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내일이면 이연을 인간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중앙 숲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백령이 주었던 동쪽 땅의 수호석을 만지작거리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중앙 숲…….”
내가 처음으로 백색 호랑이인 백령을 만났던 곳이면서, 하원이 있던 곳.
그리고 이번에 이연을 보내기 위해 가는 것까지 합치면 총 세 번이다.
“아리 님!”
한창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여노가 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나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여노?”
“사, 사…….”
“사?”
“사화 님이, 인간과 함께 동쪽 땅으로 방문하신대요!”
“뭐? 또?”
여노의 말에 기분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사화의 방문은 언제나 반갑지 않지만, 오늘은 더욱 그랬다.
인간을 돌려보내기 전날인 오늘,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고?
“백령이 허락해줬어? 사화의 방문을?”
백령이 그럴 리가 없는데?
나의 물음에 여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통보에 가까웠으니까요.”
“통보?”
“아리 님도 아시다시피, 인간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있었잖아요?”
“아, 뭔 말인지 알겠어. 아직 못 찾았다는 말이구나?”
그리고, 다 찾아보고 남은 곳이 여기라는 거고.
내 추리에 여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아리 님. 바로 그거예요. 아무리 백령 님이라도 손 쓸 도리가 없었죠.”
여노의 설명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백령이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밀린 업무 탓에 최근 얼굴도 못 보는데, 사화의 방문까지 더해졌으니 백령은 더욱 바빠질 게 불 보듯 훤했다.
“여노, 오늘은 내가 사화와 인간을 맞이한다고 전해줘.”
“네?”
여노가 놀란 토끼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상대할게. 백령의 집무실이 아닌, 별채로 보내줘,”
사화가 이 악물고 노려볼 게 뻔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찾아오는 사화와 인간의 이기심이 너무 괘씸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리 님, 사화 님은…….”
백령을 만나는 게 목적이겠지. 내가 그렇게 둘까 봐?
“괜찮아. 사화와 인간이 도착할 때 즈음에 차와 다과도 준비해주고.”
“네, 알았어요. 백령 님께도 그리 전할게요.”
“아니, 백령한텐 알리지 마.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나의 당부에 여노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나는 곧 도착할 사화와 이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
별채로 향하자, 차를 마시는 사화와 이연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날 발견한 사화는 한껏 화려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백령이 바빠서, 작은 주인인 내가 상대하기로 했어.”
나는 최대한 친절히 설명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리 님,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아리 님을 보기 위해 동쪽 땅에 방문한 것이…….”
“나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싱긋, 웃으며 사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혹적인 눈동자에 한기가 어렸다.
난 이제 네가 무섭지 않아, 사화.
“아까 말했듯이 백령은 공사다망해서, 이런 일에 시간과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사화.”
말을 마친 후, 나는 보란 듯이 우아하고 여유롭게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사화의 얼굴에 피어있던 예의 미소가 시들었다.
“아리 님.”
“사화. 네가 여기 방문한 이유는, 이연의 물건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야?”
아니라면 네가 여기 발을 붙일 수조차 없었을 텐데.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사화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화는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연, 가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도록 해요. 전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죠.”
냉기 어린 사화의 목소리에 이연이 쭈뼛쭈뼛 일어났다.
“이연의 안내는, 여노, 네게 부탁할게.”
나의 말에 여노는 잠시 당황한 듯하였지만, 곧바로 이연을 데리고 별채를 나섰다.
별채 안에는 나와 사화, 둘만 남았다.
사화가 나의 손가락에 끼워진 동쪽 땅의 수호석을 잠시 보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날 응시했다.
“아리 님께선, 제가 참으로 만만하신가 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행동에서 그렇게 느낀 거야, 사화? 동쪽 땅의 작은 주인으로서 바쁜 백령을 대신해 널 맞이한 거?”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아님, 동쪽 땅의 작은 주인으로서 하사받은 이 반지?”
이제 사화는 노골적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나는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동쪽 땅의 작은 주인으로서 그 자리에 맞게 행동한 것뿐인데…… 왜 그리 곡해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리 님!”
사화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간단한 질문에 오히려 사화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네가 이런 빌미로 자꾸 동쪽 땅에 허락 없이 오는 것, 그리고 그런 널 맞이하러 온 내게 이러는 건 내가 우스워서 그러는 거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야, 사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녀는 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울게, 사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마지막까지 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별채에서 나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화는 내 예상대로 날 찾지 않았다. 나는 궁 어딘가에 있을 이연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아리 님.”
그때, 바로 근처에서 이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
이연이 손을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여노는 어디로 가버린 거지?
“여노는?”
“정신을 차려보니 저 혼자였어요.”
여노가 이연을 놓쳤다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물건은 찾았어?”
“아, 네. 이제 찾았어요.”
“그게 여기 있었다는 말이야?”
“네. 저번에 흘렸나 봐요.”
무슨 물건이길래 하인들도 못 찾은 거지?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물건이라면 눈에 띌 텐데…….
“무슨 물건을 잃어버렸던 거야?”
“아, 별것 아니에요. 평범한 팔찌랍니다.”
“팔찌?”
그가 손목에 찬 팔찌를 바라보았다. 저런 팔찌라면 분명히 하인들이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발견을 못 했다는 건, 일부러 여기에 숨겨놨거나, 아예 잃어버린 적이 없었던 거겠지.
“찾았으니 다행이네, 사화는 별채에 있어. 이제 돌아가면 되겠구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그를 지나쳐 백령의 집무실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돌아선 내 손목을 그가 잡았다.
“아, 죄송해요. 아리 님과 좀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얘기라니?”
“저번에 그 일 이후로 제게 눈길도 주지 않으시니까요.”
그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내가 이연에게 큰 관심이 없는 건, 저번 일 탓이 아니었다. 그저 정말 관심이 가지 않을 뿐.
“저번 일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이 손 좀 놓아주지 않을래?”
이연은 계속해서 내 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나로서는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리 님, 저는…… 그저 아리 님을…….”
그가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잡힌 손목이 점점 아려왔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리야?”
그때, 은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은월!”
은월의 등장에 이연이 당황하며 나의 손목을 놓았다. 은월의 시선이 내 손목으로 향했다.
그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내 손목을 들었다. 어찌나 세게 잡은 건지, 이연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이연을 향했다. 그의 눈빛에 이연이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네가 인간이고, 내일 신국을 떠난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은월의 차가운 어조에 이연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았다. 은월은 잠시간 이연을 노려보다 나를 데리고 청화관으로 향했다.
이연 쪽을 돌아보자, 그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
“거기 아무도 없느냐?”
별채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사화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사화의 하인이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사화 님.”
사화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려 하인에게 손찌검했다.
쫘악.
하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바로 했다.
“어떻게 해서든 백령 님을 모셔오라 명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사화 님. 여노라는 시녀가 집무실로 가는 것을 막는 바람에…….”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인은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사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화는 그런 그를 차갑게 내려 보다,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당장 궁으로 가서 서신을 쓰거라. 내가 썼다는 것이 어디에도 흘러나가면 안 될 것이다.”
“그……자들에게 말입니까?”
“그래.”
“아, 알겠습니다, 사화 님. 명 받들겠습니다.”
사화가 차갑게 그를 응시하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아들였다.
황급히 나가는 하인을 보며 사화가 탁자에 놓인 다기와 그릇을 쓸어버렸다.
쨍그랑.
아름다운 다기들과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곧 죽을 것이, 감히 내게……!”
사화는 한 번도 남들에게 보여준 적 없는 분에 찬 얼굴로 깨진 다기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백령의 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시길. 내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한 건, 모두 당신들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