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성인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여노에게 같은 설명을 매일 같이 들었다.
오늘은 다행히 성인식 전날이라, 여노가 바쁜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힘들어…….
나른해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을 때, 문 앞에서 자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 님, 란에게서 온 서한이 있습니다만.”
“들어와.”
이내 그가 내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자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소매에서 서한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요즘 시녀들이 바빠서 제가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전해줘서 고마워.”
그가 내민 서한을 받아들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전달 내용은 없었고?”
“네, 그게 다였습니다.”
시선을 서한으로 옮겨 내용을 살펴보았다.
란의 시시콜콜한 안부 인사를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는 내 성인식에 관한 축하하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계속 읽어 내려가다 이내 나래에 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서한의 내용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였다면 나래가 어떤 사고와 폭언을 하고, 신경질을 냈는지에 대한 보고였는데…….
요즘 나래가…… 변했다고?
서한에 의하면, 천강의 즉위식 이후, 나래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한다.
가끔 내 이름을 내뱉으며 성질을 내서 노군에게 혼도 자주 나지만, 예전보다 노군의 수업에 성심성의껏 임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저번에 그녀와 만나서 나눈 대화의 영향인가.
하지만 아직 방심하긴 이르니, 그녀를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겠지.
나는 서한을 곱게 접어 목함에 넣었다.
종이와 붓을 꺼내 답장을 적어 자타에게 건네주었다.
자타가 답장을 받들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혹시 남쪽 땅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까?”
자타가 내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여나 주제넘은 질문일까, 그는 노심초사하는 듯했다.
남쪽 땅의 소식이 궁금한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자타는 남쪽 땅의 신수이니, 아직 미련이 남아 있을 법도 하다.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닐 수도 있지.”
“네?”
그가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에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나래에 관한 이야기야.”
“……나래 님이요?”
그의 눈동자에서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나래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비치는 감정.
자타는 나래를 혐오하고 경멸만 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의 눈엔 측은함도 함께 비쳤으니까.
“자타, 만약 내가 널 풀어주면 어떻게 할 거야?”
“네?”
“널 풀어주면 어떻게 할 거냐고, 이 파렴치한아.”
오랜만에 그를 파렴치한이라 불렀다. 그러자 그는 매우 당황했다.
“저, 저는, …그런 상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은 죄는 이보다 더한 벌을 받아 마땅하니까요.”
그가 말하는 더한 벌이 사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해보라는 거잖아, 상상.”
“아.”
그가 탄식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가 생각을 마칠 동안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그를 기다렸다.
이내 그는 생각을 마친 건지, 고개를 들었다.
“시간 더 필요해?”
“아닙니다.”
그의 대답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반란군 수장이었습니다.”
“알아, 파렴치한.”
“……그땐 남쪽 땅이 정말 잘 되길 빌었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없이 할 용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들어보고 그를 다시 남쪽 땅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결코 가볍지도, 씻을 수도 없는 죄를 지은 그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으니까.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은 자타 탓에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이곳에 남을 겁니다.”
“……응?”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마음속 주군은 아리 님이 되신지 오래입니다.”
나, 나? 내가 주군이라고?
아니, 난 누구에게도 주군인 적이 없는데?
“난 네 주군이 된 적이…….”
“그러니까 제 마음속 주군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난 주군 아니라고!
난 그 누구의 주군도 할 생각이 없다. 이건 완고하다.
네 주군은 나래였……. 반란군의 수장이 자타였지, 참.
“자타, 지금은 나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래 님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측은함이 또 한 번 일었다. 나래를 떠올리는 듯했다.
“만약 아무 문제 없이 성장하셨다면, 나래 님도 아리 님처럼 남쪽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인식을 치르셨을 테니까요.”
‘그러지 못했지만.’
자타는 쓴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삼켰다.
“언젠간, 나래도 성장하는 날이 올 거야.”
“예? 이미 그녀는 성인…….”
“아냐, 아직 닭이더라.”
“…네?”
“하지만 곧 봉황이 될지도.”
자타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날 보며 눈을 끔뻑였지만 난 굳이 자타에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 나가봐도 돼.”
그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짧은 인사와 함께 내 방을 나갔다.
***
“아리야, 오늘은 누구 만나러 갈 거야, 형님? 아니면 싸부?”
포포가 심심한지 내 방으로 와 정신 사납게 폴짝 뛰어다녔다. 나는 그의 탐스러운 꼬리를 낚아채고 싶었지만, 성인식 전날이니 특별히 참기로 했다.
막상 성인식이 다가오니 긴장되었다.
내가…… 신국에서 성인식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가슴이 요동쳤다. 때로는 숨이 갑갑해지기도 했다. 최대한 휴식을 하며 나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아리야, 놀러 가자아.”
그런데 이 원수 같은 여우 놈이 자꾸만 놀자며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었다.
“포포, 다른 하인들이랑 놀며 안돼?”
“하지만 다들 바쁜걸?”
그건 그랬다. 내일이 당장 나의 성인식이니, 지금 하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나도 바빠.”
“거짓말.”
포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성인식, 그거 별것 아니잖아!”
“네가 해봤어?”
“아니.”
남의 일이라고 막말하네, 저 여우가.
……그 정도로 따분한가?
“많이 심심해?”
“응!”
포포가 복슬복슬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포포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 갈 건데?”
“음……. 우리, 전에 갔던 그 숲 갈까?”
전에 우리가 언제 숲을 갔…… 아.
하원의 강에 놀러 다닐 때를 말한 거구나. 지금은 하원이 궁으로 오지만, 예전엔 우리가 찾아가야 겨우 만나줬었지.
“좋아, 가자.”
포포와 나는 바쁜 하인들을 지나쳐 궁을 벗어났다. 얼마 가지 않아, 지난번과 같은 숲이 나타났다.
포포가 풀밭에 엎어지듯 누웠다.
“푸하, 난 여기가 너무 좋아, 헤헤.”
그의 꼬리는 물론, 귀까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았다.
…좋단다.
그와 산책 나온 김에 저번에 말한 것들에 관해 다시 알아보기로 했다.
“요즘은 아프지 않아?”
“약도 있고, 너랑 그렇게 오래 떨어진 적도 없으니까.”
그 말은 즉, 아직 나와 떨어지면 아프다는 건가.
전엔 생각 못 했는데, 혹시 나와 포포는 뭔가가 연결돼있는 거 아닐까?
아냐, 상호 간의 연결이 있다면 포포만 아플 리가 없잖아.
그때 문득, 계속해서 꿨던 꿈들이 생각났다.
설마…… 얘가 그 꿈속의 남자인가?
나는 나보다 한참 작은, 작다 못해 앙증맞은 포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물빛 꼬리는 여전히 살랑거렸다.
“왜, 왜?”
그의 여우 귀가 바짝 솟았다. 그의 피처럼 붉은 눈이 끔뻑거렸다. 이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꿈은 꿈일 뿐이야, 아리야.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
익숙한 목소리에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하원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포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사생활을 침범당했다는 표정이랄까.
항상 그랬듯, 난 하원의 저런 표정이 전혀 무섭지 않다. 그렇기에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놀러 왔어!”
“누, 누구 맘대로.”
왜? 여기 네 땅 아니야. 백령 땅이야.
그리고 난 작은 주인인걸? 내일이면 미호의 축복도 받을 테고. 그렇게 되면…… 이곳의 진정한 작은 주인이 되겠지.
“성인식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냐?”
그가 툭 던지듯 넌지시 물었다.
“나보단 하인들이 고생이지. 여노도 바쁘고…….”
“너는?”
그의 아름다운 남색 눈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아직 실감이 안 나.”
마음 또한 바위처럼 무거웠다. 백령의 말을 들은 이후로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홀가분하게 성인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
“……성인식이라. 감이 안 좋단 말이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읊조렸다.
“물의 흐름이 이상하단 말이야. 뭔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여태껏 그를 관찰한 날들을 떠올리면, 그의 직감은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다.
“많이 안 좋아?”
“큰 행사를 앞두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응…….”
딱.
“아야.”
그가 갑자기 내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가만히 있다 봉변당한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프잖아, 하원!”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
그걸 지금 내 이마를 때린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너 괘씸죄 두 배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하원을 저주하는데, 그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자, 소원을 들어주는, 아니, 뭐랬더라. 암튼 그거.”
그가 내게 내민 건 네 잎으로 이루어진 토끼풀과 푸른 꽃으로만 엮은 화환이었다.
……이걸 가만히 만들고 있었을 하원을 생각하니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하원, 네가 만든 거야?”
“……내놔, 다시.”
그는 말만 그렇게 할 뿐, 속으로는 쑥스러워하는 듯했다.
“고마워.”
그의 선물에 나는 복잡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