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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08)화 (108/167)

108.

“여노, 이게 다 뭐야?”

나는 아침부터 경악에 찬 목소리로 여노에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대낮부터 여노는 열심히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나의 물음에 여노가 흥분된 목소리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백령 님이 보내신 거랍니다!”

……백령이 또?

상자 안을 열어 보니 이번엔 가지각색의 장식품이었다. 보석이 잔뜩 박혀 있는 장신구들 탓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품들은 척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았다.

아니, 백령 요즘 왜 이래?

저번엔 옷을 선물하지 않나, 이번엔 장신구들까지……?

“청아 님이 이번엔 바쁘시다고 하셔서, 둘째가는 장인에게 맡긴 것들이랍니다!”

여노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여노, 고맙긴 한데……. 백령이 갑자기 왜 이런 걸 자꾸 선물해주는 걸까?”

“예? 그거야…….”

여노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 또한 마땅한 이유가 바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통 안 그러셨었는데, 최근에 선물이 잦으시긴 하네요.”

잠시 생각하던 여노는, 손뼉을 치며 탄식을 내뱉었다.

“아, 혹시 이제 아리 님이 성체가 거의 다 되셨으니, 그에 따른 선물이 아닐까요? 곧 아리 님의 성인식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걸까?”

“네! 아리 님의 성인식을 기대하고 있는 신수들이 많답니다. 동쪽 땅은 벌써 축제 분위기에요!”

성인식 대비인 건가…….

일단 백령에게 가봐야겠어.

“여노, 치장하는 걸 좀 도와주겠어?”

“네, 맡겨만 주세요!”

나는 여노에게 부탁해 그녀가 골라준 화려한 노리개와 머리 장식을 하나씩하고,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백령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그는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령.”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백령이 보고 있던 두루마리를 손에서 놓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요즘 왜 그래?”

나의 물음에 백령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묻지도, 그렇다고 무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즘이라면… 선물을 말하는 건가.”

“응.”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백령은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하다.

잠시간 고민하던 그는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청아에게 맡길 걸 그랬군.”

“아니, 그게 아니야.”

“그럼 장식품 개수가 부족한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고!

누구 방을 장신구 천지로 만들 일 있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많으니까 문제인 거야, 백령!”

나의 호통 소리에 백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에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계속 머무를 거라 하지 않았나?”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하여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응? 어, 그러고 싶은데…….”

“그럼 전혀 많은 게 아닐 텐데. 언젠가는 다 쓰일 테니.”

어…… 어?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생각해보면 신수의 수명은 굉장히 기니까…… 거의 영생이라 볼 수도 있고…….

평생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그리 많은 것 같지 않기도 하고.

……묘하게 설득당해버렸다.

“아니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건가.”

그가 답할 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역시 다음부터는 청아에게 맡겨야겠군.”

“아니라니까, 백령! 오늘 온 것도 다 예뻐, 봐!”

나는 내 머리를 장식한 장신구와 노리개를 가리켰다. 그러자, 백령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예쁘구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나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으, 응…….”

일단 장신구들은 엄청 예쁘니까.

문제는 너무 많은 양이었는데, 백령에게 설득당해버린 지금, 그것은 문제의 축에 끼지 못했다.

“고마워, 백령.”

결국, 나는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할 거 없다. 당연한 것이니. 네 마음에 들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건 전혀 당연한 게 아닌걸?

그에게 무어라 하려 했지만, 또 이상한 데로 대화가 튈 것 같아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 내일은 천강의 즉위식이지? 언제 출발해?”

“아마 해가 뜨면 남쪽 땅으로 출발할 것이다.”

백령이 친절히 내게 알려줬다.

“비천도 올 테니, 내게서 떨어지지 마라.”

그가 당부하듯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왜 하필이면 비천도…….

그를 떠올리니 벌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똥개는 당연히 올 테니, 험난한 즉위식이 될 것 같았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천강이 만만한 신수가 아니니, 그들도 알아서 처신하겠지.”

하긴, 천강은 나래와 다르니까.

“아, 백령. 그럼 이랑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원이 알아서 할 것이다.”

아, 하원이 있었지, 참.

“은월은 벌써 출발한 건가.”

“응, 그래서 오늘은 수업이 없어.”

은월은 사법관이기에 먼저 남쪽 땅으로 출발했다. 아무래도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힘을 쓸 때 몸은 괜찮은 건가.”

그가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 또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다행히 괜찮아.”

나의 대답에 백령이 안심한 듯 시선을 거두었다.

“무리하지 마라, 시간은 넉넉하니.”

“응. 알았어, 백령.”

이후 나와 그의 사이에는 잠시간 적막감이 돌았다.

“나…… 여기 있다가 가도 돼?”

“물론, 원하는 만큼.”

그의 허락에 나는 집무실을 둘러보며 할 일이 없을지 찾고 있었다.

백령은 다시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고, 나도 백령의 책장에서 찾은 서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소원과 대가.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책의 이름이었다. 신수들의 소원과 그에 따른 대가.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의 책이었다. 나는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에게 선택받은 고귀한 신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소원.

선택받은 고귀한 신수라…….

하지만 신이 과연 신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소원을 들어줄지는 알 수가 없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그럴 거면 애초에 소원을 왜 들어주는 건데?

황당한 내용에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 책일 뿐이니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거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백령의 집무실은 매우 고요했다. 평소라면 포포나 자하가 들어와 떠들썩했겠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아무도 백령의 집무실에 들어오는 이가 없었다.

이내 나른하게 책을 읽던 나는, 어느새 스르르 눈이 감겼다.

***

아름다운 꽃밭이 보였다. 그곳에는 나와 또 다른 이가 나무에 기대 바람을 느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검은 안개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아 그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다.

“널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어.”

“……안 돼.”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그러니, 한 번만.”

그가 나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의 품이 너무 따스해서, 절로 울음이 그쳤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나와 그를 감쌌다. 이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설령 이게 너와 나의 마지막이라도.”

그의 말에는, 슬픔이 묻어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 보았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용기 내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였다.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꽃밭과 남자는 사라졌다. 대신 어떤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지?

그 여자의 형태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빛으로 둘러싸여, 그림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돌아가.”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머릿속에서 울렸다.

“돌아가, 제발.”

그녀에게서 하얀빛이 떨어졌다. ……아니, 이건 그녀의 눈물이었다.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고, 아무것도 보려 하지 마. 넌…… 너대로 있어, 아리야.”

그녀가 그 말을 끝으로 점점 멀어졌다. 지난번과 같았다. 잡으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멀어져만 갔다.

***

“아리?”

눈을 뜨자, 백령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아까 잠들었던 백령의 집무실이었다. 그의 집무실엔 어느새 어둠에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어느새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얼굴에 맺힌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를 닦으며 일어났다.

“악몽을 꿨나 보군.”

“……아니야.”

악몽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기분 좋은 꿈도 아니었다.

이 꿈은 대체…….

여태껏 꿈은 꿈일 뿐이라 치부했었지만, 지난번과 너무나도 비슷한 내용에 찝찝한 마음이 일었다.

“백령, 있잖아….”

백령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랑 들판에…….”

“남자?”

아,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지?

막상 꿈을 설명할 생각을 하니 착잡했다. 어떤 남자랑 꽃밭에 있다가 어떤 여자가 돌아가라 했다고?

아니, 일단 꿈일 뿐이잖아.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결국,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상한 꿈을 요즘 이어서 꾸는 것 같아서.”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어쨌든 좋지 않은 꿈이었나 보군.”

그가 나의 이마를 짚었다. 오늘따라 차가운 그의 손이 기분 좋았다.

“백령은 주로 어떤 꿈을 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의 푸른 눈이 잠시 흔들린 것 같았다.

이내 그가 무심히 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군.”

“아, 꿈은 원래 금방 잊히니까…….”

“그래, 꿈은 금방 잊히지. 모든 것이 그렇듯.”

그가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의 푸른 눈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꿈에 매여 봤자 좋을 것 없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니.”

그가 열린 창문 사이로 떠오른 달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달빛이 새어 들어와, 그를 비추었다.

백령은 내가 아닌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잊지 말라는 듯이.

아름다운 달빛이 유난히 그를 슬프게 비추는 것 같았다. 마치 그를 위로하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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