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오랜만에 오네요.”
이제는 나래의 궁이 아닌, 천강의 궁 앞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많이 변했네요, 이곳도.”
“그러게.”
화려했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려하고 강렬했던 붉은색들은 어느새 무난하고 따뜻한 갈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궁은 나래가 주인이었을 때보다 웅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린 천천히 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직 취임식이 시작하기 전이라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고요했다.
궁 안으로 들어서자, 궁의 주인이 된 천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이렇게 찾아와주어 고맙군.”
“다시 남쪽 땅의 주인이 된 걸 축하한다, 천강.”
천강과 백령의 짧은 인사말들이 오간 후, 즉위식이 열리는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반란이 일어났던, 그곳이기도 했다.
궁의 내부 또한 전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즉위식이니만큼, 하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궁을 둘러보며 어딘가에 있을 은월을 찾고 있었다.
분명 먼저 출발했다고 했는데……. 어디 있는 거지?
이상하게 은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찾는 신수라도 있는가, 아리.”
계속해서 두리번거리자, 천강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아니야. 즉위식은 언제 시작해, 천강?”
“이제 사화만 도착하면 시작할 수 있겠군.”
천강이 도착한 신수들을 둘러보곤 대답했다.
사화가 늦는다고……?
그녀의 지각 소식에 굉장히 의아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런 행사에 늦게 참석한 적이 없었다.
“사화가 별일이군.”
백령마저 그녀의 지각이 의아한듯했다.
그리고, 사화의 지각 사유는 얼마 후 그녀가 궁에 들어서자, 모두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북쪽 땅의 주인, 사화가 천강 님의 즉위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녀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천강에게 축언을 전했지만, 모두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자, ‘이연’에게 꽂혀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화는, 해맑게 웃으며 그를 데려온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도 천강 님의 즉위식을 축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데려왔습니다.”
사화의 설명에 표정을 푸는 신수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미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그리고, 인간을 혼자 두고 외출하기에는 맘이 편치 않아서요.”
‘이해해주세요, 미호 님.’
그녀가 아양을 떨며 미호의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확실히 그녀가 내세운 명분은 그럴듯했다. 외부인. 그것도 신국에서 평판이 안 좋은 ‘인간’을 궁에 혼자 두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은 게 사실이니.
겨우 미호의 화가 풀렸다. 아니, 풀렸다기보다는 애써 사화를 이해하고 눌러 담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그런데, 미호의 화가 가라앉자 의외의 인물이 사화의 이런 행동을 혐오했다.
“……지금, 인간 따위를 신수의 고귀한 행사에 데려온 겁니까, 사화?”
비천의 검은 눈이 혐오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그런 시선은 인간인 이연을 지나쳐, 사화에게로 향했다.
사화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천 님, 이건 제 관할이니, 더 이상의 참견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뭐야, 저 뱀 두 마리 친한 거 아니었어?
비천은 인간을 데려온 사화에게 강한 적대감을 넘어서, 혐오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연은 둘 사이에 끼어서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런 그가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졌다.
“둘 다 그만하지. 이곳은 내 즉위식이고, 백성들은 그 즉위식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다.”
그 둘을 만류한 건 천강이었다. 그는 남쪽 땅의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사담은 즉위식을 마친 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미호와 천강이 즉위식을 위해 함께 계단을 올랐다. 그가 계단에 오르자, 궁 밖에선 남쪽 땅 백성들의 들뜬 함성이 들려왔다.
참 묘했다. 나래, 봉황이 태어나자 남쪽 땅의 백성들은 천강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고 들었다. 그들의 힘으로 천강의 자리를 박탈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현재 천강의 재 즉위식에 기뻐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천강의 현재 속마음은…… 어떨까?
그는 기쁠까? 아니면, 슬플까…….
내가 천강이라면,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다시 주인 자리에 오르지 않을 것 같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던 도중, 미호의 목소리가 궁을 울렸다.
“남쪽 땅의 백성들은 들어라. 오늘부로 새 주인이 즉위하오니. 너희를 돌보고, 또 지도할 자. 천강에게 주인 자리를 위임하며 나의 축복을 내리겠노라.”
미호의 위엄에 일순간 함성이 잦아들었다. 선언을 마친 미호는, 이랑의 성인식 때와 마찬가지로 교지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천강에게 하사했다.
천강이 교지를 받아들자, 박수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함성이 궁에 울려 퍼졌다.
미호가 지난번과 같이 천강에게 축복의 빛을 내렸다. 이랑 때보다 더 위엄있는 빛이었다.
천강이 받은 빛을 위로 쏘아 올렸다. 이내 빛이 뿔뿔이 흩어지며 남쪽 땅 곳곳에 떨어졌다.
전보다 더 큰 함성이 들렸다.
“남쪽 땅의 주인으로서, 이 한 몸 바쳐 그 본분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천강의 맹세와 함께, 그의 즉위식은 서서히 막을 내려갔다.
즉위식은 막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연회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남쪽 땅은 축제 분위기였고, 연회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나도 천강에게 가서 축하의 말을 전해야겠…… 어?
천강에게 가려는데, 궁 어딘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기운은……?
나는 기운이 느껴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궁 구석, 그곳엔 면사로 자신의 모습을 가린 가녀린 체구의 하인이 있었다.
아니, 저건 하인이 아니야.
내가 느낀 기운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자는 하인이 아니다. 이건 하인한테서는 절대 느껴질 리 없는…….
내가 있음을 그녀가 눈치챈 듯했다. 나와 잠깐 눈이 마주친 그녀는 곧장 나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왜,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대체!”
그녀가 헐떡이며 가쁘게 소리쳤다. 역시 익숙한 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한 신수가 맞았다.
“너야말로 왜 도망가는 거야!”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쏟아부어 가까스로 그녀를 따라잡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자 그녀는 포기한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래. 왜 죄지은 똥강아지처럼 도망가는 거야?”
그녀의 얼굴을 감추고 있던 면사를 벗겼다. 그러자, 태양처럼 붉은 그녀의 머리가 풀어졌다.
여전히 아름다운 봉황의 날개와 퍽 어우러졌다.
“또, 똥강아지라니, 내가 언제…!”
“그럼 닭이야?”
그녀가 성을 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왜 천강의 즉위식을 죄인처럼 몰래 숨어서 본 거야?”
“네가 알 것 없어.”
그녀가 새침하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지나쳐 갔다.
저 싸가지는 여전하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
나의 물음에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이내 그녀는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꿍꿍이라니?”
“그런 게 아니면, 왜 몰래 숨어서 즉위식을 훔쳐본 건데?”
그녀의 입이 가늘게 떨렸다.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내게 소리쳤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일순간 동정심이 일었지만, 나는 일부러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향으로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었단 건 알아. 그로 인해서 난 반란군에게 납치당했었고.”
“그, 그건…….”
명명백백한 사실에, 나래가 할 말을 잃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가 잠시간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닌데.
아까와 같이 내게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녀는 어째서인지 주눅 들어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지나간 잘못을 따지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뭘 하려 했는지 궁금할 뿐이야.”
그러자,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쨍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봐도 될까 싶어서. 내가 보는 걸 천강이 기분 나빠할까 봐……. 그래서 몰래 훔쳐서 본 거야.”
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음보가 터진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떨렸다.
“남쪽 땅의 신수들은 날 싫어해. 그런 내가 무슨 염치로 천강의 즉위식을 봐…….”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쉬지 않고 말했다. 마치 속마음을 풀 데가 없었다는 듯이.
나는 갑자기 터진 그녀의 속사정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얘 이런 얘기 듣겠다고 따라온 게 아닌데?
이걸 계속 들어줘야 해, 말아야 해?
그냥 가버리기에는 나래가 너무 서럽게 울고 있었다.
한마디로 갈 때를 놓쳐버렸다.
……그냥 대충 위로해주는 척이나 하자.
“아까 말했듯이, 넌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고 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그래, 노군의 저택에서 수양하며 좀 더 정신을 차리길 바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천강에게 축하하는 말이나 전하러 가야겠어.
아까운 시간을 나래에게 계속해서 허비할 순 없었다. 나는 결국, 왔던 길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난 네가 싫어.”
그녀가 훌쩍이며 내뱉은 말이었다.
“나래야.”
나는 그녀에게서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얼른 닭에서 봉황으로 진화하길 바랄게.”
“뭐?”
“언젠가는 봉황이 될 수 있겠지. 지금으로선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허?”
그녀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응원할게.”
나는 그녀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선 그녀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야, 뭔 헛소리야! 너 거기 안 서? 야!”
안 그래도 울어서 목 상태 안 좋을 텐데, 쟤는 왜 자꾸 소리친담.
잔뜩 운 탓에 목이 잠긴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내 그녀가 기침하며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컥.”
거봐, 내가 뭐랬어.
나래는 아무리 생각해도 포포의 말대로 아직은 닭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