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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19)화 (119/167)

119.

자하가 내게 마실 것을 건네주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백령 님. 아까 은월 님이 말씀하신 ‘더 이상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건…….”

그러고 보니 아까 전의 은월도 내게 비슷한 말을 한 번 더 했었다.

“서두르지 마. 지금은 열리지 않으니까.”

뭔가가 있는 건가?

“……무릉도에는, 늙은 영감이 하나 살고 있지.”

“영감?”

내가 관심을 보이자, 백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은월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릉도를 지키는 신선이라고 해야 하나.”

신선이라면…….

“신의 사자와 같은 존재지. 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백령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덧붙여 주었다. 그에 자하와 나는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선이 기분이 좋을 때만 길을 열어.”

은월의 말에 나와 자하는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기, 기분이 좋을 때?

그렇다는 건…….

“길이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말이잖아?”

“정답.”

경악에 찬 나의 외침에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지금 이게 웃을 일이야?

“그럼 평생 안 열어주면 어떡해?”

“그럴 리 없어.”

확신에 찬 은월의 대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신선의 기분에 따라 열리는 것이라면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거니, 저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운이 좋으면 하루. 운이 나빠 봐야 최대 삼 일이야.”

“어떻게 확신해?”

“삼 일에 한 번은 낮술을 먹어야 하는 영감이니까.”

아……?

그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자하에게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애주가거든.”

‘애주가’라는 단어에 빠르게 납득이 되었다.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일은 내팽개치고 놀다가 무릉도나 지키라고 쫓겨난 영감이지.”

……일을 내팽개치고 놀다가 쫓겨나? 누군가가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인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지, 자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누구와 닮았네요.”

“그 누구의 선조 격이니까. 충분히 닮을 수 있지.”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역시 평판은 대대로 이어지는 거구나.

은월이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뭐, 이건 다 쓸모없는 이야기고, 이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하긴, 무릉도에 가는 일도 잘 없다 했었지. 분위기상 미호도 무릉도에 자주 가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렇게 나와 자하의 궁금증은 풀리게 되었고, 대화는 끝이 난 듯했다.

신선이라…….

“신선이라, 만나보고 싶네요.”

자하가 눈을 반짝이며 은월을 바라보았다.

“만나봤자 좋을 게 뭐 있어?”

그에 자하가 급히 수긍하며 생각을 고치는 듯했다.

“아, 은월 님은 신선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무릉도에 있을 때 만나보신 건가?”

자하의 질문에 은월이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피워진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싸부라면 만나보지 않았을까?”

포포가 눈을 빛내며 재차 은월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은월은 끝내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암.”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모닥불 앞이 생각보다 따뜻하고 편안한 탓인지, 자꾸만 눈에 힘이 풀렸다.

“아리 님, 피곤하면 조금 주무셔도 괜찮아요.”

아루가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모닥불을 응시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이내꾸벅꾸벅 졸던 나는 스르륵 눈이 감겨 버렸다.

***

“어찌,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은발, 푸른 눈, 그리고 아름다운 용모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이나 닮았지만, 그가 아니었다.

“벌? 가혹?”

남자는 헛웃음을 쳤다. 당치 않은 말이라는 듯이.

“누구에게 가혹하단 말인가.”

그 남자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네게? 아니면, 그 아이에게?”

그는 내가 아니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의 푸른 눈은 내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나도 이번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만…… 모든 건 너희가 선택한 거다.”

그의 은빛이 도는 장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차가운 바람이 마치 내게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가 비웃듯 샐쭉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이, 네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 아니냐?”

나는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아이는 네 행복을 바랐다.”

차갑게 돌아선 그의 말에 시야가 흐려졌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 네가 보답할 수 있는 건 행복해지는 것, 그것뿐이지 않으냐.”

꽃잎이 떨어졌다. 무수히 많은 푸른 꽃잎들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은, 마치 나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나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말라,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까지.

***

새근새근 잠든 아리를 바라보던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릉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여긴 여전하군.’

그런 백령의 옆에 은월이 다가왔다.

“왜 그렇게 아련하게 봐? 마치 여기 와본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은월의 물음에 백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백령은 은월을 무시하듯 뒤돌았다.

“난 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백령.”

은월의 말에 백령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두 신수의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널 이해시킬 마음 따윈 없다.”

“나도 네게 궁금한 거 없어, 이제는.”

백령은 무표정으로 은월을 바라보았고, 은월은 그런 백령을 보며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이 얘긴 이쯤에서 그만하지.”

백령의 말에 은월이 조용히 수긍했다. 은월을 보던 백령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번 미호 사건은 어떻게 생각하지?”

“짚이는 데가 있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같은 생각이군.”

은월의 말에 백령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단 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매번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지.”

은월의 말에 백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모든 곳을 샅샅이 조사했다. 아직까지 조사를 하지 못한 곳은 오직 그곳뿐이었다.

사화의 고집으로 절대 조사를 할 수 없는 그곳.

“역시, 거기에 뭔가가 있는 건가…….”

은월 또한 백령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산. 시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자, 서쪽 땅과도 연결되어 있어 이동이 용이한 곳.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군, 은월.”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두 신수는 계속해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방법을 찾아낼 순 없었다.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방법뿐인가.’

“신국제. 그날의 변화를 잘 관찰해야 해. 흑기들이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 테니까.”

백령의 푸른 눈과 은월의 회색 눈이 마주쳤다. 그 둘은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목적이 같기에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아리 님 그대로 잠드셨을 텐데, 걸칠 거라도…….’

잠시 졸다가 깬 아루가 아리에게로 다가갔다.

“아…….”

아루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깨자마자 본 풍경이 굉장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왼쪽은 백호, 오른쪽은 흑호였다. 두 호랑이는 아리를 감싼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아루는 저 두 신수가 호랑이의 모습으로 함께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리 님, 감기 걸리실 일은 없으시겠구나.’

아리를 감싸고 있는 두 호랑이의 모습에 아루는 내심 안심하며 기지개를 켰다.

***

“아리야, 일어나.”

포포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졸음에 잘 안 떠지는 눈을 게슴츠레 뜨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뭐, 뭐야?”

나의 앞에, 안개로 뒤덮인 바닷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보이는 섬까지.

저게…… 무릉도인가?

“빨리도 마셨네.”

은월의 말에 나는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무탈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아리 님.”

아루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떠났다. 아무래도 그는 할 일이 많은 듯했다.

바닷가에는 나룻배가 하나 정박해 있었다. 나는 그 나룻배를 보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내가 타고 가야 할 배…….

“그럼, 가지. 자하, 넌 여기 남아라.”

“네.”

자하가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아, 자하는 무릉도로 못 들어가지.

저번에 하원이 말하길, 무릉도는 아무 신수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 사실을 자하 또한 알기에 별말 없이 남는 것 같았다.

“그럼, 잘 있어라, 고양…….”

“너도 여기 있어야지, 어딜 가!”

날 따라오려던 포포는 자하에게 꼬리를 잡혔다. 아무래도 포포는 자하와 함께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자하가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도 하니까.

“뽀뽀, 금방 다녀올게.”

포포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 요망한 여우야.

“출발하지.”

“응.”

나와 백령, 그리고 은월은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나룻배는 우리가 몸을 싣자, 누군가 노를 저은 것도 아닌데 물살을 가르며 무릉도로 향했다.

아직까진 자욱한 안개에 무릉도가 가려져 어떤 곳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했다. 무엇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이곳이…… 무릉도.

무릉도에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초조한 마음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도 잠시. 나룻배가 무릉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발을 나룻배에서 내렸다. 처음으로 아리는 무릉도의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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