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날이 밝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인간인 이연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할 때가.
미호의 하인이 나를 데려가기 위해 백령의 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여노의 도움으로 단장을 마친 나는, 궁에서 천천히 나왔다.
백령은 집무실에 있는 듯했다. 마중도 못 나올 정도로 바쁜 것 같아, 조금 서운한 감정이 일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려 노력했다.
“가, 같이 가, 아리야!”
궁을 나서기 직전, 포포가 짧은 다리로 쪼르르 달려왔다.
“뽀뽀, 너도 가게?”
일단 달려온 포포를 양손으로 잡아 올렸다. 포포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응, 갈 거야! 싸부가 걱정해!”
“으, 은월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싸부가 아리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말랬어.”
“……대체 언제? 은월이랑 언제 만났던 거야?”
갑작스러운 은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포포가 자신의 붉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 안 나?”
포포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다른 신수도 아니고, 포포에게 그런 눈빛을 받으니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저, 저 요망한 여우 녀석이!
“어제 나 청화관에 갔었어! 너 자고 있을 때!”
내가 자고 있을 때?
나는 인상을 쓰며 천천히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
은월에게 이끌려 청화관으로 가고 있는 도중, 나는 그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보았다.
평소라면 그는 나의 왼쪽 손목을 잡았겠지만, 지금 그가 잡은 손은 오른쪽 손목이었다.
아까 이연이 세게 쥔 손목이 오른쪽 손목이라서 그런 듯하다.
은월은 이연과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어딘가 묘한 감정이 일었다.
청화관에 도착하자 은월은 내 손목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여기 있을 텐데. 아, 찾았다.”
은월이 가져온 건 예쁜 통에 담긴 연고였다. 그는 손에 든 연고를 내 손목에 부드럽게 발라주었다.
“은월, 이건 누구한테 받은 거야?”
암만 보아도 이 연고가 담긴 통은 은월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에게 받은 게 분명한데…….
은월은 여전히 연고를 바르는 일에 집중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신기하게도 연고를 바르자마자 손목에 남아 있던 붉은 자국들이 사라졌다.
그러자 은월이 연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연고를 그렇게 봐? 뭐 묻었어?”
“아니, 어릴 때 한 번밖에 써본 적이 없는데, 아직도 약효가 도는 게 신기해서.”
그리 말하며 은월이 옅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인간, 마음에 안 드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저번에도?”
은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그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신국제에서 이연이 나의 손목을 잡았었다.
하지만, 그땐 이렇게까지 세게 붙잡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그는 내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마치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게 뭔가 기대하고 바라는 게 있었던 걸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한 푸념을 떨쳐버렸다.
“어차피 내일이면 인간세계로 돌려보낼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난 신경 쓰이는데.”
은월이 이제 말끔히 나은 내 오른쪽 손목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어떤 의도로 그랬든, 네게 상처를 입혔으니까.”
물론 손목을 세게 잡은 건, 명백히 이연의 잘못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하긴 했어.
은월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잡혀 있었을지도.
잠시 사색에 잠겨 있던 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대책을 좀 세워야겠군.”
대책? 무슨 대책?
***
그 이후로는 은월의 일에 방해될까, 청화관 마당에 있는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밖에 없었다.
나, 졸다가 잠들어 버렸구나…….
그러고 보니 무슨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떤 꼬마가 날 올려다보고 있는 꿈이었던 것 같은데.
뭐, 기억 안 나는 거 보면 개꿈이겠지.
그런데, 그때 은월의 말했던 대책이란 게…… 포포란 거야?
양손으로 들어 올린 포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데.
“우씨, 아리, 너 왜 나 그렇게 기분 나쁘게 봐!”
“그럴 리가. 우리 귀여운 뽀뽀!”
나는 활짝 웃으며 포포를 품 안에 안았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궁을 나오자, 하인들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을 뵙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지요.”
하인의 정중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근데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동쪽 땅과 중앙 숲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 즈음, 나는 그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왠지 허전하다 했더니, 자하 어디 갔어?
얼마 후, 나는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스라소니를 발견했다.
자하, 바보.
내 곁에 당도한 자하가 숨을 헐떡이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죄, 죄송해요, 아리 님. 백령 님의 집무실에 잠시 들르느라…….”
자하의 변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순탄하게 중앙 숲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도착한 이연과 북쪽 땅의 하인들이 있었다.
“아, 오셨군요, 아리 님.”
북쪽 땅의 하인들과 이연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들의 인사에 화답한 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인간세계랑 이어진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최소의 인원만 정한 후,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야?”
“아, 맞아요, 아리 님. 아마 그럴 겁니다. 여기 있는 인원이 다 들어갈 순 없으니까요.”
자하가 나의 물음에 답하며 하인들을 가리켰다. 확실히, 저렇게 많이 데려가는 건 무리일 듯했다.
인원을 추린 후, 중앙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연이 나의 옷깃을 잡았다.
“아리 님, 저어…….”
“왜?”
“혹시, 전에 본 신수는 누군가요?”
은월을 말하는 건가?
“이곳의 사법관인데…… 너도 예전에 봤었지 않아?”
분명 은월은 이연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워낙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만난 적이 있어도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어요. 그전까진 그 신수를 별로 신경 안 써서…….”
이연이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내 품에 안겨 있던 포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우리 싸부를 모르다니. 인생 헛살았구나? 우리 싸부로 말할 것 같으면 아리랑 그렇고 그런…….”
나는 황급히 포포의 입을 막았다.
“무슨 소리야, 뽀뽀!”
발버둥 치던 포포는, 잡혔던 입이 풀리자마자 억울하다는 듯이 날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열을 내는 포포를 들어 올리며 소곤소곤 그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은월은 나한테 많은 걸 가르쳐준 신수야!”
“그러니까 내가 말한 게 그거잖아!”
그게 어떻게 그런 거야! 싶다가도 생각해 보니 포포는 설명을 잘 못 하니까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뽀뽀, 너니까 무죄인 거야. 너 아닌 다른 신수였으면 괘씸죄였어.
“다 왔습니다.”
한 하인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를 본 나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나무가 커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서도 아니었다.
나…… 이 나무를 본 적이 있어.
언제, 대체 언제 이 나무를 봤던 거지?
한동안 나는 멍하니 서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리 님?”
자하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으, 응?”
“이제 이연 님을 보낼 때가…….”
쿠궁!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 울림이 너무나 웅장해서, 모두가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숲속에 있던 새들이 어디론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기운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아리 님을 노리는 흑기들이!”
자하가 바로 날 보호하려 태세 전환했다. 모두가 긴장한 채, 어두운 기운이 다가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쿠어어어-
예상대로 어두운 기운의 정체는 흑기였다. 흑기들이 떼를 지어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인들과 정예호위들이 몰려오는 흑기들을 하나, 둘, 처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흑기들 탓에, 호위에는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었다.
“아리야! 피해!”
어느새 내게 다가온 흑기를 보며 포포가 소리쳤다.
언제 여기까지……!
“구슬……. 구슬……!”
“다가오지 마!”
내게 다가오는 흑기들을 신력으로 제압했다. 그런데, 흑기들을 다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윽!”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흑기의 손이 내 팔목을 잡았다. 마치 얼음장과 같은 손은,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리야!”
포포가 흑기에게 달려들어, 나와 흑기를 떼놓았다.
“뽀뽀, 괜찮아?”
“흑기들이 너무 많아…….”
전보다 더 많아졌어…….
흑기들이 우리 주변을 에워쌌다. 모두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흑기들의 동태를 살폈다.
전보다 훨씬 많은 수에, 머리가 어질했다. 이 많은 흑기들을 어찌 처리해야…….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 벌레들을 대체 어디서 기어 나오는 거냐.”
갑자기 내 뒤에서 등장한 하원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하, 하원?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까.”
단호하게 내뱉은 말을 끝으로 하원이 흑기가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손짓을 한 번 했다. 그러자, 거대한 급류에 흑기들이 떠내려갔다.
……갑자기 구슬보다 하원의 능력이 더 좋아 보이네.
하원 덕분에 많은 흑기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하인들이 있기에 큰 능력을 쓴 것은 아닌지 아직 많은 흑기들이 남아 있었다.
하인들까지 급류에 휩쓸리면 안 되니까.
“짜증 나게 하네.”
하원이 남은 흑기들을 처리하려 몸을 움직이려던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번엔 수달이네.”
이 목소리는…… 그 돌연변이 흑기?
오랜만에 보는 그가, 하원과 내 앞에 서 있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아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