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신국제는 네 군데의 땅 중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모든 곳이 축제였고, 모든 신수가 참여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도운 건지, 날씨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늘은 맑았고, 청아한 바람이 불었으며, 기온 또한 적절했다.
신국제에서 봉수대에 불을 붙이는 것은, 동쪽 땅도, 서쪽 땅도, 북쪽 땅도, 남쪽 땅도 아닌, 중앙, 미호의 궁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이곳, 미호의 궁 앞, 봉수대 앞에 서 있었다.
수많은 신수의 함성이 들렸다. 내 성인식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함성이었다.
와아아-
그 함성을 기반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봉수대 앞으로.
봉수대 앞에 다다랐을 때 즈음, 신국제의 시작을 알리는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이 피어오르자 함성은 더 커졌다.
많은 신수 앞에서, 나는 내가 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신국제 내내 일렁이고 있을 푸른 불꽃을 등에 진 채.
“흑흑, 우리 아리 님이, 아리 님이…….”
여노와 자하가 점화를 마치고 온 나를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얘들아, 다 좋은데……. 왜 내 앞을 꼭 가로막고 우는 거니.
“대견합니다.”
대견이라고 하니, 백령과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자하에게 당부했다.
“대견이란 말 하지 마.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네? 그럼 무슨 말을…….”
자하가 글썽이던 눈물을 뚝 그치고,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어쨌든,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아, 알겠습니다, 아리 님.”
자하가 수긍하며 물러나자, 이번에는 마루를 끌고 온 아루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루가 마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마루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리 님. 지난번엔 정말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깊이 반성 중입니다.”
매우 딱딱한 인사였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사과나 감사 인사를 받으려 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루와 마루를 지나쳐, 나는 백령의 근처로 향했다. 축제이니만큼 신수가 워낙 많아, 그에게 향하는 길이 험난했다.
다행히 멀리서 날 발견한 그가 내게로 왔다.
“잘 마쳤군.”
“응, 다행히 어렵지 않았…….”
그때, 오랜만이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여어. 오랜만이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똥개였다. 저번 성인식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거니까.
“봉수대, 아리는 푸른 불꽃이던데. 미호랑은 달라서 신기했어.”
바랑이 재밌다는 듯,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호도 푸른 불꽃이었는데, 그렇지, 백령?”
시호도 푸른 불꽃이었다고?
봉수대에 피어오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진한 푸른색의 아름다운 불꽃.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바랑.”
“응?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시호……. 푸른 불꽃. 가휘.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던 걸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색에 잠긴 채 발걸음을 움직였다.
“아리야?”
바랑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부름을 무시한 채,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어째서일까, 문득 가휘의 일기가 생각났다.
“아리 님?”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난 이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 건가요?”
“이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마치 행복하다는 듯이.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리 님.”
“아…….”
별걸 고마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어……. 제가 마침 길을 잃었거든요.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연이 난처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신수의 시선이 이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계속 이렇게 신수의 시선을 받아서 좋을 게 없긴 하겠구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이연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따라붙었다.
“사화를 따라온 거야? 어디서 헤어졌어?”
“사화 님은 안내를 잘 해주셨는데, 제가 부족한 탓에 자꾸만 길을 잃네요. 어디서 길을 잃은 건지는 잘 기억이…….”
하긴, 이연은 신국의 지리에 전혀 익숙하지 않을 텐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신수가 너무 많아서 사화의 기운을 찾기도 어려운데…….
이연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걷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저번에도 그랬거든요.”
“그래도 빨리 찾는 게 좋으니까.”
이연이 ‘하긴, 그건 그렇죠.’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저 봤어요. 푸른 불꽃을 피우는 거요.”
“아, 그거…….”
“멋지던데요?”
그의 칭찬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봉수대에 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상대가 누구더라도.
감사 인사를 하기도,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던 나는, 먼저 화제를 돌렸다.
“저번에 인간들의 세상에 관해서 얘기해준다고 했었지 않아?”
“아, 기억하고 계셨군요. 전 물어보지 않으시길래,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궁금하고, 흥미로운 일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매우 관심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어물쩍 넘기는 게 낫겠지…….
“인간 세상은 이곳과는 매우 달라요. 신수님들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이곳만큼 신비롭지도 않아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곳은, 자유가 없죠. 만나는 신수님들마다 규범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갑자기 날 보는 그의 시선이 당황스러웠다.
“아리 님도 그렇고요. 왠지, 이곳에 섞일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연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나쁜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좋게 들리는 말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경계심이 일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미안, 여기서부턴 너 혼자 가야겠다.”
“네?”
그에 그가 크게 당황했다.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약이 있어서.”
“누구랑요?”
그가 갑자기 내 손목을 붙잡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꽤 경직되어 버린 것 같았다.
신수들의 시선 때문인가.
“누구랑 선약이 있으신 건가요?”
그가 재차 물었다. 이대로 그에게 말려든다면 헤어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와 이연을 떨어트렸다.
“그 선약, 나랑 있는 거라.”
“이랑…….”
이랑이 이연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리 좀 데려갈게, 인간아.”
이랑이 이연의 이름을 모를 리는 없었지만, 일부러 ‘인간’이라고 부른 것 같았다.
“갈까, 아리야?”
이랑이 내 손을 잡았다.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날 데려간 곳은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미호의 궁 지리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귀찮게 저 인간을 상대하고 있어?”
“나쁜 인간은 아니야.”
“너한테 치근덕거리잖아. 그럼 나한텐 나빠 보일 수밖에 없어.”
……그런 거로 죄를 따진다면, 네가 제일 형량이 높지 않을까?
내 눈빛을 느낀 이랑은 내 시선을 회피하며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외야, 나는 예외!”
“왜 넌 예외인데?”
“나는 순수해. 결백해. 청렴해.”
이랑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접었다. 나는 그의 미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날 보던 이랑이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생뚱맞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하나는 알겠어.”
“뭘 알아?”
“저 인간은 네 꿈속의 남자가 아니란 걸.”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주제로 넘어가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보여, 저 인간.”
“그런가.”
“저 인간이랑 대화할 때, 네 표정도 좋지 않았는걸.”
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고?
이곳에 섞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표정에까지 드러났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고마워, 이랑. 곤란할 때 나타나 줘서.”
“뭐, 나야 어차피 널 찾고 있었으니까.”
“날? 왜?”
“신국제는 신수들이 많이 몰리는 축제니까. 걱정되기도 하고…….”
“하고?”
그가 한참을 대답을 망설였다. 이내, 그는 크게 심호흡한 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너랑 단둘이 축제를 즐기며 할 얘기도…….”
“아리야!”
이랑은 그렇게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폴짝폴짝 뛰어오는 포포 덕분에.
“어, 뭐야? 이랑도 있네.”
포포가 내게로 뛰어올랐다. 나는 포포를 품 안으로 받았다. 품에 안긴 포포가 여우로 변했다.
“너무 떨어져 있었더니, 피곤해. 나 여기서 좀 잘래…….”
“뽀뽀, 난 침대가 아니야.”
앞발로 눈을 비비던 포포는 어느샌가 잠들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이랑이 포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이미 꿈나라로 떠난 포포는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미안해, 이랑.”
이랑에게 싱긋,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랑에겐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알아볼 것도 있었고.
자꾸만 이연이 신경 쓰인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가휘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나는, 가장 가휘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신수에게로 찾아가리라 다짐했다. 그가 순순히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