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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22)화 (122/167)

122.

은월은 아리와 백령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들의 기운은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은월의 눈앞엔 커다란 폭포가 보였다.

쏴아아-

폭포 소리에 은월은 잠시간 멍하니 폭포를 바라보았다.

“은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은월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아버지?”

은월의 아버지. 휘월이었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카락.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 하지만 은월보다 중후한 느낌이 드는 용모였다. 그것은, 아직 은월이 앳된 느낌이 강한 탓에 비교적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은월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휘월은 눈을 휘며 웃었다.

“오랜만이로구나.”

다정히 은월의 안부를 물은 휘월은, 팔짱을 끼며 자신과 똑 닮은 은월을 바라보았다.

“이곳엔 어쩐 일로…….”

“청풍이 소식을 전해오더구나.”

‘청풍이? 그렇다는 말은…….’

은월의 표정을 본 휘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란도 와 있다는 말이지.”

“백란이라면…….”

“백령의 아버지이자, 나의 친우 말이다.”

그제야 은월은 왜 갑자기 백령이 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 은월은 그 또한 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겠거니, 하였다.

“그런데, 네가 찾는 아이는 아마 못 찾을 것이다.”

휘월의 말에 은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모습을 본 휘월은 설명을 덧붙였다.

“아리라는 아이 말이다. 백란이 깊은 숲속으로 데려갔으니, 너나 백령은 찾지 못해.”

휘월은 더 이상 아리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은월은 백란이 아리를 데려갔다는 사실에 표정이 굳어버렸다.

휘월은 그런 은월의 모습에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은월이 흥미를 보일 만한 것으로.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을 텐데?”

휘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 특유의 미소가 은월의 미소와 퍽 닮아있었다.

묻고 싶은 것. 은월이 지금 알고 싶은 것은 단 한 여인에 관한 것이었다.

은월은 휘월과 닮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 또한, 그걸 알려주기 위해 절 찾아온 것, 아닙니까?”

은월의 말에 휘월은 미소로 수긍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으니, 자리를 옮겨야겠구나.”

휘월이 손을 까딱하자,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

바람을 타고 끌려온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색 빛깔의 찬란한 숲, 그리고 나의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에는 연한 분홍색의 열매가 달려 있었다. 그 열매에선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것이 천도라는 것을.

“천도……!”

나는 나무로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리 손을 뻗어도 열매가 손에 닿지 않았다.

“천도의 나무가 아직 널 인정하진 않았나 보군.”

백란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가 천도의 나무 앞에 털썩, 앉았다.

“아무리 팔을 뻗어봐야 소용없으니,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앉는 게 낫지 않겠느냐?”

백란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함께 앉았다. 그의 옆에 앉자,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에 이곳이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꿈속에서 보던 풍경과 비슷할지도.

“내게 궁금한 것은 없느냐?”

그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

“……백령의 아버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 거지?

뒷말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그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서슴없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말 그대로다. 백령은 내 아들이지.”

아버지……라는 건가, 정말로?

그렇다면 다른 신수들도?

“신수는 모두 신선들의 자식인 건가요?”

나의 물음에 백란을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할 순 없지. 자연적으로 생겨난 신수들도 있을 테니.”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신수들도 부부의 연을 맺어 낳은 자식들도 많지 않으냐? 그 자식들까지 신선들의 자식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그의 물음에 은월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랑의 선조라는 청풍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뭐, 이건 다 쓸모없는 이야기고.”

신선들은 자신의 바로 밑 자식이 아니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자식이라고 해도, 신수는 신수고, 신선은 신선이다. 우린 신수의 일에 관심도 없고, 간섭하려 하지도 않지.”

청풍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청풍과 달리, 그는 다른 말을 덧붙였다.

“다만, 지켜보기는 하지. 너희들의 간곡한 바람을 들어주기도 하고.”

바람?

저번에 백령의 집무실에서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소원과 대가>라는 제목의 책.

그때 분명히…….

신수의 바람을 원하는 대로 들어줄지는 알 수 없다고 쓰여 있었지.

나는 책에 쓰여진 것을 토대로 조심스레 말했다.

“신수의 바람을, 신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 그가 잠시 놀란 듯했다. 이내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너희들 몫이다.”

선택…….

꿈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혹시, 전에 저와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무심결에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나의 말에 놀란 듯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는 한동안 날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라고?

나는 그의 대답에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럼 어째서 내 꿈에…….

“난 널 만난 적이 없다.”

그의 대답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냈다.

“넌 날 만난 적이 있느냐?”

그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할지, 아니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지 고민에 빠졌다.

“만난 적이……있지도, 없지도 않습니다.”

“되게 애매한 대답이로구나.”

그가 나의 대답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가 원하던 대답이 아닌 것 같았다.

“지나간 것에 얽매여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걸 잃고 말아, 아리야.”

그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내게 각인이라도 시키듯이.

“있으면 있는 거일 테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새로운 건 새로운 것이지.”

그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삶이든, 인연이든 말이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지도.

“그럼 다시 물으마.”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똑바로 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날 만난 적이 있느냐?”

나는 어째서인지 지금 해야 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없……습니다.”

아리인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이것만은 분명한 진실이다.

나의 대답에 그는 만족한 것 같았다.

“아까, 백령에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내,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나의 말에 대답했다.

“백령은 모든 걸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했구나.”

그가 날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시밭길이란 걸 알면서도 자처해서 가려 하니, 아비로선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아픈 아비의 표정이라기엔 그는 믿을 수 없이 평온했다.

“누굴 닮아 저리 어리석은지.”

그는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바람이 멎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그럼 이제 내가 네게 물으마.”

그가 다시 한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난, 자동으로 흠칫했다.

“넌, 무얼 하고 싶으냐?”

무얼…… 하고 싶냐고?

그의 포괄적인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얼 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이냐.”

그가 다시 한번 내게 물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갔다.

“저는…….”

“네가 정해야 한다, 아리야.”

그가 내게 조언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정해야, 네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나의 길.

어려운 말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네가 지닌 의무이자, 보답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말이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한 채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계속해서 질문했다.

“넌 다른 이의 투영에 흔들리지 않느냐? 스스로 그에 투영하지 않느냐?”

그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의 질문이 곤란해서가 아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서도 아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나는, 시호의 그림자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꾸만 그에 흔들리고 말았었다.

다른 신수의 말에, 기대에, 착각에, 투영에.

“넌 누구냐, 아리야.”

그의 물음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움직였다.

“나는…….”

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하지만 대답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아리야.”

나의 대답에 그가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갈 곳을 잃으면, 상처를 입는 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꽃잎이 흩날렸다.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고, 이내 나의 무릎 위에 찬란히 빛나는 열매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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