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나는 무릎 위에 떨어진 열매를 조심스레 잡았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도였다.
“천도의 나무가, 네게 열매를 주었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내게 일말의 관심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이.
“백란, 저는…….”
“스스로 답을 찾지 않았느냐.”
그가 나에 관해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기껏 얻은 삶을, 이리 낭비해서야 하겠느냐?”
낭비……?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내 삶을 낭비하는 거라고?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알려 하지 말거라. 오히려 네게 독이 될 터이니.”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것은, 돌아가는 길 아니냐?”
돌아가는 길?
그제야 알게 되었다. 깊은 숲, 그러니까 천도의 나무가 있는 이곳은…….
‘무릉도의 산꼭대기’였다. 아니, 산꼭대기보다는 절벽 위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길 내려가라고……?”
나, 나 혼자?
뭐, 뛰어내리란 말인가? 그러면 즉사할 거 같은데.
“백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리……. 아?”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 혼자 이곳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천천히 절벽의 끝들을 살펴보았다.
이곳에서 떨어지려면…… 적어도 안전한 곳에서 떨어져야 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절벽 밑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천도를 품에 안았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잠깐만, 그래도 이런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지 않을까?
“내가 도와주마.”
그때, 누군가가 나의 등을 떠밀었다. 이 목소린 분명 백란이었다.
아니, 왜 상의도 없이 밀어! 백령 아빠면 다야? 다냐고!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졌다. 곧이어,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에 빠졌다.
***
백령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결계를 어떻게 해야 깨부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깊은 숲속, 천도의 나무가 있는 곳은 아무리 백령이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령의 그런 분한 속과는 달리, 무릉도는 매우 아름답고 고요하기만 했다.
“아직도 이러고 있느냐.”
그런 백령의 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백란이었다. 백란은 백령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리는 어디 있지?”
백령은 백란의 등장에 황급히 아리부터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초조하게 백란을 바라보았다.
“떨어졌다.”
“……?”
백령은 천도의 나무에 가본 적이 없기에, 아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백란에게 상황을 물어보려던 찰나.
풍덩-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물에 빠지는 듯한 소리가 백령의 귓가에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라. 아리에겐 물의 가호가 있었으니.”
백란은 처음부터 하원이 아리에게 물의 가호를 빌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아리를 낭떠러지로 밀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를 구할 이는 네가 아니더라도 있지 않으냐?”
백령 또한 백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으나,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도 걱정되느냐, 아리가?”
백란의 물음에 백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란 또한 백령의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은 없느냐?”
백란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 듯 말했다. 그에 백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우가 있습니다.”
“아, 그 하급 여우?”
백령과 백란이 말하는 여우는 포포였다. 백령은 포포가 제게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형님, 이상해요. 아리가 없으면 전 아파요. 그리고…….”
포포에게 들었던 것은, 백령 또한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백란이라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백란은 그 여우를 알고 있었다.
“그 여우가 아리와 연관성이 있습니까?”
백란이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그 여우가 네게 중요한 단서를 줄지도 모르겠구나.”
“무엇에 관한 단서를 준다는 말입니까?”
“네가 찾지 못했던 것.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리에게도 무언가를 알려줄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게 좋은 결과를 초래할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은 알려주지 않겠다는 그의 뜻을 백령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여우가 아리에게 이끌린 것은 당연하다. 아리가 없었으면, 그 아이도 없었을 테니.”
그 말을 들은 백령은 순간적으로 짚이는 곳이 있었다. 백령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이제 알았느냐? 그 여우가 아리의 운명에 묶여 있다는 것을.”
백령은 백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대충 알 수 있었다.
***
“지금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휘월의 얘기를 들은 은월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휘월은 그런 은월의 표정을 보고 눈을 휘며 웃었다.
“왜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지?”
“마음에 안 드니깐요.”
은월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왜? 넌 백령을 절대 못 이길 것 같아서?”
휘월은 자신이 한 말에 은월이 기분 나빠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은월은 눈을 휘며 웃었다. 그에 오히려 휘월이 당황했다.
“전 한 번도 백령을 이기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은월의 말에 휘월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대체 왜…….”
“제게 아리는, 그저 아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은월 또한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휘월이 그런 은월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러니, 그딴 거 알게 뭡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휘월이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은월은 그런 휘월을 보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겨우 무게 잡고 한다는 얘기가 그 정도라니, 다음에는 좀 더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괜히 시간만 낭비했지 않습니까.”
“이번에 가면 찾아오지도 않을 아들놈이 버릇없이 바라는 것도 참 많구나.”
휘월은 기껏 알려줬더니 본전도 찾지 못했다며 웃으며 투덜거렸다. 은월은 그러든 말든,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둘이 미소를 띤 채로 장난스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절 보고 싶으시면 신국으로 내려오시면 되잖습니까.”
“내려가서 사법관인 네놈한테 빌빌 기라는 것이냐.”
휘월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은월이 고개를 비스듬히 하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원하시면 사법관 자리 물려드리겠습니다. 전 필요 없으니까요.”
“아비를 과로사로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전 과로사로 사망해도 상관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부성애가 그래서 되겠습니까?”
고개를 저으며 ‘이래서 신선이란…….’라며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월의 물음에 휘월이 눈을 휘며 능청을 떨었다.
“이 정도면 들끓는 부성애가 아니냐.”
“파양한 아들이라도 그렇게는 안 할 듯합니다만.”
은월이 인상을 찌푸리자, 휘월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은월은 그런 휘월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큰 상관은 없었지만.
“그럼 네가 아리 손잡고 위로 올라는 오는 건 어떻냐?”
“싫습니다.”
“왜?”
“아리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리는 신국에 남고 싶어 했다. 은월은 그런 아리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아리가 싫어하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은월도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가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처가로구나.”
“애처가라니요. 저는 아리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그때였다.
풍덩-
누군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은월이 당황하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소리…….”
“뭐하냐, 안 달려가고?”
휘월이 은월을 보며 혀를 찼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은월을 보며 그는 찻잔을 다시 들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웃음기 가득 담긴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네 마누라가 물에 빠지지 않았느냐.”
휘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은월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사라진 은월을 보며 휘월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아비한테 인사도 안 하는 버릇하고는……. 누굴 닮은 것인지, 쯧.”
누가 봐도 자신과 똑 닮은 은월이었지만, 휘월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은월이 물가에 도착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아리가 떨어진 곳을 찾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지?’
그때, 푸른빛이 물가에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물의 권능?
그는 곧장 빛이 반짝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물 안을 들여다본 은월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 안에는, 푸른 장막에 둘러싸인 아리가 있었기 때문에.
아리가 어째서 이곳으로 떨어진 것인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은월이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은월은 곧바로 물속으로 들어가, 아리를 물 밖으로 꺼냈다.
“아리야, 아리야?”
물가에 아리를 눕힌 은월이 아리의 이름을 불렀다. 은월은 곧바로 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하원의 힘으로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은월은 그저 아리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곧이어, 정신을 차린 아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