수가 존재한다.
작은 똥개!
“뽀뽀,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하원이 요양이 필요하여 아직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이랑은 아마 거처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랑의 거처로 곧장 달려갔다.
이랑의 거처에 도착해 창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자 이랑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랑, 왜 여기 있는 거야?”
“네가 오는 게 느껴졌으니까. 사랑의 힘이랄까.”
이랑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금빛 눈동자를 빛냈다. 왜인지 오늘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네가 날 찾아온 것 자체가 내겐 무엇보다 기쁜 일이야.”
이랑의 헛소리는 뒤로하고,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랑, 나…….”
“알아. 네가 무엇 때문에 날 찾아온 건지.”
응? 알아?
이랑이 새삼 다시 보이려던 순간, 그가 환히 웃으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보고 싶었지?”
“그거 아니야.”
빠르고 간결하게 현실을 깨우친 이랑은 ‘그럼 날 왜?’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홍화관의 위치를 알려줘.”
“홍화관? 거긴 갑자기 왜? 아.”
이랑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내 뜻을 알아차리고 탄식을 내뱉었다.
“안 돼, 나 백령한테 죽어.”
“괜찮아. 네가 데려다줬다고 말 안 할게.”
“내가 안 괜찮아. 눈치 빠른 백령에게 그게 들통 안 날까?”
그렇지만, 백령이 그렇다고 이랑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 것을 난 잘 알고 있었다.
이랑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이랑의 황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괜찮아. 부탁할게, 이랑.”
이랑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간 고민하던 이랑은 이내, 내 눈빛을 못 이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이 나 죽이려 들면 네가 구해줘야 해, 아리야.”
그렇게 이랑과 나, 그리고 포포는 서쪽 땅으로 향했다.
이랑은 역시 서쪽 땅의 지리에 관해 누구보다 빠삭했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빨리 홍화관 근처에 도착했다.
“이랑, 이제 나 혼자 갈…….”
이랑을 보내려는데, 이랑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너 혼자 보내. 저기를.”
“하지만 백령이 알게 되는 게 무섭다며?”
“백령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리고,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날이야말로 내 제삿날이야.”
생각보다 듬직한 이랑의 발언에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자 이랑이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랑, 고마워.”
환히 웃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나와 이랑이 홍화관 근처로 들어서자, 홍화관의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홍화관은 여러 개의 문이 나열되어 있었다. 청화관이 푸르고 맑은 느낌이라면, 홍화관은 어둡고 탁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본궁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안에서 돌연변이 흑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죽이라니까. 난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의자에 포박된 채 그는 백령과 은월, 그리고 비천을 번갈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알만한 신수들이 왜 이러실까. 나한테 주술이 걸려 있단 걸 모를 리가 없잖아, 특히 우리 고귀하고 지고하신 은월 나리께서.”
그의 말에 은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 흑초에 손을 댄 신수가 주술에 걸려 죽어버렸던 일이 떠오른 듯했다.
비천이 은월과 백령 사이를 가로지르며 흑기의 앞에 당도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리 원하니 죽여주죠. 벌레 하나 죽는 것쯤이야.”
그러자 흑기가 비천을 비웃듯이 낄낄거렸다. 그에 비천이 부들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너희도 내가 뭐 알려줄 거로 생각해서 데려온 게 아니잖아? 나라는 존재 자체 때문에 데려온 거지.”
그래, 저 흑기의 말이 맞았다. 저 흑기는 다른 흑기와는 다르고, 특이했다. 저자가 우리 손에 있다는 것 자체가 흑기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
흑기가 아주 잠깐, 내 쪽을 바라본 듯한 기분이 들어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러니,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날 죽이든지, 다시 지하에 가둬두든지 하는 게 어때?”
그의 말에, 은월이 인상을 찌푸리며 산과 청아 쪽을 바라보았다.
“데려가라. 청아, 산.”
산과 청아가 은월의 명을 받아 흑기를 다시 지하로 데려가는 듯했다. 나는 청아와 산을 따라가기 위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 아리야!”
나의 돌발행동에 놀란 이랑이 날 쫓아오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나는 그의 외침을 뒤로한 채, 계속해서 청아와 산을 따라갔다.
“아리야, 작은 똥개가 부르는데?”
내 품에 안긴 포포가 나를 올려다보며 이랑 쪽을 가리켰다. 포포는 살짝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 이랑을 데려왔다면 놓쳤을 거야.”
청아와 산을 따라간 곳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 너무 어두워.”
포포가 잔뜩 겁에 질려 내 품에 파고들었다.
“조금만 참아, 곧 있으면 빛이 보일…….”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서늘한 느낌에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