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이윽고 기침 소리가 멎고, 하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샐쭉하게 날 바라보았다.
“뭐, 영 마음에 들진 않지만, 믿을 수 있는 강한 신수가 나뿐이라니 어쩔 수 없지. 이번만 들어주는 거다.”
응? 뭔가 내가 말했던 거랑 조금 다른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잘 된 거……겠지?
나는 하원의 손을 꼭 잡으며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하원.”
“뭐, 이 정도쯤이야.”
그가 뭐가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굉장히 쑥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는 오만상 찡그리면서 싫다고 했으면서…….
“아, 맞다. 하원, 내가 어떻게 네 힘을 쓴 거야?”
잊고 있던 질문을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의 동그란 귀가 들썩였다.
“아, 그거. 너한테 잠깐 물의 권능을 빌려준 거다.”
“딱밤 때릴 때?”
“어, 그렇지.”
그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대충 대답했다.
딱밤을 때릴 때 권능을 빌려주는 신수가 어딨어, 이놈아.
“좀 상냥하게 전해줄 순 없어?”
“네가 내 주인이냐? ‘물의 흐름이 좋지 않아, 아리. 내 권능을 빌리도록 해.’라고 다정하게 말하면서 주게?”
아니, 그런 말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리고, 주인이 아니면 뭐 어때! 그 정도쯤은 해줘도 되잖아! 딱밤 안 때리고 주는 게 어때서!
내 입을 절로 삐죽 튀어나왔다. 앞으로 딱밤을 맞고 싶지 않은 나는, 새침한 말투로 그에게 당부했다.
“딱밤, 아파.”
입을 내민 채로 말을 하느라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얄밉게도 하원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서?”
“아프다고!”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아프다니까.
그가 허, 하며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내가 널 걱정해서 권능을 빌려줬으면 고마워해야 하지 않냐?”
“아니, 고맙긴 한데…….”
“고마우면 됐지.”
됐다, 말을 말자.
그래, 내가 하원의 주인도 아닌데 너무 바라는 게 많았다. 암, 암.
볼일도 끝났겠다, 나는 궁으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돌렸다. 상쾌한 밤의 풀 내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잘 있어, 하원.”
“……벌써 가는 거냐?”
나는 밤하늘 중천에 뜬 달을 가리켰다. 저 달을 보고도 정녕 ‘벌써’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의문이었다.
“늦었어.”
“아리야.”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에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무릉도는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이야. 이번엔 정말로 내 권능이 널 지켰음 좋겠어.”
이번에는 그의 권능이 내게 부여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한 번 더 내게 물의 권능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난 네 주인도 아닌데 걱정하는 거야, 하원?”
“시끄러. 주인 아니라도 걱정할 수 있지.”
그가 나의 눈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고마워.”
달빛이 그와 나를 비추었다. 하원은 여전히 내 눈을 피했고, 달빛에 비추어진 그의 얼굴이 쑥스러움 탓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날이 밝고, 드디어 무릉도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너무 긴장한 탓에 성인식 전날보다도 잠을 못 잤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멀쩡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부른 청마 위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만남이라 청마가 날 잊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청마는 자신을 불러 주어 기쁘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리야, 우린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야?”
포포가 내 어깨에 올라탄 채 내게 물었다.
“무릉도.”
“그게 어디 있는데?”
“그러게.”
……그게 어디 있을까?
다행히 옆에서 나와 포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루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남쪽 땅의 끝에서부터 걸어가면, 바다가 보여요. 그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가야만 무릉도에 닿을 수 있어요, 아리 님.”
“바다?”
나의 물음에 아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무릉도는 섬이에요, 아마도.”
아, 아루는 가본 적이 없어서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는 거구나.
“물론, 저희가 따라갈 수 있는 한계도 그 바다 앞까지랍니다.”
“응? 아루, 너도 가?”
내가 아루도 얘기했던가?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하자, 아루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안내자로서 가는 것뿐입니다. 마침 그쪽 정찰을 할 참이었으니, 잠시 동행하는 거죠.”
“그렇구나, 잘 부탁해, 아루.”
그에 아루가 작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쳇, 아루, 네 녀석도 함께 가다니.”
“자하 넌 좀 조용해. 네가 하도 징징대니까 마음씨 착한 아리 님이 널 두고 가시질 못하는 거 아니야? 네가 애냐?”
오, 아루 너무 예리한데?
이후 아루와 자하가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그들의 싸움은 익숙해져 신경도 쓰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뭐, 보나 마나 아루가 이기겠지.
“이제 출발하지.”
백령의 말에 모두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모든 준비를 끝낸 우리는 무릉도에 가기 위해 남쪽 땅으로 향했다.
남쪽 땅까지는 아무런 이변 없이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남쪽 땅의 끝자락에 거의 다다를 때였다. 청마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추더니 움직이질 않았다.
“청, 청마야?”
당황해 청마를 불렀지만, 청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은월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청마는 여기서부터 갈 수 없어. 이곳부턴 걸어가야 해, 아리야.”
은월의 설명에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나는, 은월의 손을 잡고 땅으로 내려왔다.
“청마야, 고마웠어.”
청마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은월과 백령, 그리고 자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뽀뽀, 무거워, 내려.”
물론, 지금 내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포포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 뭔가 기분 나빠, 여기.”
포포가 몸을 부르르 떨며 께름칙하다는 듯이 주위 땅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나 또한 이 땅은 낯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마치 죽음의 땅 같달까.
그때였다.
“크어어억!”
흑기와 매우 흡사하게 생긴 동물들이 나타났다. 흑기는 인간처럼 생겼지만, 이들은 동물이었다.
“아, 이래서 여긴 싫다니깐요. 벌레보다 더 벌레 같은 흑개들이 잔뜩이라.”
자하와 아루가 나타난 이들을 흑개라고 칭하며 단숨에 처리했다. 흑개들은 흑기들보다도 약한 존재 같았다.
“조심해요, 아리 님. 흑개뿐만 아니라, 흑기 또한 이곳에 서식하고 있으니깐요.”
아루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구슬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 크게 우려가 되진 않았지만, 우린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아루의 말대로 이곳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흑기와 흑개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생채기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다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즈음,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나무를 발견하자마자 해가 저물고 주위가 온통 깜깜해졌다.
“이곳에서 쉬어가라는 건가.”
“그래, 더 이상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거겠지.”
백령과 은월의 대화가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오늘은 더 못 움직인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우린 모닥불을 둘러싸 앉았다. 나는 나무에 기대어 타오르는 불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리야, 무슨 생각 해?”
포포가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냥…….”
그냥 멍했다. 지금 상황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딘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릉도에 가는 게, 자꾸만 망설여져.
“혹시 마음이 바뀌었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된다.”
그때, 백령이 나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모닥불이 비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포기한다면,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엔, 가는 게 나아.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다짐했다. 다시는 그런 나약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오로지 목표만을 생각하기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곳으로.
손가락에 끼워진 동쪽 땅의 수호석을 만지작거렸다. 푸른빛이 반짝였다.
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앞쪽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순간, 다리가 깊게 들어가 버렸다.
다리를 빼내려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아까 본 그, 흑개의 소리랑 닮은 것 같은데.
서둘러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내, 물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분명했다. 이건 흑개였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팔을 붙잡음과 동시에 흑개를 칼로 베었다.
“조심해.”
나의 팔을 붙잡은 이는 은월이었다. 푸른빛이 은월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은월에게 잡힌 팔의 힘으로 겨우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은월….”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았다.
“서두르지 마. 지금은 열리지 않으니까.”
“응?”
“무릉도로 가는 길.”
그가 말을 마치고 바로 날 안아 들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황급히 그를 바라보았다.
“으, 은월!”
“다리 풀렸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은월의 물음에 대답했다.
“……맞아.”
나의 대답에 은월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곱게 휘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은월에게 안긴 채 다시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얌전히 돌아갔다.
백령이 나와 은월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시선이 물에 빠졌던 내 한쪽 발로 향했다.
“빠진 건가. 이제 내려놓지, 은월.”
백령의 말에 은월이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백령이 다가오더니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손수건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고마워, 백령.”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거라. 그게 아무리 잠시라도, 걱정되니.”
백령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