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무릉도.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신선, 청풍은 정자에 앉은 두 호랑이의 노골적인 적대에 술잔을 들이켰다.
청풍이 설움 섞인 목소리가 정자를 울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네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냐?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노려보고만 있고.”
그의 말에 두 호랑이는 표정을 구겼다. 백령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신선들이 신수들의 생에 관심이 없듯, 신수도 신선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백령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자, 꽃잎이 내려와 그의 술잔 위에 떨어졌다.
은월 또한 백령의 말에 극히 동감하고 있었다.
청풍이 둘의 반응에 눈을 찡그리며 은월과 백령을 바라보았다. 청풍은 조금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내가 업어 키웠는데.”
그의 투덜거림에 백령과 은월은 혀를 내둘렀다. 둘의 기억상 그는 한 번도 백령과 은월을 키운 적이 없었다.
여전히 백령과 은월의 반응이 좋지 않자, 청풍은 슬그머니 둘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바꿨다.
“큼, 큼. 그래도 너무하네, 내가 너희의 아비는 아니지만, 삼촌 정도는 되는 거 같은데.”
“항상 관조자이기를 자처했으면서, 양심 없단 생각은 안 드는 건가.”
은월의 무심한 말에 청풍이 실소를 터트렸다. 마치 우습다는 듯이.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니냐? 평소엔 관심 없으면서, 필요할 때만 신을 찾잖아.”
은월과 백령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능청스러운 말투로 ‘지금도 봐, 천도가 필요하니까 고개 뻣뻣이 들고 찾아온 거. 에잉, 쯧쯧.’이라고 말하며 혀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은 무릉도가 그립지 않냐, 너넨?”
그의 물음에 백령과 은월이 동시에 단호하게 답했다. 그들에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전혀.”
청풍이 입맛을 다시며 서운함을 토로했지만, 둘은 무표정으로 청풍을 응시했다.
둘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청풍이 곰방대를 꼬나물었다. 담배 연기가 바람을 따라 휘날리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정통으로 맞은 은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맞아야 청풍을 좀 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지친 거냐?”
청풍의 말에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 은월은,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기지개를 켜며 정자를 벗어났다.
“좋은 거 알려주려고 했는데, 가 버렸네.”
“좋은 거?”
그의 말에 백령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청풍이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어째서인지 백령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 좋은 거. 근데 갑자기 말하기 싫어졌어. 이거 알려주면 너 갈 거잖아.”
백령이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에 청풍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방금 백란이 도착했어.”
“백란이?”
백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아리를 만나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령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거봐, 가잖아. 아, 이래서 알려주기 싫었는데.”
백령은 능청스러운 청풍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곧장 자리를 떠났다.
그는 아리가 들어갔을 숲으로 향했다.
‘아직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게 아니라면, 만날 수 있다.’
백령은 부디 아리가 아직 그곳에 들어간 것이 아니길 바라며 발걸음을 급히 움직였다.
바람을 쐬고 온 은월이 비워진 백령의 자리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청풍은 여전히 곰방대를 꼬나문 채로 돌아온 은월을 환영했다.
“백령은 어디 갔지?”
“글쎄. 너처럼 바람 쐬러 갔나 보지. 아님, 누굴 만나러 갔거나.”
은월이 미심쩍어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청풍은 은월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너마저 가면, 진짜 궁상맞게 혼자 술 마셔야 하잖아. 안되지, 안돼.”
은월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청풍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혼자서 잘만 마시는 영감이, 왜 이래?’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청풍이 은월에게 손짓했다. 은월은 그 손짓을 철저히 무시했다.
“넌 나랑 술이나 마시자.”
“싫은데.”
은월이 눈을 휘며 미소를 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자를 떠났다.
결국, 청풍은 혼자 정자에 남아 슬픈 얼굴로 술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그놈들 자식 아니랄까 봐. 각자 아비들을 쏙 빼닮았어, 아주.”
청풍은 백령과 은월의 아비 얼굴들을 떠올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진저리쳤다.
***
“날 구하고 싶다고?”
미호가 날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넌 무엇이냐?”
내가…… 무엇이냐고?
그녀의 질문에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재차 물었다.
“넌, 무엇을 위해 신국에 남은 것이냐?”
신국에…….
나는…….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란 듯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어째서 날 구하려 하는 거지?”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대답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단호하고 확신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만이, 지금 미호를 구할 수 있으니까.
나의 대답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나는 미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그녀와 마주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마치 안개처럼 미호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이내,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저기가 설마, 숲 안쪽으로 가는 길?
그렇게 숲 안쪽으로 가려는 순간,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을 통과했구나. 의외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얼마 안 가,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뒤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장발. 푸른 빛이 도는 은발. 신비롭고도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내가 아는 누구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용모.
……백령과 무척이나 닮은, 하지만 백령은 아니야.
나는, 이 자를 본 적이 있어.
어제 꿨던…… 꿈속에서.
“……당신은 누구죠?”
나의 물음에 그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에게 답을 듣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백란이다.”
“백란……?”
그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절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뒤로 물러나자. 그가 다가오는 걸 멈추었다.
“청풍과 비슷한 존재라 할 수 있지.”
청풍이라면…… 백란도 신선인 건가?
하지만 청풍과는 확연히 달라. 그보다 좀 더 강하단 느낌이 드는 신선이다.
“이곳에 온 이유는 들었다. 천도를 가져가기 위해서라고.”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위협을 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땅에 발을 들였다라……. 여전하구나.”
여전하다고?
그는 마치 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마치, 오래전에 본 적이 있다는 듯이.
설마 내가 꾸는 꿈이, 그저 꿈이 아니었던 거야?
정말 나와 관련된 꿈이었던 거야?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저 꿈으로 치부했었던 것들이, 사실은 정말 나와 연관이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갑갑해졌다.
잠깐만, 그 여자는 누구지?
내게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라고 했던, 그 여자.
그리고 날 아련하게 바라보던 남자는?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본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그가 당황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때, 그의 손목을 누군가가 제지했다.
백란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을 잡은 자에게로 향했다.
“백령, 오랜만이구나.”
백란의 손목을 잡은 자는, 다름 아닌 백령이었다. 백령이 무표정으로 백란을 응시했다.
이내 백란이 나와 백령을 번갈아 보았다.
“안 그래도 네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의 말에 백령이 그의 손목을 놓으며 나의 앞에 섰다.
“안타깝게도, 전 대답해 드릴 게 없습니다.”
백란이 가소롭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에 둘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네 뜻은 알겠구나.”
백란이 백령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백령은 끝까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란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그의 푸른 눈은, 정말 백령의 눈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에 아름다운 그의 눈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저 아이를 옆에 두는 것. 그것 또한 ……이니.”
그가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령은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안타깝구나.”
그가 나와 백령, 둘 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둘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리 어려운 길을 가는 건지.”
그가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도 백령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힘든 건 네가 아니겠느냐, 백령.”
그가 그리 말하자, 백령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던 것 같다. 백령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백령이 백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백령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이 무덤덤했다. 그에 백란이 실소를 터트렸다.
아버지? 방금 아버지라고 그런 거야, 백령이?
그렇다면, 저 신선이 백령의 아버지라는 거야?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백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닮았다지만, 둘이 부자 관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백령이 아닌, 백란의 뒤에 서 있었다.
“이 아이의 운명은, 내가 정하도록 하지.”
일순간 백령의 푸른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예상치 못한 백란의 행동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바람이 나와 백란의 발밑에서 느껴졌다. 백란이 손짓을 하자, 나와 그는 바람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배, 백령!”
나는 황급히 백령을 불렀다. 이건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아리……!”
그가 다시 한번 손짓을 하자, 백령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백란과 나는 깊은 숲속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