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자꾸 무언가가 코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익숙한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복슬복슬하고 파란 꼬리는…… 분명 포포의 꼬리인데?
포포가 여우의 모습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내 머리맡에 누워 숨죽이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포포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근새근 자는 포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문을 열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하인들이 복도를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또 온 건가……?
나는 포포를 살며시 들어 품에 안고 전각으로 향했다.
“이거 진짜 엄청난 우연 아니냐, 백령.”
나는 전각 안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이곳에 온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래, 차라리 돌아가자.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끔찍하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얼마 만이냐, 아리야!”
정말 슬프게도, 바랑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
벌써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데, 자하가 내 품에 안긴 포포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저 여우 녀석, 왜 아리 님의 품에……!”
아, 그러고 보니 포포는 자하와 함께 갔었지.
그러게, 왜 포포가 내 머리맡에서 자고 있었을까…….
자하의 외침에 포포가 하품을 하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 갔나 했더니, 너 이 녀석!”
“아리야아, 난 좀 더 잘래.”
자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포포는 졸음에 젖은 목소리로 내 품을 파고들더니, 잠을 이어 잤다.
“고양이 잠꼬대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이제야 포포가 왜 내 머리맡으로 왔는지 알 것 같다.
잠을 못 자니, 피곤해서 여우 형태로 변한 것일 테고.
“저, 저, 부러운 녀석!”
나는 쓸데없는 자하의 외침을 무시한 채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바랑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아리야아아.”
“아리 님 근처로 못 옵니다, 바랑 님.”
물론, 자하에게 막혔지만.
“똥개가 왜 여기 있어, 자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리 님.”
자하 또한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야, 뭐……. 너희들이 사화의 궁으로 온 이유와 같겠지?”
아, 그 생각을 못 했다. 바랑 또한 인간을 보러 사화의 궁에 방문할 것이란 걸.
“절대 너희들이 있을 걸 알고 온 건 아니야.”
절대 우리가 있을 걸 알고 온 거라는 소리로 들렸다.
“근데 뭐, 보통의 인간이라 실망했어.”
“저흰 바랑 님의 등장에 실망했습니다. 어디 가서 실족사라도 한 줄 알았는데…….”
바랑의 말에 자하가 재빨리 받아쳤다. 그에 바랑이 섭섭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너무한 거 아니냐. 와중에 우리 아리는 더 예뻐졌네.”
바랑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백령이 팔짱을 끼며 그런 바랑에게 탐탁지 않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 불쾌한 시선은 좀 거둬줬으면 좋겠군. 원한다면 친히 도와줄 수 있는데.”
그에 바랑이 곧장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알았다고, 알았어. 어째 너는 더 까칠해지냐, 백령. 친우 사이에…….”
대체 바랑은 왜 백령을 친우라고 칭하는 걸까……. 백령보다 나이도 훨씬 많다면서.
바랑이 볼멘소리를 내었지만, 백령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네 녀석이라면 인간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이곳으로 올 줄 알았는데.”
백령의 말에 바랑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바랑이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희, 내가 일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 믿어줄 착한 신수 있냐?”
당연히 없지. 그걸 누가 믿어?
그 아무도 바랑의 물음에 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에 바랑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아, 그것보다 이랑은 요즘 어떻게 지내냐? 아리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똥개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내게 꽂혀 있었다.
“똥개 닮아서 잘 지내.”
“내 얘긴 안 해?”
그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랑도 아마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안 해.”
“크, 이랑 이 매정한 녀석. 소식 한 통 없는 것도 모자라, 아리에게 내 얘기도 안 하다니.”
바랑이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그런 바랑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똥개 이야기를 했으면 내가 이랑이랑 대화를 나눌 가치를 못 느꼈겠지…….
그리고 그 사실을, 이랑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흑기 조사는 잘 되어 가고 있는 건가?”
바랑이 갑자기 또 말을 돌렸다. 요즘 흑기의 소식이 통 들리지를 않아,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인간 때문에 신국이 떠들썩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내가 구슬의 힘을 다뤄야 하는 이유 또한, 흑기에게서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인간에게 초점이 잡혀 있었어, 확실히.
“아직은 별다른 소식이 없군. 서쪽 땅도 마찬가지인가?”
“내가 알았으면 이미 보고했겠지. 안 그래, 백령?”
글쎄, 똥개라서 보고를 안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가 흑기에 관한 보고를 한다고 해도, 왠지 제대로 된 내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백령 또한 같은 생각인지, 구태여 그에게 답하지 않았다.
“흐음……. 대체 뭘 준비하고 있길래 이렇게나 숨죽이고 있는 거지? 아리를 노린다면, 서둘러야 할 텐데.”
그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아무도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가 뒤로 누우며 해맑게 웃었다.
“흑기 대신 인간이라……. 재밌게 흘러가지 않아?”
바랑이 턱을 괴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에 백령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얄미워 바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이나 해, 똥개.”
나의 말에 바랑이 환하게 웃었다.
“아리가 그러라니, 기꺼이 그래야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럼 이만.”
그가 쌩하니 전각 밖으로 나갔다. 백령을 제외한 모두가 떠난 그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 바랑 님이…… 이상해.”
자하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읊조렸다.
나도 오늘의 바랑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동쪽 땅에 놀러 가겠다고 하는 게 정상인데, 오늘 그는 동쪽 땅의 얘기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처음으로 바랑 님이 아리 님한테 삼촌 어쩌고 하면서 얘기를 안 꺼냈어요…….”
그래, 나한테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
……정신을 차린 건가? 정말로?
개과천선…?
“뭐, 어쨌든 좋네요. 더 이상 귀찮게 굴지도 않고.”
그건 그렇긴 한데, 왠지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이제 동쪽 땅으로 돌아가야겠군.”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왜 백령이 귀찮은 바랑을 굳이 상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 내가 깨어나길 기다린 거구나.
그러고 보면 백령은 표현은 안 해도 항상 날 기다려주었다. 어디에서건.
……그의 진심은 뭘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이니.
***
어느새 사화의 궁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오랜만에 정자에 앉아 은월의 수업을 받고 있었다.
요즘, 은월이 바쁜 탓에 자주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구슬의 힘을 끌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다행히 며칠 전 쓰러진 이후부터 구슬의 힘을 조금씩 끌어오는 데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많이 발전했네.”
은월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활짝 웃으며 눈을 떴다.
“이제 구슬의 힘을 쓰는 데에 많은 힘이 들지도 않아.”
나의 말에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도 조심해. 아직은 불안정하니까.”
은월 또한 저번에 내가 쓰러졌단 것을 들었을 테니,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은월, 나 없는 동안 뭐 했어?”
문득 그에 대해 궁금했다. 일주일씩이나 그는 백령의 궁에 오지 않았으니까.
나의 물음에 그가 시선을 다른 데에 두었다.
“글쎄. 이상하게 일이 잘 안 돼서 고생 꽤 했지.”
“왜?”
은월이 나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엔 나의 푸른 눈이 비추어져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지난번처럼 시간이 또 멈춘 것만 같았다.
잠시간 그렇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그러게. 이런 건 처음이라.”
“응?”
그가 나와 마주하던 눈을 돌렸다. 그에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동안 그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은월 일이 늘었겠구나. 인간인 이연의 존재로.
“어, 그럼 은월, 이연을 만난 거야?”
“이연?”
“그, 이번에 들어왔다던 인간…….”
“아.”
인간이라는 말에 그가 탄식을 내뱉으며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바로 만났었지. 그 인간 덕에 일이 두 배로 늘어서 골치 아팠어.”
그가 기지개를 켜며 무심히 대답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내 수업이 늦어진 이유도, 인간 때문이었어.
“어땠어?”
“그냥 그랬어. 난 아무 생각 안 들던데. 그냥 평범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아, 미호를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던 거 빼면.”
미호와 은월을 동시에 만났구나, 이연.
은월이 그 당시를 회상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긴 하지. 신국에 인간이 들어오는 건 진짜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래도…… 난 좀 반가웠어.”
나의 말에 은월이 미소 지으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 손이 너무나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 천강의 즉위식, 갈 거야?”
그러고 보니 천강의 즉위식이 곧 열린다는 초대장을 받았다. 백령은 물론, 다른 신수들도 그의 즉위식에 갈 예정이었다.
나의 물음에 그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품에서 천강의 초대장을 꺼냈다.
“되도록 안 가고 싶었는데,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겨버렸지.”
“응? 이유?”
이유라면…….
“중대한 행사를 결정하는 회의를 한 대서.”
“중대한 행사?”
나의 물음에, 은월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눈을 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성인식 말이야.”
……응? 내, 내 성인식?
내 성인식에 관한 것을 결정한다고? 천강의 즉위식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