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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26)화 (126/167)

126.

“마루에게 들었어. 나 대신 봉수대에 불을 붙이는 일을 한다고 했다고.”

나는 지금 상당히 불편했다. 소식을 들은 미호가 날 보자 하기에 미호의 궁에 방문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왜 미호가 저렇게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느냐고!

미호가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포개었다.

“아리야, 정말 고마워. 그리고, 네게 이런 일을 맡겨서 정말 미안해.”

“아, 아니야…….”

미호를 위해서 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 신국을 위해서 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했을 뿐, 그렇기에 지금의 미호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날 위해서 천도를 구해다 줬다고 들었어. 감사 인사가 늦어서 미안해. 정말 고마워.”

미호의 감사 인사는 어딘가 거북했고,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미호에게 한참을 시달리다가 겨우 나왔다.

궁 앞에는 백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것 같았다.

“노망난 여우가 말도 많군.”

나는 백령과 함께 동쪽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미호의 궁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백령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화가 백령에게 인사했다.

“어쩜, 미호 님께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이리 마주치다니.”

그녀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호한테 문안을 오는데 저런 화려한 옷을 대체 왜 꺼내 입어?

물론, 백령은 그녀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는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아리 님.”

그때, 사화의 옆에 붙어 있던 이연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 백령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연을 응시했다.

“아, 안녕.”

나는 마지 못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가 크게 기뻐했다.

“이만 가지.”

백령이 사화와 이연을 무시하고 가려 하자, 사화가 백령의 옷자락을 잡았다.

“백령 님, 그럼, 신국제 때 뵙겠습니다.”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너도, 네 옆에 있는 아이도.”

백령의 차가운 어조에도 사화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은 채 우릴 향해 미소지었다.

저 미소에 안 넘어가는 남자가…… 많지, 참.

나는 아름다운 사화의 미소를 보다 정신을 차리고 백령의 뒤를 따랐다.

백령의 궁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자는, 다름 아닌 자하였다. 자하가 외출한 주인 기다리는 똥강아지처럼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백령 님, 아리 님!”

우릴 발견한 자하가 헤벌쭉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궁에 돌아와 바로 향한 곳은 서고였다. 신국제에 관한 정보를 직접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요즘 자주 들락거리는 중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전생이나 꿈에 관한 것도.

사실은 후자가 더 중요한 사안이긴 하다.

“아리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나랑 놀자.”

포포가 책만 읽는 나를 보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내일이 신국제의 시작이잖아.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포포의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바쁘다. 안 그래도 미호를 보러 다녀왔는걸.

“뭘 공부까지 해! 그냥 축제를 즐기고 마는 거지.”

“뽀뽀, 또 그런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나쁜 건 없잖아.

이 책은 다 읽었고…… 저쪽에 한 번 가볼까?

나는 서고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들이 조금 어지럽게 올려져 있었다.

뭐지……? 왜 이건 아무도 안 건드린 걸까?

먼지를 털어내자, 책들 밑에 낡은 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자……?

나는 곧장 상자를 들었다. 상자를 열자, 먼지가 날렸다.

“켈록.”

너무나 많은 먼지의 양에 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을 보았다.

뭐야, 책이잖아?

대체 어떤 책이기에 상자 안에 넣어놓은 거지?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폈다. 그런데, 이건 책이 아니었다.

일기?

먼지가 워낙 쌓여 있던 탓에 글자를 읽어내려가기 힘들었다. 그뿐이랴, 종이 군데군데 쥐가 파먹은 흔적들이 여실했다.

일기의 뒤편을 보았다. 그곳엔 일기의 주인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가휘’?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봐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자주 들은 이름은 아닌 것 같았다.

“뽀뽀, 가휘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보지 않았어?”

“가, 뭐? 먹는 거야?”

……됐다, 말을 말자. 애초에 자하 이름도 기억 못 하는 포포에게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나는 일기를 펼쳐,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읽기로 했다.

신국제?

놀랍게도 그 일기엔 신국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문단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수들의 가장 큰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마침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이런 축제를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을 보았고, 그보다 아름다운 그녀가 봉수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마음 한편이 아렸다. 할 수 있다면…….

다음 부분부터는 찢겨 있어.

특별한 것 없는 일기였다. 마지막 문단이 조금 이상했지만, 짝사랑하는 상대를 보며 쓴 것이겠거니, 하며 넘겼다.

그런데, 봉수대에 불을 붙인 ‘그녀’라면…… 미호 아니면 시호인데.

어?

그제야 나는 가휘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났다.

신국에 처음으로 온 인간……. 미호가 많은 걸 앗아갔다고 말한, 그 인간의 이름이 가휘였다.

맙소사. 그자의 일기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자는 설마, 동쪽 땅으로 왔던 건가?

나는 너덜너덜한 일기장을 도로 상자 안에 넣었다. 어차피 더 이상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없었다.

“왜 그래, 아리야?”

나의 표정을 본 포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는 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가휘가 있을 당시, 봉수대에 불을 붙인 신수는 누구였을까?

미호일까, 시호일까.

만약 시호였다면…… 그가 시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사실 생각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미호가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이니,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봉수대에 불을 붙이는 것……. 일기에서 가휘는 봉수대에 불을 붙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지.

이번에 봉수대에 불을 붙이는 신수는 나다. 갑자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뽀뽀, 나가자.”

“응?”

나는 곧장 포포를 데리고 서고에서 나왔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근데 가휘는…… 이후, 어떻게 된 거지?

인간이니, 지금 그가 죽었단 것을 추측할 수 있었지만, 그의 서사에 관해선 들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미호의 증오만 들었어.

그는 인간세계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나 혼자 고민하고 있어 봐야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아, 아리야, 어디 가!”

포포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일단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

그렇게 도착한 곳은 청화관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은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와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가, 살며시 앉았다.

깊게 잠든 건가……?

나는 은월의 얼굴 위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은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왔나, 다시 가야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은월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용건 있는 거 아니었어?”

“넌 자는 거 아니었어?”

그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예쁜 그의 회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빛을 냈다.

“그래서, 왜 온 건데?”

그의 물음에 난 잠시간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가휘라는 인간에 대해서 알아?”

“가휘?”

은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기억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이내 그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내가 엄청 어릴 때, 만났던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릴 때?”

“어, 그때도 신국제가 다가올 때 즈음…… 그러니까, 이맘때였지.”

신국제……. 그 일기의 내용과 같았다.

“그땐 시호가 있었어?”

“그건 왜 묻는데?”

그가 내게 얼굴을 내밀고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우리 아리 님께선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진 걸까?”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그의 보조개가 그의 미소에 따라 쏙, 하고 들어갔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님.”

“으, 응?”

“그래서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갑자기 얘는 왜 존댓말을 하고 난리야! 사람 당황하게 말이야.

결국, 나는 그에게 더 이상 숨기는 것을 포기했다.

“일기를 봤어.”

“무슨 일기?”

“가휘라는 사람의 일기.”

은월은 계속 말하라는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신국제에서 ‘그녀가 봉수대에 불을 붙였다.’라는 내용이 있어서, 그때 그녀가 누구인가…… 해서.”

“그랬습니까?”

계속되는 그의 존댓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은월, 그거 하지 마!”

“싫어?”

그가 턱을 괴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요즘 통 안 찾아오길래, 작은 주인님이라 해본 건데, 싫었어?”

“아, 아니!”

“그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내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아니, 뭔가 좀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와서 용건부터 말하면 돼?”

은월은 내가 이런 일로 그를 찾아온 게 불만인 건가?

한순간에 기분이 축 처졌다. 나의 귀와 꼬리 또한 아마 축 처져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 나 찾아오지 마?”

“……그게 왜 그렇게 돼?”

그가 한숨을 쉬며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다린다는 말이잖아, 아리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조금 빨라진 심장 소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은월, 이거 반칙이야. 이런 말 반칙이야!

정작 그런 말을 한 당사자인 은월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아리, 네 질문에 답을 주자면, 시호 맞아. ……아리야?”

은월이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곧장 일어나서 궁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은월이랑 있다가는 머리가 멍해지고 말 것이다.

최근에 안 그랬는데, 왜 또 이러지? 정말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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