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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16)화 (116/167)

116.

“미호! 정신 차려!”

미호가 혼절했다. 나는 직감으로 알았다. 이대로 두면 그녀가 죽을 것이란 걸.

안돼, 그것만은 막아야 해!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발을 동동 구르며 다급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내겐 미호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미호, 제발…….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녀를 살려달라고.

물론, 아까 나를 통해 시호를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마음이 복잡했던 건 사실이었다. 상처를 받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다.

그렇게라도, 미호는…….

또한,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날 위하고 걱정한 것만은 진심일 테니까.

나는 그리 믿었다.

그러니, 제발 그녀를 살려줘.

그때였다. 갑자기 내 몸 주위로 짙은 푸른빛이 새어 나오더니, 그 빛이 미호에게로 향했다.

이건…… 물?

물이 미호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고, 온몸으로 퍼지던 독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건 내 힘이 아니다.

이 힘의 기운은…….

“하원…….”

그래. 이건, 하원의 힘이자 물의 권능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째서 하원의 힘을 쓸 수 있는 거지?

불현듯, 하원이 어제 내게 딱밤을 때렸던 일이 생각났다.

설마, 그때…….

그때, 하원이 내게 뭔가 술수를 쓴 건가?

그때가 아니고서야 짚이는 데가 전혀 없었다. 아마도, 그때 하원이 날 걱정하며 자신의 힘을 임시로 빌려준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해서든 미호를 살리는 거니까.

“세상에, 미호 님이!”

내게서 나온 빛 탓인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신수들은 미호가 쓰러졌단 걸 알게 되었다. 신수들이 다급하게 나와 미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백령 또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굉장히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흑기들이 노린 게 이거였군.”

그는 차분하게 미호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그는 자타에게 눈길을 보낸 후 명령했다.

“영아를 불러와라. 일단 미호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제가 하겠습니다.”

마루가 재빠르게 미호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자타는 영아를 찾기 위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미호를 옮긴 곳은 처음 보는 방이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은, 하인들이 급히 정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 안에는 나와 백령, 자하, 여노 등 동쪽 땅의 신수들만이 미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예외로는 은월과 이랑, 그리고 다른 땅의 주인들이 있었다.

“어째서 미호가 흑기 따위한테…….”

천강이 미호의 모습을 보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흑기가 아니야.”

그에 대답을 한 건 은월이었다. 은월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흑기가 아니라면 누가…….”

“그건 영아가 오면 알겠지.”

은월의 말에 모두가 침묵한 채로 영아를 기다렸다.

자타가 영아를 데려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영아 또한 내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궁에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미호 님!”

영아는 미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달려온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그녀는 상상도 못 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상급 뱀의 독이에요.”

영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사화에게로 향했다. 사화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저는 그때 당시 흑기들과 싸우느라 바빴어요. 보셨잖습니까, 바랑, 이랑!”

사화가 자신을 변호해달라는 듯, 늑대 두 마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에 이랑과 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화의 말이 맞아. 그 당시 사화는 미호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어.”

바랑의 말에 사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랑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 이 독이 사화 님의 것이라 말한 적이 없어요. 이건 사화 님의 독과는 다른 종류이기도 하고요. 분명, 이 독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영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이 이상으로 퍼지는 건 물의 권능…… 덕분에 막은 것 같은데.”

영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원 님이 다녀가셨었나요?”

그때, 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내가 그 늙은 여우를 살릴 리가 없잖아.”

하원이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헝클이며 걸어왔다.

“내 힘이 써졌길래 아리한테 무슨 위협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왔더니, 왜 늙은 여우가 누워 있냐?”

“……그렇다는 말은 아리 님이 미호 님에게 힘을 썼다는 말이군요.”

영아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날 바라보았다. 내게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응,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리 님 덕분에 최악은 면했군요.”

영아가 다시 미호에게 집중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미호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요. 하원 님의 물의 힘으로는 독을 중화시키는 게 한계니깐요.”

“그렇다는 건…….”

“독을 완전히 정화해야, 미호 님이 깨어나실 수 있습니다.”

독을 완전히 정화해야 한다고?

독을 정화하는 약을, 영아가 만들 수는 없는 건가?

다른 신수들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영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영아가 약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바랑의 물음에 영아가 면목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약을 만드는 건 제겐 쉬운 일이죠. 하지만 저는 미호 님의 독을 정화할 수 있는 약을 만들 수 없어요.”

그녀가 약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방안의 신수들이 술렁였다. 서화원은 신국 최고의 약방이다. 그런 그곳에서 미호의 약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가망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백령의 물음에 영아가 나와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 약의 재료를, 저로서는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백령 님.”

영아가 방안을 둘러보며 모든 신수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영아의 시선에 신수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한, 이곳에 계신 분들 중 그 누구도 그 약의 재료를 구하지 못할 겁니다. 단, 한 분만 제외하면요.”

영아의 말에 방안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신수들은 도무지 영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신국에서 가장 강한 신수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약의 재료를 단 한 명 빼곤 구할 수 없다니.

“그 약의 재료가 뭐, 뭐길래 그러는 거죠?”

“천도.”

사화의 물음에 대답한 건 은월이었다. 은월이 대답과 동시에 영아를 바라보았다.

“맞지?”

은월의 물음에 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무릉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열매죠.”

무릉도? 무릉도라면…….

몇몇 신수가 태어났다는 곳. 미호를 비롯한 백령과 은월 등, 신수들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원에게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도 그냥 무릉도에 들어간다고 누구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무릉도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모두가 영아의 말에 집중하는 듯했다. 영아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어갔다.

“천도는 무릉도 깊숙한 곳, 구슬을 지닌 신수만 들어갈 수 있다는 숲. 그곳에 딱 한 그루 있는 ‘천도의 나무’에서만 구할 수 있으니까요.”

영아가 말을 마치자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영아의 말은 즉, 그 재료를 구해올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라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아리 님만이 천도를 구해오실 수 있습니다.”

영아의 차분하고 단아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방안에서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가 천도를 구해와야만…… 미호를 살릴 수 있다.

“무릉도는 아름다운 곳이면서도 위험한 곳이기도 하죠.”

사화의 고혹적인 황금빛 눈동자가 내게 머물렀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릉도로 가는 길도 무척 험난하지만, 무릉도에 계신 ‘그분’께서 아리 님을 곱게 보내주실까요?”

그분……?

사화가 말하는 그분이, 대체 누구인 거지?

그녀가 우아한 자태로 백령과 나의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우리 앞에 당도한 사화는 입꼬리를 올리며 한쪽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쳤다. 이내 백령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 님을 귀하디귀하게 여기시는 백령 님께서, 미호 님을 위해 아리 님을 보내실까요, 과연?”

그녀의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백령 탓에 미호가 죽을 수도 있다.’로 들릴 수도 있었으니까.

“사화, 미안하지만 틀렸어.”

그녀를 지적한 건 은월이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사화를 향했다. 그에 사화가 몹시 당황했다.

“은월 님이 어째서 나서시는…….”

은월은 사화의 말을 가볍게 끊어냈다.

“아리가 간다고 하면 백령은 말리지 못할 테니까.”

은월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반대로, 아리가 가기 싫다 하면 아리의 의견을 따르겠지.”

그가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하지만 아리가 가기 싫다고 한대도 무리가 아니지. 아리는 무릉도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오늘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어. 누군가가 방해한 덕분에.”

은월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무릉도에서 태어난 우리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무릉도 깊숙한 곳을, 왜 아리가 목숨을 걸고 강제적으로 가야 하지?”

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리가 구슬을 가지고 있어서?”

사화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은월의 말에 사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월은 그런 사화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법관으로서 정정하지. 아리가 어떤 선택을 하건, 미호에 대한 책임은 없어, 사화.”

사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은월의 간섭을 예상 못 한 듯했다.

“은월 님, 저는 그저……!”

“그저?”

은월이 여유로운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였다는 듯이.

사화는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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