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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04)화 (104/167)

104.

“설마…… 제가 올 때까지 아리 님의 몸에 신력을 불어 넣으신 겁니까, 백령 님?”

영아는 아리를 진찰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보통 신수라면 몇 시간, 아니,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백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리의 상태는 어떻지?”

“백령 님의 신력 덕분에 안정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언제 깨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영아의 대답에 백령이 아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국 최고 의원이자 약사인 영아의 진찰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백령은 그나마 안도하며 아리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영아는 백령의 눈치를 살피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어, 하오나 아리 님이 쓰러진 원인은 저도 잘…….”

“그건 되었다.”

백령의 말에 영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물러가라.”

영아가 짧은 인사말을 하고 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이내, 복도로 나간 영아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치게 되었다.

“미, 미호 님……?”

갑작스러운 미호의 등장에 영아가 몸 둘 바를 몰랐다. 영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미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령의 방으로 향했다.

“왜인지 감이 좋지 않구나…….”

“네?”

영아는 바삐 백령에게로 향하는 미호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에 함께 온 자라 신수가 고개를 갸우뚱하였지만, 영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우린 그만 서화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하구나, 온아.”

온이라는 이름의 자라 신수는, 미호가 떠나간 자리에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두고 영아의 뒤를 따랐다.

백령은 미호와 집무실에 함께 있었다.

“백령.”

백령은 예고 없는 미호의 방문이 썩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아리가 쓰러져 있으니, 아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아리는 어딨어?”

미호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그녀의 아홉 개의 꼬리가 나와 있는 상태인 걸 보면, 틀림없었다.

“다짜고짜 무슨 일이지, 미호?”

백령의 날 선 말투에도 미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리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지금 아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잖아!”

현재 아리의 몸 안은 백령의 기운으로 가득 찼기에, 흥분한 미호는 아리의 기운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그제야 백령은 사태의 위험성을 파악했다.

‘이건 좀 위험하군…….’

그녀가 왜 한밤에 찾아와서 이러는지, 일단은 그것부터 파악해야 했다.

“왜 이러는지 설명부터 하지, 미호. 나와 싸워봤자 득 될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않나?”

백령의 냉기 어린 말에 미호의 눈동자가 본연의 색으로 돌아왔다.

“……나타났어. 나타났다고!”

미호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뭐가 나타났다는 거지?”

“그때와 같아. 그때와…….”

“미호!”

두서없는 미호의 발언에 백령이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제야 정신 차린 미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

“뭐……?”

“인간이, 또 신국으로 들어왔어, 백령.”

미호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백령 또한 그녀의 말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신국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아리가 발견된 중앙 숲은, 인간계와 신국이 연결된 유일한 공간이었지만, 그 이상 보통의 인간들은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아리는 백령이 물어온 것이었으니, 논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아예 흘러들어온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딱 한 번, 신국에는 이번과 같이 인간이 흘러들어온 적이 있었다.

바로, 신국의 큰 불행이 닥치기 전.

그 불행으로 미호는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고, 백령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다.

“그저 우연일까? 지난번처럼 신국제가 다가올 때 인간이 흘러들어온 게, 정말…… 정말 우연일까?”

미호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애써 침착하려 애썼지만, 그게 맘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인간이 다시 신국에.”

백령이 낮게 읊조렸다. 수많은 생각이 백령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곧 이성을 찾은 백령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연이던 아니던, 전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백령이 달빛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속삭였다.

***

“알려고 하지 마.”

누군가가 내게 속삭였다. 맑고 고운 여자의 목소리. 어딘가 익숙한 듯했다.

“넌 알 수 없고, 앞으로 알아서도 안 돼.”

뭐를……?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서 뒤돌아섰다.

“널 위해 지금껏 해온 노력과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

그녀가 내게 당부하듯 말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에서 슬픔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내게서 점점 멀어졌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그녀를 잡으려 달렸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었다.

“잊지 마, 아리야. 절대 잊어선 안 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이내 점차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였다. 푸른 장식으로 가득 채워진 이 방. 낯설지만은 않은 곳이었다.

……백령의 방?

“……일어났군.”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백령의 목소리였다.

“백령…….”

백령은 나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밤새 내 곁을 지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그는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 보였다.

“……몸은 괜찮은가.”

“응……. 이제 괜찮은 것 같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의 대답에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내오라 하지.”

그는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방 안에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내 발치에서는 포포가 자고 있었다. 왜인지 여우의 모습으로 잠든 포포는, 꼬리와 몸통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포포, 일어나.”

그의 등을 쓰다듬자, 귀가 팔랑이며 그가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야, 아리, 너 깨어난 거야? 몸은? 괜찮아?”

“응, 조금 뻐근한 것만 빼면 괜찮아.”

포포가 하품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야, 당연히 네가 사흘을 내리 잤으니까, 뻐근할 수밖에 없지.”

뭐……?

사, 사흘을 내리 잤다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나의 꿈은 무척이나 짧고 간결했는데, 그게 사흘……?

잠깐만, 그렇다면 백령은 사흘 내내 내 옆을 지킨 거야?

……오늘따라 유독 그가 피곤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어쨌든, 깨어나서 다행이다. 죽은 듯이 잠만 자니까 잘못될까 봐 걱정했다고.”

포포가 다리로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노가 내 것으로 보이는 식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리 님, 몸은 괜찮으셔요……?”

“응, 여노, 걱정해줘서 고마워.”

여노가 가져온 음식은 맛있어 보이는 죽이었다. 아픈 나를 배려한 그녀의 세심한 마음씨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거 진짜 맛있다!”

포포는 죽이 입맛에 맞은 건지, 옆에서 한 그릇 더 먹고 있었다.

“아, 아리 님……. 그러고 보니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여노가 망설이며 운을 뗐다. 그에 나는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곧 미호 님이 찾아오실 거예요.”

나는 먹던 죽을 도로 뱉을 뻔했다.

“미호가? 왜?”

설마 내가 쓰러졌단 걸 들은 건가?

아냐, 백령이 그녀에게 굳이 알렸을 리가 없다. 그랬으면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본 건 백령이 아니라 미호였겠지.

“자세히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며칠 전 한밤중에 오셨었거든요.”

“며칠 전?”

“아리 님이 쓰러지신 날이요.”

아, 그래서 난 미호를 못 봤던 거구나.

아직도 내가 사흘을 내리 쓰러져 있었단 게 믿기지 않았다.

“여노, 그럼 나 준비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네?”

이 꼴로 미호를 만날 수는 없잖아?

나는 식사를 마친 후 내 방으로 돌아가, 미호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아직 미호는 내 귀에 대해 모르니, 오랜만에 여노에게 머리띠도 부탁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백령의 집무실 문 앞에서 미호의 기운이 느껴졌다.

언제 온 거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격양된 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수 있다면 그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인간?

아무래도 미호와 백령은 대화에 집중하느라 내가 들어온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인간이 들어왔다고? 신국에?

나와 같은 인간이……?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미호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미호는 신국에 들어온 인간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인간이 매우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인간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곧이어 백령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해라, 미호. 신수가 인간을 죽이는 건 법도로 금지되어 있으니.”

“알아.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거잖……. 아리야?”

잠시 고개를 돌린 미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녀는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미호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괜찮아? 문제가 생겨서 은월과 청화관에 있었다고 들었어. 어떤 문제야? 지금은 해결된 거야?”

그녀의 걱정 어린 표정에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으, 응……. 별것 아니었어. 괜찮아, 지금은.”

그러자 미호가 환히 미소를 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유독 미호의 행동 하나하나가 과하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우리 아리, 전보다 많이 컸네.”

훌쩍 커버린 내가 대견하다는 듯,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품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미호는 당분간 나를 안고 놔주지 않았다.

“미호, 이만 앉지.”

그런 그녀를 만류한 건 백령이었다. 백령의 말에 미호가 아쉬운 표정으로 껴안은 팔을 풀었다.

그녀가 백령의 맞은 편에, 나는 백령의 옆에 착석했다.

한동안 나와 백령, 그리고 미호의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늦게 들어온 포포가 내 옆에 앉아 미호에게 인사한 것을 빼면.

마치 나 때문에 할 말을 아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하던 말, 계속해도 돼.”

“응? 무슨 말?”

미호가 눈을 접으며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인간에 관한 거.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나의 대답에 그녀가 멈칫했다. 숨기고 싶은 것을 들켰다는 듯이. 나는 두 신수의 반응을 계속해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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