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백령의 궁은 성인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 또한 여노에게 붙잡혀 성인식에 관한 내용을 들어야만 했다.
“아리 님께선 예전에 이랑 님의 성인식을 본 적이 있으시죠?”
“응, 그랬었지.”
“아마 이랑 님의 성인식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될 거예요.”
이랑의 성인식을 떠올렸다. 수많은 백성 앞에서 미호에게 맹세를 하던 모습을. 또한, 미호가 그에게 빛을 하사하던 모습을.
“미호 님이 하사하시는 빛은 일종의 축복이에요. 한 마디로 진정한 차기 주인으로서 인정을 받는 거죠.”
축복이라…….
미호의 축복. 절대자의 축복.
천강과 이랑의 즉위식과 성인식에서 보았던 그것.
“그리고 백령 님께서 아리 님에게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라는 마패를 하사할 거예요.”
마패……?
그러고 보니 바랑이 이랑에게 무언가를 하사했던 것 같기도 하고…….
“동쪽 땅의 마패는 영롱한 푸른색이랍니다. 참고로 서쪽 땅은 노란색, 북쪽 땅은 검은색, 남쪽 땅은 붉은색이랍니다.”
그럼 이랑이 가지고 있는 마패는…… 노란색이겠구나.
“마패는 절대로 잃어버리시면 안 되는 귀중한 물건이에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답니다.”
여노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내게 당부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여노의 자질구레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크게 신경 쓸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대부분 일정에 관한 내용이었으니까.
여노에게서 풀려난 건, 은월의 수업 시간이 다가올 때였다.
“아, 나 이제 가봐야 해.”
“이 정도면 완벽해요. 궁금한 게 있다면 저나 자하 님께 언제든 물어 봐주세요, 아리 님.”
나는 여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정자로 향했다. 귀신같이 은월의 수업 시간만 되면 따라오는 포포와 함께.
수업 내용은 평소와 같았다. 나는 구슬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은월은 옆에서 지켜보며 지도해주었다.
수업이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은월의 말에 놀란 토끼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수업이 마지막이야.”
“뭐?”
깜짝 놀란 나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제 나한테 더 배울 것도 없잖아. 이제 정식으로 작은 주인이 되면 하원에게 배워야지.”
……전혀 몰랐다. 나는 그것도 은월에게 배우는 줄 알았다.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던 건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포포의 꼬리가 바짝 세워졌다.
“싸부 이제 안 와?”
“수업 때문에 오는 일은 없겠지.”
은월의 대답에 포포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사법관이고, 그의 위치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쉬울까.
절로 고개가 푹 숙어졌다. 내 여우 귀 또한 고개를 따라 힘없이 처졌다.
“아리야.”
“……응.”
은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 봐.”
그의 말에 나는 애써 고개를 들어 그의 신비로운 회색 눈동자와 마주 보았다.
“우리 이별하는 거 아니야.”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크고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졌다.
“난 널 만나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내 일을 마칠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은월의 말이 왜인지 향과보다 더 달콤하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흘러가는 구름보다 더 부드러웠다.
“무리……해서?”
“응.”
“왜?”
“보고 싶으니까?”
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더운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내 머리 위에 올려진 은월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아리야?”
은월이 걱정스러운 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저, 저…… 나쁜 호랑이 같으니라고.
“……은월, 너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가?”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 없는 포포는 붉어진 내 얼굴을 기어코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리야, 너 얼굴 왜 빨…… 읍읍.”
포포의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포포가 발버둥 쳤지만,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내가 진짜 이 여우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아!
“나, 갈 거야!”
나는 그렇게 외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를 빠져나왔다.
은월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요즘 은월이랑 있으면 왜 이럴까?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금방 기분이 들쭉날쭉해지고, 더워질 때도 있고, 하여튼 이상하다.
“아리야아.”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걷던 도중, 이랑이 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랑?”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응?”
아, 나도 모르게 이랑이 묵고 있는 별채 근처까지 왔구나.
그가 해맑게 웃었다. 황금빛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성인식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거야?”
“아, 아니…….”
“뭐든 물어봐, 내가 뭐든 알려줄게.”
이랑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날 끌고 간 곳은 별채 앞 계단이었다. 나는 원치 않게 그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참에 마패에 대해서 좀 물어볼까?
“이랑, 너 마패 받았어?”
“응, 받았지. 삼촌한테.”
이랑이 소매를 주섬주섬 살피더니, 노란빛의 둥근 패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마패에는 늑대처럼 보이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마패구나.”
“응, 맞아. 그러고 보니 아리 너도 곧 받겠구나. 와, 나 동쪽 땅의 마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누가 보여준대?
물론, 그가 보여달라 청하면 거절하진 않겠지만, 이랑의 설레발은 너무 뻔뻔했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해맑은 이랑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웃는 낯에 어찌 침을 뱉으리.
“너무 기대돼!”
“으, 응…….”
“아리의 성인식도 물론 기대돼.”
그렇구나…….
이랑이 갑자기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아리야, 나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나는 이랑이 잡은 손을 가리켰다.
“일단 이 손부터 놓고 말해, 이랑.”
“…알았어.”
그가 빠르게 나의 손을 놓았다. 나는 이제 말해보라는 듯이 그의 황금빛 눈을 바라보았다.
“있잖아, 성인식 날…… 저녁에 나와 함께 있지 않을래?”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긴장한 것인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렸다.
성인식 날 저녁이라. 딱히 일정이 없긴 한데.
내가 굳이 이랑을 또 만나야 할까……?
결론은 재빠르게 도출되었다.
굳이 이랑을 만날 이유가 없다.
거절하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뗀 그 순간.
“부탁이야, 아리야.”
그가 애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에 나는 다시 한번 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탁하는데, 잠깐 만나는 것 정도야.
“알았어.”
“진짜?”
이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의 표정을 보고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똥개 맞아, 얘네 집안은.
풍성한 그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랑은 이미 다 큰 남정네였지만,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답례로 이거 줄게!”
이랑이 내게 자신의 마패를 내밀었다.
“이걸 왜 줘?”
“응? 필요 없어?”
아니, 필요하고 말고를 떠나서, 나한테 주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거!
이랑의 어이없는 행동에 눈을 질끈 감았다.
“농담인데.”
“뭐?”
내가 그를 노려보자, 그는 내 반응이 즐겁다는 듯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웃지 마.”
나의 만류에도 이랑은 한참을 웃었다. 그의 웃음기가 거의 잦아들었을 때 즈음,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차분하게 날 응시했다.
“고마워.”
“응?”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리지?
고개를 기울여 의문을 표하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요즘 복잡했었거든.”
“왜?”
“그냥,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그는 자세한 설명을 내게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구태여 그가 말하기 싫은 것을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너도 나랑 만나기 전엔 꽤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걷던데.”
어, 그러고 보니 아까 하던 고민이 사라졌네.
상기됐었던 뺨도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 벌써 헤어져야 하네.”
이랑이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응? 왜?
나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여기 있었군.”
백령이었다. 그의 등장에 이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에 봐, 아리야.”
이랑의 인사에 백령의 미간이 잠시간 찌푸려졌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이랑이 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령과 함께 걸었다. 나와 그가 큰 연못을 잇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꽂혔다.
“성인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지?”
“여노 덕분에 내가 해야 할 건 다 숙지했어. 걱정하지 마, 백령.”
“……네 성인식을 이리 서둘러 미안하군.”
그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내려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감상하며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인식이 끝나면, 아리 넌 이곳의 신수가 된다.”
“응…….”
그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도 신국의 신수로서 살아가겠지.”
“신국의…… 신수로서.”
신국의 신수. 인간으로 태어난 내가 권능을 부여받고, 정말로 신수가 된다.
그렇다는 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백령이 날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다는 것.
나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생을 보낸다는 것.
그가 연못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은가, 정말로.”
날 바라보는 백령의 푸른 눈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어째서 백령이 저렇게 날 바라보는 걸까. 왜 확신을 하지 못하는 걸까.
“백령…….”
하지만 난 내 의문을 그에게 물을 수 없었다. 그의 푸른 눈이, 굉장히 슬프게 날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왜인지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슬픔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백령, 넌 대체 무얼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나는 끝내 내뱉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는 내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백령,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난 네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정말, 마지막 선택인 거구나.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나와 그 사이를 맴돌았다. 나와 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을 이어갔다.
“그것이, 내 바람이다.”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무덤덤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읊조렸지만, 어째서인지 내게는 구슬프게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