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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17)화 (117/167)

117.

사화가 곱게 입을 다물자, 영아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모두의 앞에 나섰다.

“은월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강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아리 님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영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짙은 자색 눈동자가 빛났다.

“만일, 아리 님이 무릉도로 가신다면 천도에 관해 좀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또다시 내게 집중되었음을 느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킨 후 대답을 망설였다.

내가…… 무릉도를 가야 해.

알고 있다. 미호를 살리려면 내가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지만, 왜 이리 무릉도로 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이라 그런 걸까?

나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고 있음에도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원에게 무릉도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곳으로 가야 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미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고, 상당히 괴로워 보였다.

“아리야.”

백령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가 다정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선택이든, 난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의 말에 눈을 꼭 감았다.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망설이던 대답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무릉도…… 갈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미호를 살리고 싶어.”

나의 대답을 들은 영아가 옆에 있는 자라 신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자라 신수가 영아에게 두루마리를 하나 건넸다.

“저도 천도를 실제로 본 적이 없습니다만……. 다행히 그림과 함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영아가 두루마리를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천도라는 열매는 겉보기에는 복숭아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게, 미호를 살릴 수 있는 약의 재료…….

“천도 나무에 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리 님뿐입니다.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르는 무릉도로…… 아리 님께 큰 짐을 지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영아의 단아한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자색 눈동자에는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죄송합니다.”

영아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후, 바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릉도 안까지 함께 할 순 없겠지만, 가는 길을 함께할 이를 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하긴, 백령과 아리만 보낼 수 없긴 하다. 누군가는 더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

천강이 바랑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바랑은 은근슬쩍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똥개!

하지만 바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무릉도까지 둘이서 가기에는 험난해 보이는 여정이었다.

그렇기에 영아가 나서 신수들을 향해 물었다.

“아리 님과 무릉도 근처까지 가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만약 계신다면 손을 들어주시지요.”

그러자, 방안의 많은 신수가 손을 들었다. 방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사화마저도.

은월과 천강, 그리고 하원은 그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아리 님이 직접 정하시는 거로 하죠.”

영아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했다. 나 또한 영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백령이 모든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나가라. 아리가 선택한 이는 따로 부를 터이니.”

백령의 말에 신수들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자리를 떠났다.

방안을 가득 채우던 신수들이 나가고 나서야 나는 긴장했던 몸을 풀고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방안에는 백령과 영아, 그리고 오직 나만이 남아있었다.

“정해지면 내게 말하거라.”

“알았어.”

영아는 미호의 상태를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고, 나는 잠시간 누구와 함께 가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이미 어렴풋이 정해진 이들이 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정했어.”

나의 한마디에 백령과 영아가 날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내가 정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말했다.

“은월이랑 함께 가고 싶어.”

백령과 은월이 함께 간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내가 아는 신수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두 신수이니.

“그리고, 포포도.”

“그 여우를 말하는 건가……. 알았다.”

백령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포포와 함께 할 것이란 것은 예상했던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안 데려가면 울고불고 난리 나겠지……?

“자하도 데려가자.”

“자하는 네 호위이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아, 맞다. 자하가 내 호위였지.

너무 호위로서의 존재가 미비해서 잊고 있었어…….

나와 백령의 대화를 전부 들은 영아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할게요.”

그녀가 천천히 방을 나갔다. 방안에는 나와 백령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영아가 나가자, 백령이 부드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이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그의 푸른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요즘 그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네가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맞지.

백령의 저의를 알고 있다. 내가 하기 싫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뒀으면 한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미호를 구하고 싶어.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어.”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백령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내 그가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날이 저물어 버렸구나. 내일 날이 밝자마자 떠날 것이니, 채비해두거라.”

나는 끝내 뒤돌아선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

“하원.”

“뭐냐? 네가 여기까지.”

하원을 만나러 그의 강으로 찾아왔다. 날이 저물어 어두웠지만, 그를 찾아와야만 했었다.

나를 본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곳으로 온 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내가 왜 온 건지 알고 있어서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어쨌든 그는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그는 짐작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리, 네 명령은…….”

“그래서 부탁이라고 했잖아.”

이제 알아들을 때도 됐으련만.

하원이 나를 슬쩍 보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뭔데. 난 참고로 무릉도라던가, 무릉도라던가. 무릉도는 절대 갈 의향 없…….”

“응,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하원은 언급 안 했어.”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날 보더니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뭐지? 뭐가 잘 못 된 건가?

“그, 그걸 부탁하러 온 게 아니라고?”

왜 당황하는 거야, 얘는?

이내 나는 하원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지금 마주 보고 있는 상대가 하원이 맞나? 왜 그의 귀와 꼬리가 축 늘어져 버렸지……?

“응, 아닌데……. 내가 부탁하려는 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미호 곁에서 그녀를 지켜 달라는 거야.”

“뭐?”

그가 정색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닦기도 했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그,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미호 곁에 머물러 달라는 거야.”

그의 표정을 살피며 아주 살짝, 단어를 바꿨지만 그럼에도 하원의 표정을 풀리지 않았다.

“지금 누가 누구 곁에 머무르라고?”

그가 정색하며 재차 확인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음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아니, 잘못 들은 거라 내게 대답을 강요하는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나 물리는 거 아니야?

살짝 두려움이 일었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또박또박 말했다.

“미호 곁을 지켜줘. 나 없는 동안.”

“장난해?”

나 장난 아니야……. 내 간절한 눈을 바라봐, 하원.

“장난 아니고…… 부탁하는 거야.”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가 왜?”

그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에 나는 움츠러든 채로 그에게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그…… 흑기랑 내통 중인 신수가 있잖아? 어쩌면 지금 궁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나를 비롯한 신수들이 궁을 비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내가 왜?”

하원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왜 저 늙은 여우 옆에서 재롱을 떨어야 하는데?”

“아니, 재롱을 떨라는 게 아니라…… 지키는 거요.”

“그러니까!”

하원은 완고했다. 이대로라면 날이 새도록 그를 붙잡고 부탁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원의 기분이 풀어질까?

그 방법을 써볼까…….

아냐, 하원이 자하도 아니고 그런 거에 넘어올 리가 없는데.

그래도……. 일단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더 할 말 없냐? 난 간다.”

“하원.”

황급히 그의 소맷자락을 쥐어 잡았다. 그러자 그는 빨리 용건만 말하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아는 신수중에 가장 믿을 만한 신수가 너인걸…….”

“뭐?”

하원의 인상이 아까보다 더 구겨졌다. 하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미호를 맡길 수 있는 신수가 너뿐이야, 하원.”

칭찬은 수달도 춤추게 한댔어…….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미호를 맡길 만한 신수가 나뿐이다?”

“으, 응……. 물론, 여노나 다른 신수들이 수발은 들겠지만 흑기가 공격하거나 그러면……. 하원, 네가 내게 준 물의 힘은 네 원래 힘에 비하면 아주 작은 힘인데도 엄청났는걸? 내가 부탁할 신수는 하원 너뿐이야.”

내 말을 들은 하원은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원의 동그란 귀가 움직인 거 같지?

이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꼬리 또한 양쪽으로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는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고 계속해서 헛기침하고 있었다. 그의 기침 소리가 온 강물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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