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백령과 은월, 그리고 내가 무릉도의 땅을 밟자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고 무릉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신국보다 더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이곳은, 낙원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오색 빛깔의 아름답고 찬란한 풍경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웅장했다.
“뭐야, 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
그때, 누군가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바다처럼 푸른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는,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달갑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청풍.”
그의 이름을 부른 건 백령이었다.
청풍, 이라는 이름이구나…….
“백호에, 흑호에, 구슬을 가진…… 뭐, 어쨌든. 너희 조합 뭐냐?”
그가 우리를 차례대로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천도를 찾으러 왔어.”
나의 말에 그가 흥미롭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호오, 천도라…….”
“무릉도의 깊은 숲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줘.”
“싫은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이내 자욱한 담배 연기가 퍼졌다.
익숙지 않은 냄새에 나는 본능적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부탁이야, 나는 천도가 꼭 필요…….”
“왜?”
왜냐니, 그건…….
그가 비웃음 섞인 웃음을 내뱉더니,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미호가 쓰러져서?”
뭐야, 다 알고 있잖아?
그가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신선들은 너희 신수들의 목숨에 관심 없어. 알잖아?”
그의 웃음기 가득한 말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천도가 꼭 필요해.
“청풍, 네가 막을 권리는 없을 텐데. 아리는 구슬을 가지고 있…….”
“그럼 뭐해, 인간이잖아?”
그가 백령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그에 백령이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청풍이 그런 백령을 보고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성인식을 치르고 왔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텐데, 그랬으면 신국의 진정한 신수가 됐을 테니까.”
그가 비웃듯 ‘참 안타깝네, 안타까워.’라며 중얼거렸다.
성인식이 가진 의미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쩌면 흑기는 이것까지 예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것보다 둘 다 많이 컸네. 무릉도에서 나갈 땐 꼬꼬마들이었는데.”
이번엔 담배 연기가 백령과 은월에게로 갔다. 그들이 불쾌하다는 듯 손으로 연기를 없앴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곰방대로 해안을 가리켰다.
“용건 끝났으면 돌아가.”
그랬던 그가 갑자기 미소 짓더니, 곰방대를 다시 자신의 입으로 가져왔다.
“……라고 해도 포기 안 하겠지?”
그가 곰방대를 문 채로 말했기에 발음이 뭉개져서 들렸다.
“원하는 게 뭐지?”
백령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자, 청풍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지.”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내밀자, 어디선가 술병이 날아왔다. 사방에서 날아온 술상과 안주는 덤이었다.
이 정도면 정자도 날아오겠어…….
그때였다. 정자가 날아온 건 아니고, 그냥 정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술상과 안주가 예쁘게 자리 잡았다.
한순간에 만들어진 술자리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청풍을 바라보았다.
“놀랐냐?”
그의 기세등등한 모습이 꼴사나워서 일부러 대답은 안 했다.
그가 술상 앞에 털썩, 앉았다. 백령과 은월, 그리고 나 또한 술상으로 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좀 따라봐라.”
그에 백령과 은월이 동시에 청풍을 노려보았다.
“넌 손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쟨 손이 없어도, 곧 죽어도, 술잔이 비는 날이 없을 텐데.”
두 호랑이가 노려보자 한기를 느낀 듯한 청풍이 둘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게 세 명은 자신의 술잔을 스스로 채웠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백령이 어릴 때 내가 술 먹였다가 들켜서 신선들한테 욕먹었는데.”
……얜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똥개보다도 어째 더 심해 보여.
오히려 똥개가 약과라는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시호도 나한테 뭐라 했었지. 오랜만에 와서 어찌나 시끄럽게 굴던지.”
시호?
시호라는 이름에 나는 청풍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벌써 조금씩 발음이 꼬이고 있었다.
“시호도 참 배짱이 좋아. 난 맘에 들어.”
그가 갑자기 날 바라보았다. 아마 나와 시호가 닮아서 그런 거로 생각했다.
백령과 은월이 그런 청풍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흠, 그러고 보니 은월이 있을 때는…….”
은월이 술잔을 비우며 턱을 괴고 그를 노려보았다.
“청풍,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 허락해 주는 건데?”
“기다려봐, 아직 마시는 중이잖아.”
은월이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난 알고 있다. 은월이 지금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라는 것을.
술이 석 잔 정도 들어가자,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더니 기분이 꽤 좋아진 것 같았다.
“좋아, 숲으로 가. 가서 천도를 찾던, 만도를 찾던, 알아서 하고.”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다 가래?”
그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리, 혼자만 가는 걸 허락한다고.”
……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너희 둘은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그리고 술이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가겠다고? 그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백령과 은월은 그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짚었다.
……백령, 은월, 힘내.
나는 속으로 그들을 응원했지만, 끔찍한 현실을 마주한 그들은 청풍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넌 가도 돼.”
그가 훠이, 훠이 하며 내게 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는 대충 자리를 정리한 후 정자를 나왔다.
아, 그런데 숲은 어디 있…….
숲이 어디 있는지 몰라 돌아가 물으려는데, 바로 눈앞에 보이는 웅장한 숲에 눈을 깜빡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숲을 헤매는 일 따윈 없었다. 애초에 길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같은 풍경만 계속해서 나타났다.
……대체 이 숲은 얼마나 큰 거야?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였다. 분명 숲 깊숙한 곳에 천도의 나무가 있다고 영아가 그랬는데…….
역시, 돌아가서 물어볼까?
돌아온 길을 다시 봤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도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길의 끝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열심히 가던 길을 걸었다.
가다 보면 나오겠지, 그냥 가자.
갑자기 숲속에 안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안개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러지?
“아리야.”
그때, 누군가가 다정하게 날 불렀다. 그 목소리는 부러질 듯 가녀렸지만, 그 누구보다 부드러웠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미호?”
안갯속에서 미호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안았다. 그녀의 품에 갇힌 나는 아직까지 상황이 되지 않았다.
“아리야, 아리야.”
“미호, 어떻게 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다.
“시호야…….”
“미……호?”
“시호야, 보고 싶어…….”
그녀가 나를 껴안던 팔을 풀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넌 왜 시호가 아니야?”
왜 시호가 아니냐니…….
미호의 질문이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매섭게 바뀌었다. 갑자기 바뀐 그녀의 모습에 혼란스러워졌다.
“왜 시호가 아니야? 왜!”
그녀가 내게 호통치며 호소했다. 그녀가 화를 내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시호가 아니란 사실에 상처받고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거짓. 넌 거짓이야. 난 네가 아닌 시호를 원해!”
그녀가 나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넌 동쪽 땅의 작은 주인도 아니고, 시호도 아닌데.”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나를 하찮게 보듯이.
“왜 신국에 있어? 응?”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게 힘겨웠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귀가 아닌, 머리에서 울렸다.
“왜 백령이 떠나라고 했을 때 안 떠난 거야? 왜?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닌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녀의 비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인간인 걸 알면, 다른 신수들이 널 여전히 사랑할까?”
그만해, 제발.
그녀는 자꾸만 내 마음속에 비수를 꽂았다. 나는 너무 괴로웠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그녀가 갑자기 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우리 기특한 아리.”
그녀가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차가운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날 위해 천도를 구하러 온 거야? 아니잖아.”
그녀가 차갑게 날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조금의 애정도 없었다.
“네 본심을 말해봐, 아리야.”
그녀가 나의 양 볼을 잡았다. 그녀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느껴졌다.
“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뭐야?”
“난…….”
“넌?”
그녀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너무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진심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난…… 널 구하고 싶었어, 미호.”
울분을 토하며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나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