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이랑과 바랑을 피할 겸해서 은월과 함께 청화관으로 돌아왔다. 나는 바랑이 준 두루마리를 눈으로 열심히 훑고 있는 은월을 보며 물었다.
“뭐야?”
“뭐가.”
그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나는 볼에 크게 바람을 넣고 입을 내밀었다.
“나래랑 별채에서 무슨 얘기 했어?”
“글쎄. 무슨 얘기를 했을까.”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잽싸게 가로챘다. 그러자, 그제야 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잔뜩 성이 난 내 얼굴을 본 은월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턱을 괴곤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궁금해?”
“어……?”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두루마리를 쥔 내 손을 잡았다.
그와 내 손이 맞닿았다.
그가 몸을 굽혀 내게 다가오자 우리 둘 사이는 굉장히 가까워졌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아,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궁금해, 아리야?”
“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왜 궁금한데?”
응? 왜냐니…….
그러게, 나는 이게 뭐라고 그렇게 궁금한 걸까? 단순 호기심?
“궁금하니까……?”
“단순한 호기심이야? 아니면 신경이 쓰이는 거야?”
그의 부드러운 물음에 나는 잠시간 대답을 망설였다.
은월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멍해졌다.
호기심? 신경?
상대가 나래라서 그런 걸까? 그런 거면…… 나래를 의식하고 있는 건가. 왜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가 두루마리를 도로 가져갔다.
“이건 뭔지 안 궁금하고?”
그가 가져간 두루마리를 내게 보여주며 물었다.
“아, 맞아! 궁금해! 그거 뭐야?”
북쪽 땅의 문양이 새겨진 두루마리. 이걸 왜 바랑이 은월에게 준 거지?
“비밀이야.”
은월이 다시 두루마리를 읽으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은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그를 향해 소리치자,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날 바라보았다.
“농담이야. 이건, 예전 북쪽 땅에 관한 자료야.”
“예전 북쪽 땅?”
“응. 사화가 통치하기 전, 그때 자료야.”
사화가 통치하기 전이면…….
그 당시 누가 북쪽 땅을 통치하고 있었던 거지?
“사화의 아버지가 통치하던 때야.”
나의 표정을 읽은 듯한 은월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사화 전에는, 사화의 아버지가 통치했었구나.
“그 당시에는 내가 사법관이 아니어서, 그때 자료는 좀처럼 쉽게 얻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바랑에게 부탁했던 거구나. 그런데. 바랑은 어째서 북쪽 땅의 자료를 가지고 있는 거지?
“근데 왜 똥개가 북쪽 땅의 자료를 가지고 있을까?”
“그건 나도 의문이긴 해. 바랑이 먼저 내게 주겠다고 했거든.”
바랑이 먼저?
요즘 바랑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하지?
“은월, 요즘 바랑이 좀 이상하지 않아?”
“좀 그렇긴 하지. 정확히는 이랑이 동쪽 땅에 온 이후 같은데…….”
이랑이 동쪽 땅에 오고 나서 뭘 어떻게 했길래 바랑이 착실하고 도움이 되는 거지?
다른 신수라면 모를까. 바랑이 갑자기 그렇게 변하니 오만가지 의문이 다 들었다.
“일단 지금 바랑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덕분에 서쪽 땅에 신경 쓸 일도 덜었고.”
은월은 현 상황이 의심쩍긴 하지만, 그에게는 좋은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은월이 서쪽 땅을 갈 일도 많이 줄었고.
“어쨌든, 지금은 더 급한 게 있으니까. 그쪽은 청아와 산에게 말해놨어.”
“응?”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바랑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저렇게 변했는지, 무시할 순 없잖아?”
은월, 바랑이 많이 못 미덥구나.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아무튼, 지금은 미호를 문 뱀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니까.”
은월의 마음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불현듯 미호가 뱀에게 물리던 때가 생각났다.
분명 검은 뱀이었지…….
“은월, 검은 뱀이…… 흔해?”
“그리 흔하지는 않아. 북쪽 땅에서도, 검은 뱀은 강한 신수로 분류되거든.”
그래, 사화도 검은 뱀이니까…….
그런데, 영아가 사화의 독과는 다른 종류라고 했었어.
“은월, 혹시…… 전 북쪽 땅의 주인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
나의 질문에 은월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엔 그가 떠올랐어. 그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검은 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가 많지 않으니까.”
처음에 그랬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잖아?
그 이유는 곧 은월이 알려주었다.
“그는 이미 죽었어.”
“죽었다고? 왜?”
“죄를 지어서.”
은월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에 사법관이 죄인을 처단하지 못하고 역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 적 있지?”
“응, 그랬었지…….”
“그게 사화의 아버지이자, 전대 주인인 사현의 이야기야.”
사현?
그의 이름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사법관이 처단하지 못했다면, 도대체 누가…….”
“백령.”
어……?
백령이…… 전대 주인을 죽였다고? 사화의 아버지를?
잠깐만, 그런데 사화는 백령을 연모하고 있잖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백령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게 아니라 연모하는 이유가 뭐지?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아무튼, 그래서 사현은 범인이 될 수 없다는 거야. 그런데, 그 당시 사현을 따르는 검은 뱀들이 있었으니까. 그때 자료를 조사 중인 거지.”
사현을 따르던 검은 뱀들…….
잠시간 사색에 잠겨 있는데, 은월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아리야.”
“응?”
“검은 뱀은, 절대로 가까이해선 안 돼.”
그의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아마 지금 내게 이 이야기를 해준 이유도, 내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알았어, 근데 은월…….”
“응?”
눈을 멀뚱멀뚱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호랑이는 괜찮은 거야?”
그를 향해 묻자, 그가 또다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 특유의 미소에 마음이 녹는 것만 같았다.
“안 괜찮으면?”
“으, 응?”
“안 괜찮으면 넌 어떡하려고?”
거,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그의 질문에 가슴이 요동쳤다. 내가 한참을 대답 못 하자, 그가 다시 두루마리로 시선을 옮겼다.
“은월, 너 또 나 놀린 거지.”
“그걸 이제 알았어?”
능청스러운 그의 대답에 호통을 치며 난리를 피웠지만,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날 바라볼 뿐이었다.
***
“그래서, 미호가 그걸 승낙했다는 거냐? 그 늙은 여우가 노망이 났나?”
백령의 집무실. 이곳은 하원의 짜증 섞인 음성으로 인해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보고하러 온 애꿎은 자타만 입도 벙긋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예……. 미호 님이 그리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자타의 보고에 하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허, 진짜 이 여우를 그냥.”
자타의 말인즉슨, 인간이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을 미호가 용인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백령과 하원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아니, 가당키나 해? 일주일이나 인간을 돌려보내는 걸 미룬다고? 왜? 넌 그걸 듣고만 있었냐, 자타?”
하원의 계속되는 질책에 자타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자타의 잘못이 아니잖아, 이 수달아!
자꾸만 자타를 책망하는 하원에, 인상을 쓰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하원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진정하고 이유를 들어보지, 하원.”
백령의 차분한 어조에 하원이 화를 삭이려 노력했다. 대충 상황이 진정되자, 자타가 나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잃어버린 물건이 있답니다.”
“잃어버린 물건?”
백령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그러자, 자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예, 그래서 그걸 찾을 때까지만 보류해달라고 미호 님께 간곡히 청했다고 합니다.”
“칼 같은 미호가 겨우 그런 얘기를 들어줬단 말이냐?”
하원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 또한 하원의 그러한 부분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미호는 그 인간을 싫어했는데, 잃어버릴 물건을 찾을 말미를 주다니…….
“미호 님도 물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사화 님과 바랑 님도 인간의 편을 드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화와 바랑? 바랑은 또 언제 거기까지 갔대?
“들어보니 바랑 님은 이연 님과 술을 자주 마시면서 친분이 두터워졌다고 합니다…….”
바랑은 고새 이연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듯하다.
참, 똥개는 똥개인 게, 미호가 그렇게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인간과 어울렸다니…….
“그리고 그동안 인간세계와 신국의 경계까지 아리 님과 함께할 정예 호위를 꾸릴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아무래도 사화와 바랑의 이야기보다, 미호는 이쪽에 좀 더 중점을 둔 것 같았다.
“일단은 알았으니, 나가봐라.”
“네, 백령 님.”
자타가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자타가 집무실을 나가자 하원이 팔짱을 끼고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뭔 정예 호위까지……. 유세는.”
“그렇게 말해도, 왠지 호위에 네가 낄 것 같은데.”
백령의 무심한 말에 하원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내, 내가 뭐하러!”
저렇게 말해도 따라올 거면서…….
“아니야?”
“…….”
나의 물음에 하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의 남색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뿐만이랴, 그의 동그란 귀 또한 오들오들 떨렸다.
“호위에 안 껴도 따라올 기세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백령.”
백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자, 하원이 노발대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튼 아니라니까! 이 물의 주인, 하원을 뭐로 보고!”
뭐로 보긴, 수달으로 보지.
그의 동그란 귀가 쫑긋, 솟았다. 또한, 그의 탐스러운 꼬리 또한 바짝 솟아있었다.
그는 그대로 문을 세게 여닫고 집무실을 나갔다. 어찌나 세게 닫은 건지, 궁 안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들키니까 쑥스럽나 보군.”
“그러게.”
나와 백령은 떠나간 하원의 자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