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당분간 수업이 중지되었으니, 나는 마음 편하게 늦잠을 잘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 예정은, 요 며칠간 매일 아침 나를 깨워대는 포포 덕분에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리야, 좀 일어나.”
“나한테 왜 이래, 뽀뽀.”
포포가 나의 귀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넌 왜 이렇게 아침잠이 없어, 애가?”
“원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잖아.”
“넌 여우잖아.”
“그건 그렇네, 헤헤.”
포포가 해맑게 웃으며 꼬리를 살랑였다. 아무래도 은월의 여파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리 님,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시네요.”
여노가 새로운 옷가지들을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여노가 가져온 옷들을 살펴보는데, 평소와는 옷감의 느낌이 달랐다.
“백령 님이 이번에 직접 매수해오신 옷감으로 만든 옷이랍니다.”
“백령이?”
“네, 생전에 옷감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던 분이신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며칠 전에 직접 구해오신 옷감을 제게 주시면서 아리 님 옷을 부탁하셨답니다.”
눈대중으로 옷과 나를 번갈아 보던 여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포포, 잠시만 나가주시겠어요?”
여노의 정중한 말투에 포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
배, 백령이 내 옷을……?
아직도 믿기지 않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옷가지들을 훑어보았다. 고운 옷감들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한 색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신국에서 가장 유명한 신수 님에게 의뢰해 제작한 의복들이랍니다.”
“가장 유명한 신수라면……?”
“청아 님이요. 아리 님이 자주 하시는 귀 장식품도 청아 님이 만드셨다고 하던데요?”
귀 장식품이라면…… 은월이 생일 선물로 주었던 장신구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청아가 가장 유명하다고? 은월의 수행원이잖아.
여노가 내 의문을 눈치챈 건지, 설명을 덧붙였다.
“아, 물론 청아 님은 은월 님의 수행원이시지만, 동시에 옷이나 장신구를 손수 만드시기도 한답니다.”
문득. 은월에게 선물을 받은 날,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건 어디서 샀어?”
“그냥 아는 신수한테 뜯어왔어.”
“……응?”
그때 그 아는 신수가 청아였구나.
“이번에 청아 님한테 아리 님의 이 장신구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답니다…….”
여노가 손을 덜덜 떨며 내 귀에 달린 장신구를 조심스럽게 달아주었다.
“대체 얼마길래 손을 그렇게 떨어, 여노……?”
“저는 평생 못 만져볼 금액이에요……. 그저 은월 님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여노가 자세한 액수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아마 다시 한번 상기하기 힘들 정도의 금액인 것 같았다.
은월, 대체 청아한테 이거 얼마 주고 산 거야…….
“어쨌든 청아 님에게 의뢰한다는 건, 그만큼 값이 대단하다는 것이죠. 이 옷들도 그렇고요.”
여노가 하늘색 저고리를 내게 입히며 말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 저고리가 아리 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여노 덕분에 수월하게 옷을 갈아입은 나는, 경대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저고리의 색과 무늬가 퍽 아름다웠다.
“고마워, 여노.”
나의 감사 인사에 여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저 백령 님의 명에 따라 옷감을 들고 가, 청아 님이 제작한 옷을 가져오는 일만 했을 뿐인걸요. 감사 인사는 백령 님께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여노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내 잠시간 내 눈치를 살피던 여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식사는 백령 님의 집무실로 보낼까요?”
그녀의 사려 깊은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백령과의 대화 이후 나는 그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고, 그 또한 나를 찾는 일이 없었다. 그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조심스럽게 제안한 거겠지.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나와 백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눈치챈 것 같으니.
여노가 식사 준비로 방에서 나가고, 나는 포포를 데리고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발을 들이는 그의 공간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천천히 집무실 문을 열었다.
“……백령.”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정신없이 두루마리들을 보던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간, 그의 눈에 당혹감이 일었다. 그런 그의 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리……?”
그가 붓을 놓았다. 나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여노가 식사를 들고 백령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여노가 탁자에 올려놓은 아침 식사를 가리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같이 먹을까 해서.”
“……그랬군.”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중간에 있는 탁자로 가, 앉았다. 나는 그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와 아침을 함께 먹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옆에 앉은 포포 덕에 단둘은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식사였다.
식사하는 동안 별다른 얘기가 오가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먼저 말을 건넨 건 백령이었다.
“네게 이제 떠나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무덤덤하게 내뱉은 그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백령. 이 옷도.”
나의 감사 인사에 백령은 내가 입고 있는 저고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다행이군.”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찌 되었든, 백령과의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마지막에 물었던 것에 관한 대답은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나중에 생기면 말할게.”
백령의 호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아, 그러고 보니 은월에게 들었는데, 구슬의 힘을 다루다 잠시 쓰러졌었다고.”
“아, 으, 응……. 그랬지.”
백령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나름대로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여기서 하여라.”
응? 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백령을 바라보자, 백령이 낮은 목소리로 내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으니.”
아, 구슬을 다루는 연습…… 말하는 거 맞지?
백령의 집무실에서 이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할 일이었지만, 그의 걱정스러운 눈초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백령은 다시 일에 집중하게 되었고, 나 또한 구슬을 다루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리야, 형님은 언제봐도 멋있지 않아?”
포포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만 빼면,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시 한번 그때처럼 구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또 지난번과 같은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뭐지……?
형체를 자세히 보려 하면 할수록 신력이 급격하게 소모되었다.
푸른 기운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고도 차가운,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이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을 감고 다시 구슬에 정신을 집중했다. 형체를 보려 최대한 신력을 모았다. 그런데, 안갯속에 가려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마치 누군가 막아놓은 것처럼 안개를 걷어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순간, 백령의 얼굴이 떠오르며 신력이 구슬 안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황급히 눈을 떴지만, 곧바로 시야가 흐려졌다.
“아리……!”
백령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아득히 멀어져만 갔다.
***
백령은 일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리가 쓰러졌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 쭉 그랬다.
은월은 뒤늦게 제게 그 사실을 알려줬었다. 백령은 그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리의 옷감을 고르느라 자리를 비웠던 터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구슬의 힘을 쓰려 하다가 쓰러졌다니……. 설마.’
백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백령.”
그때였다. 아리가 백령을 찾아온 것은.
아리와 대화를 하는 내내 백령은 알게 모르게 아리의 안색을 살폈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그는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아리를 지켜보았다.
아리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맴돌자, 백령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내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아리가 황급히 눈을 뜨는 모습이 백령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
집무실에 다급한 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령은 빠르게 달려가, 쓰러지는 아리를 품에 안았다.
“아, 아리야……!”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포포도 이 상황에 크게 당황하며 아리를 불렀다. 하지만 아리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은월에게 듣기로는, 얼마 가지 않아 깨어났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리는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타!”
백령이 황급히 자타를 불렀다. 그에 자타가 곧바로 백령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백령 님, 부르셨…….”
“지금 당장 영아를 데려와라.”
“명 받들겠습니다.”
백령의 급한 명령에 자타가 빠르게 움직였다.
백령이 아리를 안아 들고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리를 침대에 눕히고, 아리의 몸 상태를 다시 한번 살폈다.
신력이 약해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거의 바닥나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백령은 곧바로 아리에게 자신의 신력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신력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가 계속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설마……!
백령은 신력으로 아리의 몸 안에 있는 구슬을 확인했다.
모든 신력이 구슬로 향하고 있었다. 이것을 확인한 백령은 크게 당황했다.
백령이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으로선 방도가 없었다. 자신의 신력을 계속해서 아리에게 보내는 것 외에는.
“아리야…….”
백령이 애절하게 아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창가엔 달빛이 드리웠다. 그때까지도 백령은 계속해서 아리에게 자신의 신력을 넘겨주고 있었다.
드디어 아리의 몸에 신력이 차기 시작했다. 백령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력으로 아리의 몸을 채웠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영아가 도착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백령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의 짙은 녹색 머리칼이 바닥에 쓸렸다.
하지만 그녀가 머리칼을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죄송합니다. 백령 님. 서화원 아이의 실수로 자타의 전언이 늦게 당도했습니다.”
서화원은 하필이면 그때 내부에서 작은 문제가 생겼었다. 그 까닭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았고, 참다못한 자타가 서화원 대문을 부숴버리면서 영아에게 전언을 무사히 전할 수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백령 님.”
영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그럴 시간 없다. 아리의 상태부터 확인해라.”
백령의 명에 영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