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조금 진정한 나는 고개를 들어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쁜 회색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은월, 나…….”
그가 다시 부드럽게 날 안았다.
“하급 신수에게만 통하는 주술을 써서 포포를 통해 상황을 보고 있었어. 하원이 있다고 안심한 내가 어리석었어.”
은월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래서 포포를 내 옆에 붙여놓은 거구나…….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돌연변이 흑기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호랑이 두 마리는 너무한 거 아닌가.”
은월의 등장에 그는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지난번과 같이 손가락을 깨물려는 순간, 백령이 곧바로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자신의 목 밑에 들어온 백령의 칼을 보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 피를 떨어트리면 흑기들이 몰려온다는 것쯤은 지난 은월의 보고로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이 보고까지 하는 가까운 사이였어? 난 몰랐네.”
흑기의 빈정대는 말에 백령이 칼을 좀 더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항복의 의미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진 않지.”
은월이 품에서 날 놓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청아, 산.”
은월이 두 신수의 이름을 부르자, 어딘가에서 청아와 산이 빠르게 나타났다.
“네, 은월 님.”
“이 자를 끌고 가지.”
흑기를 바라보는 은월의 회색빛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에 청아와 산이 바로 흑기를 구속한 후 어딘가로 끌고 갔다.
“자하.”
백령이 자하의 이름을 부르자, 흑기를 처리하던 자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뒤처리는 네게 맡기마. 곧 아루가 올 것이니, 적적하진 않을 테지.”
“알겠습니다, 백령 님.”
자하가 손쉽게 남은 흑기들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백령은 나와 은월에게로 다가왔다.
백령이 다가와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내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큰 외상이 없어 보이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궁에 돌아가서 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
나와 은월은 그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이 하인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은 아직 가사 상태인 하원을 챙겼다.
다행히 포포가 검은 파편들을 떼어낸 지 오래라,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영아를 불러라.”
백령의 명에 그를 따라온 자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화원으로 향했다.
“이만 가지, 서둘러야겠군.”
하원의 상태를 본 백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돌아온 포포와 함께, 동쪽 땅으로 향했다.
***
“아리야, 수달 어떻게 되는 거야?”
포포가 걱정이 가득 담긴 듯한 붉은 눈망울로 날 바라보았다. 포포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글쎄…….”
자타가 워낙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우리가 궁에 도착했을 땐 영아가 대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바로 치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직 치료를 마치지 못한 듯, 영아는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영아가 나와봐야 알 것 같아.”
하원의 걱정에 내 여우 귀가 축 처졌다. 나를 따라 포포의 귀 또한 축 처져버렸다.
나와 백령, 그리고 은월과 포포는 그저 집무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원이 크게 다쳐서일까, 물의 기운이 매우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미호에 모두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흑기들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감히 인간인 이연이 우리 아리를 끌고 가려 했다고?”
그녀는 좀처럼 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는 붉게 변해 있었다.
“미호, 난 괜찮아. 그보다 하원이 문제야.”
이연이 날 끌고 가려 했던 건, 당시 상황이 위험하기도 했고, 어찌 되었든 그는 인간세계로 다시 돌아갔으니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말에 미호가 애써 열을 삭히며 백령과 은월을 번갈아 보았다.
“안 그래도 물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하루빨리 하원이 회복해야 해.”
“하원이 회복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데?”
하원이 다친 것이 큰일이라는 것처럼 말하는 미호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신국이 불안정해져. 물은 모든 걸 이어주는 고리니까. 그런데 그런 물의 주인인 하원이 크게 다친 이상, 그 고리가 제 역할을 못 할 수밖에 없지.”
일전에 하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물은 모든 곳과 연결돼있다는 것.
이런 뜻이었구나…….
“하원을 공격한 흑기는 어디 있어?”
미호가 은월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에 은월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마 지금은 서쪽 땅, 홍화관 지하에 있지 싶은데.”
홍화관 지하……. 일전에 은월에게 들은 적이 있다. 가끔 거기에 감금하는 죄수들이 있다고.
그곳에 돌연변이 흑기가…….
은월의 말에 미호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비천이 흑기랑 손이라도 잡았으면 어쩌려고 홍화관에!”
“비천이 흑기랑?”
불안에 떠는 미호의 말에 은월이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저었다.
“비천이 벌레랑 손을 잡을 리가 없지. 지금쯤 흑기한테 놀아난 자신에 열 받아 있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은월?”
은월의 말에 물음을 표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일전에 비천에게 흑기의 자료를 넘겨준 이유가 설마…….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였다.
“일전에 내 일을 방해했던 거. 그거 비천이 아니었더라고.”
비천이 아니라고? 그러면 대체 누가…….
“비천은 몰랐겠지. 누군가가 말한 계획만 듣고 나한테 눈 돌아가서 그런 거니까.”
은월이 턱을 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백령은 이미 은월의 말을 듣고 모든 걸 눈치챈 것처럼 보였지만, 나와 미호는 달랐다.
“그 누군가가 누군데?”
“누구겠어? 비천과 함께 열심히 일을 추진하던 게.”
……사화!
사화는 교육자가 되고 싶어 했고, 비천 또한 사화가 교육자가 되는 것에 찬성했었다.
그렇다면, 사화가 계획했다는 거야?
“그럼 사화가 흑기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말이야?”
“거기까지는 확실치 않아. 언제부터 도와줬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사화 또한 흑기한테 놀아났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무엇보다, 현재로선 증거가 없으니까.”
그가 말한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비천이 놀아났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 실토할 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은월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은월의 말을 이해했을 무렵,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영아입니다.”
영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저조했다.
“들어와라.”
백령의 허락이 떨어지자, 영아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영아는 고개 숙여 우리에게 인사부터 건넸다.
“갖은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 하원 님의 상태가 위중합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영아의 보고에 미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겨우 흑기에게 당한 것이 아니냐.”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고?”
“예. 보통 흑기에 의한 상처가 아닙니다. 처음 보는 주술, 처음 보는 상처입니다.”
그에 집무실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간 고민하던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나가보거라.”
미호의 허락에 영아가 집무실을 나가려 하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아에게 다가갔다.
“아리 님?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낫게 할 수 있잖아.”
나의 말에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그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영아와 나 사이에 감돌았다. 궁은 너무나도 고요했고, 영아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아, 대답해.”
영아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끄덕였다.
내가 말하는 바를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하원을 바로 낫게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아리 님, 그건.”
영아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이 부르르 떨었다.
“영아, 천도를 하원에게 써.”
“……하지만 아리 님.”
영아가 미호의 약을 지을 때, 천도를 다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천도의 반 정도의 기운만 영아가 들고 온 약에서 느껴졌었기에.
하지만 그녀가 욕심으로 천도를 숨기고 사용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천도를 숨긴 이유는…….
“지금 천도를 사용하면 아리 님의 성인식 때 무슨 일이 생겨도 저는 아리 님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나를 위한 거였어.
나의 성인식을 대비해서 그녀는 천도를 숨겼던 것이다.
그러니 영아는 천도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몫으로 남긴 천도였으니까.
“흑기에게 다친 상처는 어떻게 해서든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꽤 걸리지만…….”
영아에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 영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영아. 네 실력은 믿어. 하지만, 지금은 하원이 우선이야.”
영아가 눈을 감았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아리 님의 뜻대로 하겠지만, 아리 님의 성인식……. 걱정이 됩니다.”
“괜찮을 거야. 모두가 날 지켜주고, 나 또한 모두를 지킬 거니까.”
“네?”
당황한 영아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영아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그러니 천도를 하원에게 써.”
그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알겠습니다, 아리 님.”
약을 제조하러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그녀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니, 나 또한 이제는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리야, 나만 두고 갑자기 나오면 어떡해!”
때마침 포포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그런 포포를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