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나와 은월이 천강의 궁에 도착했을 때, 궁 안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하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어디론가 달려갔고, 많은 신수가 우르르 몰려왔다.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왜 그러지?
“아리 님, 대체 어디 가셨던 거예요!”
여노가 상기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었다.
나, 나…….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라졌었구나.
“미, 미안해, 여노.”
그 당시 상황이 급하긴 했지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내 잘못이었다.
내가 사라져서 고생했을 여노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백령 님도 아리 님을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으, 응? 백령이?
나는 고개를 돌려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무심해 보이는 그였지만, 그가 날 걱정했단 건 알 수 있었다.
“아리, 어디 갔었는가.”
천강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 그게…….”
나는 대답하기 곤란했다. 궁에서 나래를 발견해서 무작정 쫓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랑 향안에 갔었어.”
그때, 은월이 나섰다.
“향안?”
백령이 미간을 좁히고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그런 백령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응. 즉위식이 끝난 후에 어쩌다 보니 같이 가게 됐어.”
백령의 푸른 눈과 은월의 회색빛 눈이 교차했다. 이내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백령이었다.
나는 천천히 백령의 옆으로 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미안해, 말 안 하고 가서.”
나의 사과에 한참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남쪽 땅은 아직 위험하니, 멋대로 움직이지 말 거라.”
그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나는 안다. 저 말에는 상당한 걱정이 묻어있다는 것을.
나는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백령.”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뒤숭숭했던 상황이 정리되었다. 덕분에 무사히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의를 위해 미호와 네 땅의 신수들은 자리를 옮겼다. 궁 외곽에 있는 아름다운 별채 안에 회의장처럼 보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당연히 인간인 이연은 별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전보다 회의에 참석하는 신수가 많은 만큼, 커다란 동그란 탁자에 모두가 빙 둘러앉았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 알고 있겠지?”
미호가 모두를 번갈아 보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미호의 옆에는 오랜만에 보는 마루가 서 있었다.
“곧 다가올 신국제. 그리고 곧 성체가 될 아리의 성인식에 관한 걸 정하기 위해서야.”
그녀의 친절한 설명에 신수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반응들을 보였다.
“호오, 벌써 신국제라니, 시간 참 빠르네.”
바랑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미호를 지나 내게로 향했다.
뭘 봐, 똥개.
“근데, 아리의 성인식과 신국제 중, 뭐가 먼저인 건데?”
바랑이 정확한 논지를 짚으며 물었다. 그에 마루가 갖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신국제는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본래, 신국제 뒤에 아리 님의 성인식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만, 그러면 아리 님의 성인식이 너무 늦어져요.”
마루는 차분하고도 침착하게 문제점을 나열했다. 그에 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리의 성인식이 늦춰질수록, 우리는 좋지 않아.”
“흑기 때문에?”
또 한 번 요지를 정확히 짚은 이 또한 바랑이었다. 그에 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 잠잠하긴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신국제보다 우선으로 아리 님의 성인식을 하기에는, 일정이 빠듯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사화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나 또한 사화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비천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사화의 말을 거들며, 두 신수가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에 즐겁단 듯이 구경만 하던 바랑이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머물러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바랑의 한마디에 모두가 그에게 주목했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리의 성인식을 최대한 앞당기는 거지. 그러면 큰 문제 없지 않을까?”
바랑의 제의에 모두가 일순간 침묵했다.
내 성인식을 이것보다 더 앞당긴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건 너무 이르지 않나요? 동쪽 땅에서 준비하는데 무슨 하루 이틀 걸리는 것도 아닐 텐데.”
역시나 이번에도 사화가 반박에 나섰다. 그녀가 절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랑이 내게서 백령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때, 백령? 못할 것 같아?”
바랑의 목소리에 약간의 도발이 느껴졌다.
마치 ‘천하의 백령이 통치하는 동쪽 땅이 이것도 못 해?’라는 소리로 들렸으니까.
백령은 대답을 미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그는 가능 여부가 아닌 어느 쪽이 내게 더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준비는 가능하다. 하지만 아리의 의견도 듣고 싶군.”
백령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백령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잠시간 생각했다.
성인식을 앞당긴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내가 성인식을 치른다는 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결정해야만 한다.
나는 백령의 눈을 그대로 바라본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앞당겨도 상관없어.”
나의 대답에 모두가 안도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단, 사화만 빼고.
“동쪽 땅은 정말…… 가끔 무리한 일을 하는군요.”
사화는 우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 님의 단 한 번뿐인 성인식을 이렇게 빠르게 준비하다니…….”
사화의 중얼거림에 바랑이 그녀를 비웃듯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여태 본 어떤 성인식보다 주목받을 거야, 사화.”
이내 그는 ‘천하의 백령이잖아?’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에 사화가 아련한 눈으로 백령을 바라보았지만, 백령은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자.”
미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오늘 회의는 끝인가?”
바랑이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물었다. 그에 미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인간에 관해서 모두 의견을 내줬으면 해.”
미호가 굳은 얼굴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인간을 사화의 궁에 계속 두는 게 맞을지 난 잘 모르겠어. 마음 같아선 돌려보내고 싶지만…… 지금은 불가능하고.”
미호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난 사화의 궁에 두는 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군요.”
비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바로 천강이 그의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
무심한 그의 한마디에 사화가 미소 지었다.
백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월 또한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난 사화의 궁에 두는 거 반대야.”
바랑이 툭, 내뱉은 말이었다. 그에 사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죠, 바랑 님?”
그녀가 고운 목소리로 바랑에게 물었다. 그러자, 바랑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반대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찬성하는데도 이유가 없듯.”
그에 사화는 바랑과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백령, 은월, 너희는?”
미호가 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똑같은 대답을 내놨다.
“상관없다.”
“상관없어.”
두 사람의 의견이 의외라는 듯 회의장이 술렁였다. 미호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백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녀가 묻자, 백령은 짧게 대답했다.
“상관없으니까.”
정말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에 미호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게 당연했다.
이번에 그녀는 은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하 동문.”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바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이랑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바랑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거지?”
“삼촌, 왜 이래, 오늘? 예전엔 돌아가기 싫어서 난리였잖아.”
이랑은 바랑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았다.
“이랑아, 요즘 삼촌이 워낙 바빠서 말이다.”
“삼촌이 바쁠 게 뭐 있어?”
맞는 말이지.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랑이 물었다. 그에 바랑이 이가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었다.
“일한다.”
“거짓말.”
이랑뿐 아니라, 모든 이가 바랑이 일한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똥개가 일이라니, 말도 안 돼.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보는 거야, 대체. 어쨌든 난 간다.”
그가 손을 흔들며 회의장에서 빠져나갔다.
“신수가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바랑 님, 괜찮을까요?”
여노가 진심으로 바랑을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그에 은월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진짜 정신을 차린 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회의는 이렇게 마무리된 듯했다. 모두가 자리를 떠나고 회의장에는 미호와 백령, 그리고 천강만이 남아 있었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적막감이 일었다. 적막을 깬 건, 미호였다.
“백령, 너는 인간이 신경 쓰이지 않아? 나는…….”
미호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미호.”
차분한 백령의 낮은 목소리가 회의장에 맴돌았다.
“인간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군.”
백령이 무심히 내뱉었다. 미호는 백령의 말에 허를 찔린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자, 아리야.”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날 불렀다. 나는 미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백령을 따랐다.
미호는 우리가 회의장을 나갈 때까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백령.”
회의장을 나오자, 천강이 백령을 불러세웠다.
“할 말이 있다.”
백령은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남쪽 땅은, 언제나 동쪽 땅의 편일 것이다.”
천강이 이내 날 바라보았다.
“저번 사건에 관한 죄책감인가.”
천강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백령이 일컫는 저번 사건은 아마 내가 흑기에게 납치됐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천강은 어느 정도 눈치챘음에도 반란군을 막지 않았다고 했다.
“필요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백령은 천강에게서 뒤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