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랑이 나가고,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원, 너는 왜 안 나가……?
의문을 잔뜩 품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기가 찬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봐?”
도리어 하원이 적반하장으로 물었다.
“넌 왜 안 나가?”
“뭐야, 네가 나한테 물어볼 게 있는 거 같아서 기껏 남았는데.”
하원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황급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물어볼 거……?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내가 알려줄 수 있는 범위라면.”
나의 말에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암, 나 졸려, 아리야…….”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포포가 하품을 하며 탁자에 머리를 박고 졸기 시작했다.
나는 포포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자하가 오늘 왜 그랬는지, 알려줄 수 있어?”
“남의 가족사를 떠드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예로부터 다른 신수의 개인사를 지나치게 말하고 다니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다들 다른 이에 대한 일정 범위 이상의 말은 아꼈었다.
그런데 가족사라니?
자하가 오늘 유난히 기운이 없었던 건, ‘신수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였다.
그렇다면 가족 중 누군가가…….
“가족사라면…….”
나는 일부러 뒷말을 아꼈다.
“자하는 원래 동쪽 땅의 신수가 아니야. 여기까지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거고.”
동쪽 땅의 신수가 아니라고?
문득, 자하가 사화를 지독하게 혐오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보다 높은 신수인 사화를 대놓고 경멸했다.
그렇다는 건…… 사화가 자하의 가족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
자하는 원래 북쪽 땅의 신수였던 거고?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동쪽 땅에 있는 거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확실한 건 자하와 사화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사화는 뱀이고, 자하는 스라소니이다. 둘이 닮은 점도 전혀 없는 걸 보면, 그 둘이 가족으로 엮였을 리는 만무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현재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아까 물었을 때, 자하는 답을 하기 꺼리는 듯했으니까.
“자하가…… 내게 말해줄 날이 올까?”
“그게 질문이야? 너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미래를 보는 능력 따윈 없다.”
그래, 하원이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시호는 죽지 않았겠지…….
하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일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다른 신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재주는?”
“있겠냐?”
그가 질색하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있을 거 같았는데…….”
내 노력이 통한 건지, 하원이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언젠간 마음을 열고 말해주겠지. 지금 그 고양인 그저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일 테니.”
그만큼 자하에게 상처가 된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이제 질문은 끝이냐?”
“오늘은 끝인 거 같아.”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졸음에 점점 눈이 감기니까.
“……오늘은?”
“응!”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쐐기를 박았다.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고.”
“……앞으로 얼마나 더 부려먹으려고.”
그가 한숨을 쉬고 있었지만, 왜인지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은 조금 피로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농땡이 친 이랑을 찾아 빗속을 헤치고 왔을 테니.
“하원, 고마워.”
“뭐가?”
“다.”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 미소를 본 그는 나가려던 문을 잡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넌 항상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
그가 낮게 읊조린 후, 곧바로 방에서 나갔다. 북적이던 신수들이 하나둘씩 사라졌으니, 방이 꽤 넓게 느껴졌다.
여전히 내 무릎 위에서 새근새근 잠을 청하고 있는 포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재워야겠네.”
깨울 수도 있었지만, 비도 오고 천둥도 치고, 늦은 시간이기도 하니 그냥 포포를 여기서 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절대 외롭다거나, 천둥이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장에 있는 여분의 이부자리를 꺼내 포포를 눕혔다.
“으으응…… 따뜻해.”
포포가 이불을 끌며 머리를 비볐다. 부드러운 이불이 기분 좋은지, 자면서도 그의 귀가 팔랑거렸다.
누가 포포 잘 때 업어가면 절대 안 깰 것 같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 후로, 정말로 자하는 철통 방어를 하고 있는지, 이후 이랑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이랑이 바쁜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덕분에 내 일상은 평소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모든 일이 순탄했다. 지금, 이 순간을 제외하면.
“……이게 왜 안 될까.”
그렇다. 나는 평소와 같이 은월의 수업을 들었지만, 도무지 나가지 않는 진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구슬의 힘에 신력을 불어넣고, 구슬의 힘을 다루는 것이 잘되지 않았다. 이걸 성공해야 구슬을 이용해 내 신력을 사용할 수 있다.
“천천히 해봐, 조급해하지 말고.”
은월이 격려의 말을 하며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에 왠지 안심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바심이 났다.
며칠째 이걸로 전전긍긍이라니…….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다시 가르쳐주는 은월에게도 미안하고, 나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다.
“아리야, 그런 건 조급해하면 더 안 된다더라.”
포포가 옆에서 과자를 입에 넣으며 은월의 말을 거들었다.
누워서 과자 먹고, 졸리면 자고, 네가 참 부럽다, 포포야.
왠지 열 받아서 다시 한번 은월의 가르침대로 힘을 집중했다. 나의 주위에 푸른 기운이 일순간 감돌았지만, 이내 신력이 구슬의 힘에 가까워지자 곧바로 힘이 빠져나갔다.
“계속 막히는 거 보니까, 구슬을 좀 더 느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미안해…….”
“괜찮다니까. 신국제 전까지만 하면 돼. 시간은 넉넉해.”
응? 신국제?
아……! 기억났다. 내가 아주 조그맣던 시절, 그때 은월이 신국의 역사에 관해 배울 시절에 내게 가르쳐줬었던 신국의 가장 큰 축제이다.
50년에 한 번 개최하는 신국제는, 신국의 신들을 위한 축제.
한 마디로, 인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 그런데 신국제가 언젠데?”
“음……. 언제더라. 이맘때쯤이라고는 하던데. 아마 천강의 즉위식 후일 거야.”
은월이 가늠이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에 포포가 먹던 과자를 내려놓고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싸부도 모르는 게 있구나.”
“난 그 당시에 상당히 어렸거든.”
그때, 문득 은월이 무릉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당시 은월은 무릉도에 있었던 걸까?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구슬의 힘도 못 다루는 내가 사담을 하기엔 양심에 많이 찔렸다.
결국, 나는 다시 구슬에 힘을 쏟았다.
두어 번 정도 더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도저히 모르겠어.”
좌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포포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쯧쯧, 싸부 말대로 아리 너는 느낌이 부족해, 느낌이.”
……꼬리털 다 뽑아 버린다, 여우야.
포포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슬에 집중할 때니 참기로 했다.
느낌이라. 구슬을 느껴야 한댔지, 은월도.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 구슬을 느끼려 노력했다. 그러자,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신력이 구슬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구슬 안에 신력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버거워지면서 어떠한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형상이 무엇인지는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안개가 가득 껴서 시야가 차단된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형상을 자세히 보려 하자, 신력이 튕겨 나왔다.
나는 급격하게 소모된 힘에, 숨을 가쁘게 쉬었다. 잠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리야, 괜찮아?”
정신을 차렸을 땐, 은월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당황한 모습이었다. 은월의 품에 안겨 있으니, 특유의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괜찮은 거 같아.”
“무리하지 마, 네가 구슬의 힘을 못 다룬다고 해도 상관없어.”
괜찮다 했는데도, 은월이 나의 안색을 살폈다.
“당분간 수업은 중지하는 게 어때?”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하지만 흑기가…….”
“그딴 건 나나 백령이 처치하면 그만이야.”
은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이 몸으로 혼자 가는 건 무리일 거 같으니까.”
그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은월의 목 주위에 팔을 감았다.
“괘, 괜찮은데…….”
“글쎄.”
은월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나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난 안 괜찮을 거 같은데.”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숨결까지 내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나는 은월이 정자를 벗어나 방 안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어느새 익숙한 복도가 나오고, 내 방 앞에 당도했다.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업은 안 해도 혼자 가끔 연습해 볼래.”
나의 말에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단 걸 알았는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혼자 있을 땐 연습하지 말고.”
“알았어.”
은월의 당부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안심하며 품에서 나를 놓아주었다.
은월이 나를 내려주자마자 중심을 못 잡고 휘청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직 몸에 힘이 없었다.
은월이 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잡았다.
“봐, 안 괜찮잖아.”
“이, 이제 진짜 괜찮아.”
나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모아서 똑바로 섰다. 그제야 은월이 잡은 허리를 천천히 놓았다.
“혼자 있을 땐 하지 마, 정말로.”
그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휘청이는 내 모습을 보니 다시 걱정이 시작된 듯하다.
그에 포포가 폴짝 뛰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싸부, 걱정하지 마! 내가 아리 옆을 항상 지킬게!”
포포가 은월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소리쳤다. 그에 은월이 포포의 머리를 잠시간 쓰다듬었다.
“부탁할게.”
은월의 부탁에 기분이 좋아진 포포의 꼬리가 흔들렸다.
“헤헤, 맡겨만 줘, 싸부!”
아니, 내 곁을 지키는 걸 은월에게 맹세하는 건데, 이 망할 여우야!
너무나도 경건한 포포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