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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28)화 (128/167)

128.

“그래서…… 신국제 중에 날 찾아온 것인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남쪽 땅의 주인인 천강이었다. 천강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내가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응. 가휘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

“난 네게 알려줄 게 없다. 그것보다 백령에게 말은 하고 온 것이냐.”

그의 표정에 귀찮음이 역력했다. 나는 눈을 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지.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뭐 어떻게 하면 알게 될지도. 어쩌면 백령이 한달음에 달려올 수도 있겠다.”

천강은 백령을 상대하는 것을 굉장히 껄끄러워했다. 그리고, 어쩌다 그것을 알게 된 나는 그의 마음을 돌리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었다.

“……은월에게 못된 것만 배웠군.”

“알려줘, 가휘라는 인간과 시호에 대해서.”

그가 내게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는 차를 내왔다.

“일단…… 기억나는 대로만 알려주지. 가휘라는 인간은 정말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정말 어쩌다가 우연히 신국으로 흘러들어왔고, 동쪽 땅에 머물게 되었지.”

동쪽 땅에 머물렀다는 내용을 제외하면 여기까지는 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다음부터가 중요했다.

“시호는 인간에게도 관심이 많았지. 워낙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으니까. 그에게 인간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더군.”

천강이 찻잔을 돌렸다. 그날의 일들을 회상하듯이.

“너도 한 번쯤은 들었지 싶은데.”

그가 찻잔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호가 구슬의 힘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단 것을.”

“들은 적 있어.”

예전에, 이랑의 성인식 때였나.

이랑에게서 시호에 관해 들었었지.

천강이 눈을 감았다. 그는 시호의 얘기를 하는 것이 불편한 것 같았다.

“시호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신수였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인간의 세상을 속으로 동경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

“동경?”

“그래. 그리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천강이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항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

“그래.”

소문이라면…… 어떤 소문을 말하는 거지?

“시호가 자유를 위해, 자신의 연인인 백령을 버리고, 이 신국을 버리고, 인간 세상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도 안 돼.

예상치 못한 천강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시호가 백령을 버렸다는 거야? 자유를 위해?

가휘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가려고?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런 소문이 떠돌았던 것뿐이니까. 그녀에게 사실을 듣기 전에, 그녀는…….”

그는 뒷말을 끝내 내뱉지 못하고 도로 삼켜버렸다. 그는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괴로운 것 같았다.

“그럼, 가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됐어? 그도 죽었어?”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시호는 죽었다고?

천강의 말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그 또한 천강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호의 죽음은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게 많다. 그렇기에 백령과 미호는 설산 조사를 하려 했지.”

예전에 백령과 은월이 사화에게 허가를 받던 그 조사…….

“설산에서 죽은 거야, 시호가?”

“그래. 분명 인간계와 연결된 곳은 중앙 숲인데, 어째서 시호가 그곳까지 갔는지 또한 이해가 안 되는 점 중 하나다.”

천강의 말을 모두 들은 나는, 어딘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녀의 죽음에는 무언가가 더 있는 듯했지만, 현재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흔적에는 흑기의 흔적 또한 남아 있었지. 그걸 알게 된 미호와 백령은 크게 노했고, 흑기들의 신력을 모조리 빼앗았지.”

자유를 찾아 인간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던 그녀가, 왜 하필이면 설산에서 흑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거지?

천강 또한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았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젠 시호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것이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에게 어느 정도 원하는 대답은 다 들었다. 어찌 되었든, 가휘라는 인간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고, 그는 시호를 좋아했…… 응?

그러고 보니 왜 이거에 관한 얘기는 없어?

“천강, 가휘가 시호 좋아했던 거, 너도 알아?”

“시호는 모든 신수의 사랑을 받았…….”

“아니, 이성으로서 말이야.”

천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몰랐던 것 같다.

그렇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짝사랑이었다는 건가.

“고마워, 천강. 도움 많이 됐어.”

나의 감사 인사에 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인사는 됐으니, 어디 가서 내게 들었다고 말하지 마라. 특히 백령이라면 더더욱.”

“걱정하지 마. 백령은 너한테 관심 없어.”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너무 솔직했나……?

“근데, 천강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항간에 떠돌던 소문 말이야.”

나의 물음에 그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아주 살짝, 슬픔이 비쳤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그 당시엔 그 소문을 믿고,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천강은 소문을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호의 이야기를 불편해했고.

“천강.”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차분하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 정도 소문에 흔들리고 의심할 정도면…….”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차의 향이 씁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배신감을 느낄 무언가가 있긴 했어?”

그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줘서 고마웠어. 나는 이만 일어날게.”

그와의 대화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시호가, 신수들에게 받은 사랑은 한없이 얕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그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후, 그의 궁을 빠져나왔다. 신국제의 영향으로 워낙 떠들썩한지라, 아무도 모르게 돌아오는 것이 가능했다.

***

“아리가 왔었다고?”

천강의 맞은 편, 그러니까, 아까 아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이번에는 은월이 앉아 있었다.

은월의 물음에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던 건가?”

천강은 은월이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쭉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사실을 은월은 금방 알아차렸다.

“내게 그러더군. 그 정도 소문에 흔들리고 의심할 정도면 배신감을 느낄 무언가가 있긴 했느냐고.”

천강의 대답에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아리가 맞는 말 했네.”

은월은 전적으로 아리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어렸던 은월조차 천강을 보며 아리와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그렇기에 은월이 뭐가 문제냐는 듯, 천강을 바라보았다.

그에 천강은 깔끔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래, 내 잘못이지. 지금은 보다시피 후회하는 중이다.”

“이미 지나간 뒤에 후회하면 뭐해?”

은월은 그런 천강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물을 엎질러 놓고 후회해봤자, 물은 다시 담기지 않는다.

천강이 시호에게 준 상처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근데 아리가 갑자기 왜 시호와 가휘에 관심을 가지는 건지……. 은월?”

은월은 천강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넌 아리가 갑자기 왜 저런지 아는 건가?”

“글쎄다. 뭐, 다 생각이 있겠지. 아리는 아리니까.”

차 한 잔을 다 비운 은월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간다. 열심히 참회해라.”

은월이 나가자, 방안에 혼자 남은 천강이 왠지 똑같은 인사를 두 번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백령.”

신국제여도 그의 집무실은 고요했다. 집무실에는 오직 백령과 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백령은 언제나처럼 일을 하다, 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언제나 일을 하다가도 내가 부르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니야.”

“이걸로 다섯 번째군.”

“응? 뭐가?”

“아리, 네가 날 불렀다가 마는 게.”

다, 다섯 번이나 그랬나?

아, 아닐 텐데……. 기껏해야 세 번 정도.

백령의 무덤덤한 표정을 본 나는, 결국 다섯 번이기를 인정했다.

“……미안해.”

“왜 자꾸 날 부르는 것이냐?”

그가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급기야 그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맞은 편에 와서 앉았다. 그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백령은 항간에 떠돌던 시호의 소문을 믿었어? 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얼른 머리를 굴려 다른 질문을 찾아내기 바빴다.

“백령, 넌……. 아직도 내가 신국을 떠났으면 좋겠어?”

나의 물음에 백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소리인가. 저번에 대답하지 않았느냐.”

그 대답이 굉장히 애매했단 게 문제 아닐까…….

오늘도 백령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기는 그른 것 같다.

“그래도 난 역시, 신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

나의 말에 백령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런 그의 표정을 못 본 척했다.

“그런데, 네가 진정으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지 않느냐?”

백령의 물음에 나는 그대로 자는 척을 시도했다. 다행히, 백령은 정말로 내가 잠든 것으로 생각한 건지, 자신의 도포를 내 위에 올려 주었다.

“잠든 것이냐…….”

백령은 그렇게 나를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자는 척만 하려던 나는, 그런 그의 시선에 못 이겨 정말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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