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무릉도에서 돌아온 지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신국은 신국제의 준비로 떠들썩했다.
평소였다면 신국제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을 터지만, 나는 정자에 앉아 사색에 잠긴 지 오래였다.
“꿈이…… 그냥 꿈이 아니었다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분명 꿈에서 본 자는 백란이 맞다. 하지만 백란은 날 만난 적이 없다고 했었지.
‘아리’는 만난 적이 없다고 했어.
그럼 꿈속의 나는, ‘아리’가 아닌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결국,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절규했다.
“으아아!”
……이게 무슨 가설이야, 머리 터지겠다.
“아잇, 깜짝이야!”
나의 절규에 놀란 포포가 팔짝 뛰었다. 그의 꼬리가 빳빳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 백란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려 하지 말 거라. 오히려 네게 독이 될 터이니.”
나는 포포의 볼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러자, 포포가 적잖게 당황하며 발버둥 쳤다.
“뽀뽀, 진짜 아는 것이 내게 독이 될까?”
“무은 헛오이야아.”
내게 볼이 잡힌 포포는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아듣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되지 않았다.
백란이 내게 그렇게 말한 데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환생한 존재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내 전생은…… 시호일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내가 그녀와 닮은 이유, 그녀의 구슬이 지금 내게 있는 이유.
모든 게 설명이 가능해.
“아, 잠시만. 그런데 분명 하원이 신수는 신수로 다시 태어난댔어.”
“죄를 지은 신수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마저 소멸해버린다고 알려져 있고, 죄를 짓지 않은 신수는 신수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난 인간이잖아?
하원의 말은 대부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나는 포포를 들어 올리고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걸까, 뽀뽀?”
“아, 아리야, 이것 좀 놓고 말해봐아아아.”
하원 또한 사실인지는 모른다고 했으니, 그의 말을 무시하더라도 내 전생이 시호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무런 증거도, 기억도 없으니.
심증이라고는 꿈의 내용뿐.
그렇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리야? 거기서 뭐 해?”
“이랑……?”
오랜만에 보는 이랑이었다.
자하, 이놈 또 어디 간 거야?
이랑이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잡힌 포포를 가리켰다.
“아리야, 그러다 포포 죽어.”
“어? 어! 뽀뽀!”
나는 황급히 포포를 놓아주었고, 화가 단단히 난 포포를 위해 다과를 준비했다. 포포는 내게 등을 돌린 채로 다과를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고민을 하길래 그렇게 힘들어해?”
“아, 그게…….”
나는 간단하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백란이나 시호를 언급하지 않고, 내 전생에 관해 알고 싶다는 것과 꿈에 관한 얘기들만 그에게 알려주었다.
“흠……. 꿈은 그냥 꿈일 뿐인 거 아니야?”
“그, 그! 꿈에 나타난 사람이 다음 날 나타났어!”
“예지몽?”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데…….”
예지몽이 아니라, 내 기억 같은, 그런 느낌이었단 말이야.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다.”
“뭘?”
나의 물음에 그의 싱그러운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가 알려고 하면 할수록, 기억나지 않을 거란 거.”
“응?”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랑에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런 건 대개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있다 보면 어떤 하나의 일이 계기가 되어 실타래가 풀리는 거잖아?”
그, 그런 거야?
이랑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억지로 기억하려 할수록 기억은 도망가 버리기도 하니까.
“일단 꿈에 나온 자를 만나보는 거 어때?”
꿈에 나온 자라…….
그게 말이다. 한 사람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한 사람은…….
신선인걸?
곤란하다는 나의 표정을 읽은 이랑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만날 수 없나 보네. 그럼 마음 편하게 기다려보는 건 어때? 혹시 알아?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지?”
마음을 편하게?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하며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이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몸을 뒤로 눕히며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들이 있잖아. 네게 소중한 거라면, 네가 알아야 할 때 기억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이랑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작은 똥개였다면, 지금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로 보였다.
“이랑, 너 생각보다 좋은 애였구나.”
“응? 생각보다? 좋은……?”
이랑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곤 수줍게 날 바라보았다.
얘 갑자기 왜 이래?
“내가 조, 좋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는 이후, 겹겹이 싸여버린 이랑의 오해를 푸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작은 똥개는, 역시 작은 똥개였어.
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후, 포포와 함께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리야, 큰 소리가 들려!”
백령의 집무실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누군가가 크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루,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리 님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했어! 그런데 그런 의식을 왜!”
그의 목소리는 아루였다. 아루가 저렇게까지 화내는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였기에, 깜짝 놀랐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미호 님은 지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셨어. 구슬을 가진 자가 신국에 미호 님과 아리 님 말고 더 있어? 세 번째 구슬은 사라진 지 오래잖아. 그거라도 찾아오던가.”
“마루!”
잔뜩 상기된 아루의 목소리에 반해 마루의 목소리는 굉장히 냉정하고 차분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들어오자, 마루와 아루, 그리고 백령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세 신수를 번갈아 보았다.
“아, 아리 님…….”
아루가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랑 관련된 이야기던데, 무슨 소리야?”
나의 물음에 아루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마루가 실언한 것…….”
“제가 백령 님께 요구했습니다. 신국제에서 미호 님이 하시던 일을 이번에는 아리 님이 대신해야 할 듯해서요.”
“마루, 너!”
마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아루가 크게 화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그런데도 마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또한 구슬을 가진 자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아루가 당장이라도 마루에게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 옷소매를 잡았다.
“괜찮아, 아루.”
그를 다독이자, 그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나는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에게 물었다.
“내게 그런 의무가 있어, 백령?”
나의 물음에 백령은 고개를 저었다.
“네게 구슬을 멋대로 넘긴 건 미호다. 그때 분명 네게 구슬의 의무를 지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백령의 말에 마루가 흠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곤란하게 흘러가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백령 님.”
“어떤 일인데? 일단 들어보자.”
나는 우선 마루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에 아루와 나, 그리고 마루는 집무실 중앙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백령은 여전히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었다.
“시호 님이 원래 하시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미호 님이 하시는 일이죠. 신국제에서 봉화대에 불을 붙이는 것.”
그저 불을 붙이는 일이라고?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포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냥 불을 붙이는 거면, 다른 신수가 하면 안 돼?”
포포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구슬을 가진 자만 봉화대에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신국제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죠.”
하긴, 대개 축제나 행사에서 불을 붙이는 건 큰 의미니까.
그러니 구슬을 가진 신국의 절대자가 불을 붙이게 되어 있는 거겠지.
“이번 신국제에선 그 불을 아리 님이 붙여 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깐요.”
마루가 나의 푸른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본 채, 입을 열었다.
“불을 붙이는 거, 어려운 일 아니야. 충분히 할 수 있어. 이번 한 번만이라면, 내가 할게.”
“아리 님!”
나의 말에 아루가 속상해하며 날 불렀다.
반대로 마루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나는 곧장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견고한 나의 목소리에 마루가 긴장하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마루, 네가 내게 요구하고 강요할 권리는 없어.”
마루가 곧장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 말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리 님. 미호 님이 병상에 누워 계시니, 너무 막무가내로 나왔습니다. 깊이 반성하겠습니다.”
마루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마루는 미호의 직속 하인이자, 가장 가까운 신수이니. 아마 그녀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확실히 짚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반복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니, 나는 그에게 알려주어야만 했다. 내게 당연히 그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백령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말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왜, 왜……?”
“아니다.”
나를 바라보며 그가 즐겁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갑자기 왜 웃는 거야?
집무실에 있던 모든 이가 그의 미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은 그만 나가거라.”
백령이 나를 제외한 신수들을 집무실에서 나가라 명했다. 그에 집무실에는 나와 백령만이 남게 되었다.
“왜 웃어, 백령?”
나는 억울한 마음에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러자, 그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웃음소리는 처음이라, 내가 그를 쏘아붙이고 있던 사실도 잊어버렸다.
“대견해서 그런 것이다, 아리야.”
그가 부드러운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자, 잠깐만. 대견이라니! 난 다 큰지 오래인데!
그의 말에 기분이 팍 상한 나는, 입을 내밀고 새침한 표정으로 백령을 쏘아보았다.
“기분 나빴느냐?”
“……몰라.”
나는 백령에게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같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사과하마, 아리야.”
이어 들리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화를 풀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