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다.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돌아가는 길을 모르겠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나래를 쫓느라 바빠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달렸다. 당연히 천강의 궁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였고, 이곳이 어디인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저번에 방문했을 때와 달리 남쪽 땅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기에 궁을 찾아가기가 더욱 어려웠다.
나, 나 어떡해……?
돌아가서 나래한테 길이라도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나래가 아직 그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일단 가보자. 모든 길은 이어져 있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일단은 내 감을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걸으면 걸을수록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남쪽 땅이 완전히 바뀌긴 했구나.
전의 그 남쪽 땅이 아니다. 황폐하고 황량한, 그런 땅이 아니었다. 생기가 돌고, 질서가 있는 땅이었다.
지도자의 역할이 크긴 하구나.
또한, 은월이 그만큼 고생한 결과이기도 하지.
“나 근데 오늘 안에 천강의 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점점 자신이 없어지던 때에, 마침 익숙한 기운이 근처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 기운을 따라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기운을 따라 와보니,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이곳은…… 향안 시장?
익숙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기운을 쫓아,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예전에 은월이 이곳에선 얼굴을 가리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장 역시 축제 분위기였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신수들도 밝아 보였다.
전과는 확연히 달라…….
그리고 기운에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알았다.
이 기운은…… 은월이야.
어째서 은월이 이곳에 있는 거지?
“뭐야, 너는? 보아하니 남쪽 땅의 신수가 아닌 거 같은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껄렁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 한 남자 신수 무리가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알 거 없잖아, 저리 비켜.”
그들의 날개를 보아하니, 비둘기였다. 나는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녀석을 노려보았다.
비둘기 주제에 어딜 막아? 빨리 안 비켜?
“허, 보아하니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인데, 향안 시장에서 우리한테 통행료도 안 내고 나다니는 신수는 너 하나뿐이다.”
통행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아무리 은월과 천강이 일을 하면 뭐 하나, 이렇게 본성이 글러 먹은 놈들이 판을 치는데.
쯧.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이게, 감히 우리 앞에서 혀를 차? 통행료가 없으면 다른 거라도 내놓으시던가.”
그가 갑자기 내 얼굴을 잡더니 잠시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과 시선이 상당히 불쾌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
자비로운 나는 그들에게 1차로 경고를 했다.
“지금 보니까 얼굴이 상당한데? 넌 어디 신수지? 꽤 높은 나리 집 아가씨인 거 같은데.”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새대가리 신수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는 불쾌한 손길과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다리를 찼다.
“아!”
그가 고통을 호소하며 동시에 내 머리카락을 세게 쥐어 잡았다.
백령도 안 잡아본 머리카락을, 왜 네놈이 잡아?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생각보다 내 힘이 약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구슬의 힘을 쓰면 시선이 집중될 텐데……. 뿐만 아니라, 여긴 천강의 땅이다. 오늘은 천강의 즉위식이었고.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이곳에선 아니야, 아가씨.”
그가 더러운 시선으로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통행료와 내 다리를 찬 값은 알아서 받아 가지.”
그냥 죽이자. 백령도 잘했다고 칭찬할 거야.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꽂혔다.
“아리?”
……은월이었다.
은월 또한, 면사로 얼굴을 가려서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를 보고 그임을 확신했다.
“은……월.”
순식간이었다. 비둘기 신수에게 잡혀 있던 머리카락이 풀려난 것은.
“으아악! 내 손, 내 손이!”
은월이 나를 품에 가둬 시야를 차단했기에, 어떤 상황이 일어난 건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비둘기 신수의 절규로 인해 대충 짐작이 되었다.
“어디 봐, 다친 데는 없어?”
은월이 날 내려다보며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이내 다친 데가 없다는 걸 확인한 은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내 손을……!”
“뭘 그렇게 네 손을 아까워해? 어차피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했는데.”
은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토록 차가운 어조는 오랜만이었다.
“내 칼만 더러워졌네.”
은월이 칼을 허리춤에 찬 칼집에 집어넣으며 읊조렸다.
“네, 네놈 정체가 뭐냐!”
비둘기 신수가 바들바들 떨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공포로 덜덜 떨렸다.
“이런 놈도 백성 새끼라고…. 하, 남의 잔칫날에 살생할 생각은 없으니…….”
은월이 짜증이 난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에 면사가 벗겨지고 밤하늘처럼 짙은 머리칼이 드러났다.
“흐, 흑, 흑, 흑호!”
비둘기 무리는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은월은 그런 그들을 하찮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죽기 싫으면 꺼져.”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자, 비둘기 신수 무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왜 혼자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남쪽 땅은 위험하다고 말했잖아.”
나를 내려다보는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직 그에게 안겨 있어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닭 쫓다가 길 잃었어.”
“닭?”
“있어, 그런 게….”
슬그머니 은월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은월이 화제를 돌렸다.
“일단 다친 데가 없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금품이나 돈 같은 거 뺏긴 것도 없지?”
“아, 그런 건 없었어. 내가 그놈 다리를 찼는데, 나한테서 값은 알아서 받아 간다더라고.”
은월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대단히 실수한 거 같네. 너무 곱게 돌려보냈어.”
그가 그들을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굳어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 그게 고운 건 아니지 않아?
물론 그놈들은 죽어 마땅하긴 한데……. 어차피 저 손목으로는 이제 여기서 저런 저급한 짓하고 놀지 못할 테니 상관없었다.
“은월, 천강의 즉위식엔 왜 안 왔어?”
“아, 난 알아볼 게 좀 있어서.”
알아볼 거라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것 아니야. 금방 끝나기도 했고. 그래서 이걸 사려고 여길 들른 거지.”
그가 내 입안에 무언가를 쏙, 집어넣었다. 혀에 닿기도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향과.
달곰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에 내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맛있어.”
“여전히 좋아하는구나.”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 특유의 미소가 너무나도 좋았다.
그와 나는 남은 향과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기 위해 향안 시장 구석에 있는 정자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래랑은 어떤 얘기를 했는데?”
은월이 턱을 괴곤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나와 나래 사이에 오갔던 대화가 상당히 궁금한 것 같았다.
“왜?”
“나래가 그렇게 되고 난 후, 한 번도 모습을 비춘 적이 없단 말이지. 그전의 그녀라면 날 무척 찾았을 텐데.”
그 말은 즉, 나래가 보고 싶단 거야?
왠지 모르게 은월의 말에 짜증이 일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홱, 돌려버렸다.
“별 얘기 안 했어.”
“조금 걱정되네.”
확실히 나래는 조금 위태롭고, 많이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은월과 천강 앞에선 한없이 위축될 테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 테고.
그리고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난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아까 이상한 비둘기 녀석 때문인가.
나는 애써 불쾌한 기분을 떨치고, 은월과 다시 눈을 마주했다.
“나래는 확실히 위태로워 보였어. 이번에 천강의 궁에서 몰래…….”
“관심 없어, 걘.”
“응?”
이랬다가 저랬다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직 나래랑 그리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해, 아리야.”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속삭였다.
이쯤 되니 날 걱정하는 건지, 나래를 걱정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은월, 어…….”
“응?”
아, 아니야. 이걸 물어보는 게 더 이상해.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이후 정자에는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정적조차 기분이 좋았다.
그가 산 향과를 먹으며 그를 관찰했다. 밤하늘처럼 짙은 검은 머리칼부터,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 완벽한 체구까지.
그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나와 은월 사이를 맴돌았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이윽고 은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중앙회의가 시작할 것 같은데. 이제 갈까?”
나는 그의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백령, 바쁜 시간 내주어 다시 한번 고맙군.”
의식을 마친 천강은 백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것이 본론을 꺼내기 전, 사족임을 백령은 눈치챘다.
“본론부터 말하지.”
그것을 아주 잘 아는 천강은, 이후 바로 본론을 꺼냈다.
“부탁할 게 있다, 백령.”
천강이 근엄하고도 진지하게 말했다. 그에 백령은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이 자리가 내가 있을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임시 직책일 뿐, 금방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백령은 처음에는 왜 제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백령은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거절하지.”
백령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에 천강이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리에게 남쪽 땅의 주인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
백령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는 한기가 서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백령이 매섭게 천강에게 경고했다.
“남쪽 땅에는 인재가 없다.”
“그걸 왜 아리와 내가 알아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맞는 말이었다. 남쪽 땅의 사정이 어떻든, 백령은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완고한 그에 천강은 두손 두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백령 님, 큰일 났어요!”
여노가 백령을 향해 소리치며 빠른 속도로 그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아리 님이 사라지셨어요!”
“……뭐?”
백령이 재빠르게 궁 안을 두리번거렸다.
……없다. 아리가.
“죄송해요, 제가 분명 계속 옆에 있었는데, 언제 사라지셨는지…….”
여노가 울상을 지으며 착잡해 했다. 그에 백령이 곧바로 궁을 나서려 하자, 천강이 막아섰다.
“곧 중앙회의가 열린다, 백령.”
“비켜라.”
백령의 날 선 목소리에 천강이 움츠러들 뻔했다. 그러나, 천강은 그를 말려야만 했다.
“오히려 엇갈릴 수 있다. 알지 않는가, 남쪽 땅에 대해서. 그러니 내 하인들을 시켜 찾도록 하지.”
“중앙회의 때까지 안 오면, 그땐 내가 움직일 것이다.”
백령이 차가운 표정으로 천강을 보자, 그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하도록 하지.”
천강은 곧바로 하인들에게 아리를 찾으라 명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령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궁 밖을 바라보았다.
‘아리야,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