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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24)화 (124/167)

124.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회색빛의 눈동자였다. 나는 곧장 눈을 크게 뜨고 사태를 파악했다.

눈앞에 왜 은월이 있지……?

“깨어났네.”

다정한 은월의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릉도의 숲속이었다. 옆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맞다, 백란이 밀어서 나 떨어졌었지.

젖어있는 은월을 보며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칠 수 있었다. 그의 젖은 검은 머리칼이 평소보다 짙게 느껴졌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 뚝 흘러내렸다. 반면에 나는 물 한 방울 묻지 않고 깔끔했다.

“은월, 물에 빠진 건 난데 왜 난 물 한 방울 묻지 않았고, 넌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거야?”

영문을 몰라 물으니, 은월이 눈을 휘며 특유의 미소를 흘렸다.

“글쎄. 내가 널 잡기 전까지는 하원의 힘이 널 보호하고 있었으니까?”

“물의 권능?”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원이 준 물의 권능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거구나.

아, 천도는?

분명 품에 안고 뛰어내렸는데……!

내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은월이 실소를 터트리며 자신의 품에서 천도를 꺼냈다.

“이걸 찾는 거야?”

“어, 어! 천도!”

“네가 꼭 붙들고 있길래 챙겨놨어.”

그가 내게 천도를 내밀었다. 나는 양손으로 조심스레 천도를 받았다.

천도를 손에 쥔 나는 은월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은월!”

그러자, 은월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왜?”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그를 향해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와 눈을 맞췄다. 잠시 우리 사이엔 왠지 모를 적막감이 흘렀다.

그 적막감을 깬 건 나와 은월이 아닌, 다른 이였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군.”

백령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내 손에 쥐어진 천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아리야.”

그가 내 머리 위에 큰 손을 얹었다. 왠지 모르게 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다친 데는 없느냐.”

백령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응, 다행히.”

백령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잠시간 내게 미소를 보여주던 그는 이내 뒤돌아섰다.

나와 은월은 백령을 따라 숲을 나왔다. 길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가는 거냐?”

청풍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주위 풍경이 우리가 처음 왔던 해안가로 바뀌어 버렸다. 그에 백령과 은월은 정박해 있는 나룻배로 향했다.

“청풍,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천도를 구할 수 있었어.”

청풍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나는 이내 백령과 은월을 따라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잘 가라, 아리야.”

그가 내게 손을 흔들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하얀 연기가 퍼졌다. 그 하얀 연기가 퍼지고 퍼져, 무릉도는 안개로 다시 뒤덮여버렸다.

마치, 출입문을 닫은 것처럼.

나룻배는 저번과 같았다. 아무도 노를 젓지 않았지만 스스로 물살을 가르며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멀리서 우릴 기다리는 자하와 포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 고양아, 저기 아까 그 배 아니야?”

“뭐? 어디?”

“저기!”

“안 보이는데?”

“네 눈이 삐었나 보다.”

“이 꼬마 여우가!”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자하와 포포가 맞았다. 둘을 두고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배가 육지에 정박했다. 우릴 본 자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도 자하의 눈물을 신경 쓰는 이 없이, 우리는 곧장 궁으로 향했다.

***

“천도를 구해오신 겁니까?”

영아가 돌아온 우리를 버선발로 맞이했다. 나는 그런 영아에게 품 안에 소중히 넣어 온 천도를 내밀었다.

“이게, 그 전설의 열매로군요. 살아생전 이걸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영아가 감탄하며 조심스레 천도를 받아들었다.

“금방 약을 제조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영아가 짧은 인사와 함께 약을 제조하러 몸을 움직였다. 영아의 새로운 조수, 자라 신수는 약을 제조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고했다.

“미호 님은 무탈하십니다.”

자라 신수가 우리에게 고개 숙여 보고했다. 그의 보고에 미호를 바라보았다. 미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늦지 않아 다행이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 영아가 만든 약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아마 천도에서 새어 나오던 빛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영아가 약을 미호의 입에 넣었다. 그러자, 미호가 표정을 조금씩 찡그리기 시작했다.

“약 효과가 도는군요. 다행입니다.”

영아가 남은 약을 전부 미호에게 먹인 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깨어나실 겁니다. 허나…… 깨어난다고 해도 바로 기력을 되찾지는 못하실 듯합니다.”

“그렇다는 건…….”

영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아리 님의 성인식을 치를 만큼의 여력이 안 되실 것 같다는 말입니다, 백령 님.”

영아가 백령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그녀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와 백령을 바라보았다.

“아리 님의 성인식을…… 미루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는 건, 신국제를 먼저 마쳐야 한다는 것. 축복을 내려줄 미호가 병상에 누워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내 성인식을 미뤄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백령은 인상을 구길 뿐, 영아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번 일로 항간에 말이 많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영아의 말에 백령이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 그의 집무실로 향한 것 같았다.

백령이 방에서 나가자, 영아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리 님, 천도를 구해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들어가서 쉬시지요. 원하신다면 탕약이라도 올려 드릴까요?”

영아의 탕약이라…….

영아가 만드는 약은 항상 나쁘지 않았다. 가볍게 먹기도 좋았고, 쓴맛도 그리 강하지 않았었다.

“그럼, 그럴…….”

“아, 마침 수하가 있으니, 수하에게 부탁하도록 하지요. 수하 또한 탕약 실력으로는 으뜸이랍니다.”

수긍하려던 찰나, 영아가 덧붙인 말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실력은 중요하지 않아, 맛이 중요한 거지.

약을 맛으로 먹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쓴 약을 먹어야 할까? 맛이 없으면 먹기 싫은 것은 당연한 것.

“영아, 그럼 난 들어가서 좀 쉴게. 미호를 잘 부탁해.”

나는 영아가 더 권하기 전에, 황급히 방에서 나왔다.

***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땅, 무릉도. 그곳엔 세 명의 신선이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백란, 휘월, 청풍. 세 신선은 떠나간 아리 일행을 그리며 신국의 방향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어떻게 자식들이 그리 판박인지.”

청풍이 진저리치며 고개를 가로젓자, 백란과 휘월이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누굴 닮았다는 거지?”

“난 그런 버릇없는 놈과는 전혀 다른데. 청풍, 눈이 어떻게 됐나 보군.”

두 신선의 면박에 청풍은 억울했지만, 곱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 아이가 이번에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청풍의 물음에 백란과 휘월이 머릿속으로 아리를 떠올렸다.

“글쎄. 어떻게 되려나…….”

휘월이 애매한 대답을 내놓자, 청풍이 술잔을 들이켰다.

“뭐, 어찌 됐든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지, 백란?”

청풍이 웃으며 백란을 바라보았지만, 백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에 청풍이 투덜거렸지만, 그는 익숙하다는 듯, 그런 그를 무시했다.

이내 정자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청아한 바람이 정자 안에 불어왔다. 백란의 긴 푸른빛의 은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전보다 강하더군.”

백란이 멍하니 읊조린 말에, 청풍과 휘월의 시선이 백란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나서도 그녀가 강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청풍과 휘월은 백란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조용히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그래서 어떠냐, 시호. ……아니, 아리야. 네가 얻은 자유는.’

백란이 조용히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꽃잎이 흩날렸다. 마치 그날의 풍경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래도 지금 행복하니, 된 것 아닌가.”

휘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하지만 백란은 휘월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네들이 보기엔 그녀가 행복해 보였는가.”

백란이 입꼬리를 올렸다. 허탈하다는 듯이.

“때론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르겠군.”

꽃잎이 백란의 술잔에 내려앉았다. 술잔에 내려앉은 꽃잎을 보며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고, 운명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지.”

백란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흘러가는 일들이.

“그들은 스스로 택할 것이다. 무엇이든.”

휘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휘월은 어떤 선택을 하든, 아리가 아리로서,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우린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답을 찾는 그들을 보게 될 테니.”

휘월의 말을 끝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은은한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그들은 달빛을 바라보며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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