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좁은 탁자에 하원까지 합쳐 다섯이 앉아 있으니, 비좁기 그지없었다. 결국, 포포를 내 무릎에 앉히고 하원과 이랑의 수업을 경청했다.
물론, 포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
“내가 왜 아리 무릎에 앉아 있어야……!”
“뽀뽀, 이거 먹자.”
포포가 특히 좋아하는 다과를 집어 입에 넣어주자, 그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그 모습을 자하와 이랑은 상당히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포포는 그 둘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과를 먹으며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신수의 탄생부터 살펴보도록 하지.”
하원의 목소리에 모두가 그에게 집중했다.
“신수의 탄생은 대개 부모 신수로부터 탄생하는 경우가 많아, 이랑 네 녀석처럼 말이야.”
“하원, 너는 우리 아버지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니까.”
하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잘 알지, 흑랑은 시호의 친우였으니까.”
“흐응……. 과연 그럴까……. 아리야, 이거 맛있어?”
이랑이 하원의 말을 대충 흘러들었다. 하원은 당장이라도 이랑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것 같았지만, 자리도 자리이니만큼 침착하려 애썼다.
“내가 대체 왜 이런 녀석 교육을…….”
“그거 15번째 듣는 말인데, 지겨워.”
“닥쳐.”
하원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괜스레 양심에 찔렸다. 교육에 관한 것 또한 내가 제시한 의견이고, 하원이 이렇게 된 데에도 내 공이 크니까.
그에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 흑랑한테서 네 녀석 같은 자식이 나온 건지.”
“왜? 주위에선 다들 판박이라던데.”
이랑의 대답에 하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랑과의 대화를 포기하겠다는 뜻이 내포된 것 같았다.
“알았어, 안 할게. 수업이나 하자, 하원.”
“그래. 어찌 되었건, 신수는 부모 신수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아마 여기 있는 신수 대부분이 그럴 거고.”
하원이 탁자에 앉은 모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내 하원의 시선이 내게 멈췄다.
“……아리, 넌.”
나는 황급히 하원의 말을 가로챘다.
“그런데, 대개 신수가 그렇다는 건, 그렇지 않은 신수도 있다는 거야?”
나의 물음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현재로서는 미호와 백령, 그리고 은월 같은 경우지. 아, 나래도 거기서 태어났나? 그 새한테는 워낙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미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백령과…… 은월?
의외의 얘기에 눈을 크게 뜨고 하원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탄생이 남달랐지. 대부분의 신수는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자하, 넌 알고 있지 않나?”
“아, 예, 뭐…….”
하원의 물음에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대부분의 신수가 모르는 정보를 자하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자하는 평소와는 달리 안색이 굉장히 안 좋았다.
“근데 어떻게 남달랐다는 거야?”
이랑이 턱을 괴고 성의 없이 물었다. 그에 하원이 잠시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무릉도라고 알아?”
“무릉도……?”
그에게 되물은 건 이랑이 아닌 나였다. 무릉도라는 건 은월의 신국 지리 시간에도 배운 적이 없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곳은 미호만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이랑이 다과를 툭툭, 치면서 물었다. 그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려면 지금의 백령과 은월도 충분히 갈 순 있겠지만, 굳이 갈 일은 없지. 그 둘은 구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신력 낭비도 심할 테고.”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네.”
이랑이 만족스럽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늑대 귀가 두어 번 흔들렸다.
“땅의 주인 되는 자들만 아는 사실이니까. 근데 난 이걸 차기 주인들에게 알려주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의문을 표했다.
“어쨌든, 무릉도에서 태어나 네 땅 중 각자 뿌리내릴 땅으로 떨어지지.”
떨어…… 진다고?
대체 무릉도는 어떤 곳일까, 떨어진다니.
잠시만, 근데 그러면 아이 모습으로 떨어진다는 건가?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아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조금 이상한데.
포포가 고민하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건지, 고개를 올려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리야?”
“어, 어어…… 떨어진다길래.”
나의 말에 하원이 살짝 실소를 터트렸다.
“말이 떨어진다는 거지, 진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리고 인간형도 아니고……. 무엇보다, 태어나자마자 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럼?”
“흐음…….”
하원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그는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리야,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내 모습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
“아.”
그에 답을 해준 건 이랑이었다. 이랑이 서책을 가리켰다. 그곳엔 인간으로 치면 5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정말 못 그렸…….
“알아보기 좀 힘들지? 하원이 그림 솜씨는 형편없는 것 같아.”
……하원이 그렸구나.
대놓고 앞에서 악담을 들은 하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근데 서책의 그림을 하원이 그린 거라면…… 서책 자체를 하원이 만든 건가?
하원의 설명을 듣다 보니 그가 어떻게 이리 잘 알고 있는지에 관해 의문이 들었다.
“근데 하원은 이걸 어떻게 다 알고 있어?”
“그거야, 하원도 무릉도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나의 의문에 답을 한 건 하원이 아닌 이랑이었다.
“그렇지, 하원?”
이랑이 확인차 하원에게 물었다. 그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백령이나 은월과 달리 내겐 아주 오래전 기억일 뿐이지.”
하원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마치 슬픈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하긴, 하원은 아주 오래 산 신수니까.”
“하원 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신국에서 유명했었죠.”
자하가 이랑의 말에 맞장구치며 차를 마셨다. 자하의 얼굴엔 왠지 모를 근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상태가 좋지 않은 자하가 걱정되었다.
“자하.”
“네?”
“힘들면 돌아가서 쉬어도 돼.”
“아, 아닙니다, 아리 님.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자하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러고 보니 자하의 과거에 대해서 한 번도 들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조심스레 자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이젠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자하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는 내게 이야기를 하기 꺼리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안 좋은 이야기인 건가…….
약간의 호기심과 걱정이 일었지만, 자하 본인이 꺼리는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 아리 님, 제 걱정을 하신 겁니까?”
자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온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수긍하면 자하가 난리를 피우겠지?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자하가 온갖 난리를 피우는 광경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래도 뭐, 가끔은…….
“표정이 많이 안 좋았어, 자하.”
그런데,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
자하는 힘없는 미소를 짓더니, 누구보다 가냘픈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가요? 그래도 아리 님이 걱정하시니, 저도 힘내야겠어요.”
……뭐야? 자하,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왜, 왜 난리를 치며 날 귀찮게 굴지 않는 건데?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포포 또한 다과 먹는 것을 멈추고 멍하니 자하를 바라보았다. 포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야, 고양아. 너 왜 그래, 오늘? 뭐 잘못 먹었어?”
포포가 먹던 다과를 자하의 입에 넣었다. 포포 나름의 정신을 차리라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자하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힘없이 포포가 먹이는 다과를 받아먹고 있었다.
“히익. 얘 진짜 왜 이래?”
포포가 기겁하며 자하에게서 물러났지만, 자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은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자하와 포포를 지켜보던 이랑이 어수선해진 상황을 정리하듯 턱을 괴며 서책을 넘겼다.
“이제 신수의 죽음에 대해서 배울 차롄가?”
‘신수의 죽음.’
곧바로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하원 또한 누군가가 떠오른 건지,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게는 이 주제가 아직은 버거워 보였다.
“신수는 대개 영생을 산다고 하지. 저 아이와 같은 하급 신수가 아닌 이상에야.”
하원이 내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포포를 바라보았다. 포포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일 뿐이었다.
“신수는 타 신수에 의해 죽거나, 자결하거나, 둘 중 하나다.”
모두가 묵묵히 신수의 죽음에 관해 듣고 있었다.
“신수가 죽은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말 그대로 소멸하지.”
소멸……. 아무것도 남지 않는 다라.
“죄를 지은 신수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마저 소멸해버린다고 알려져 있고, 죄를 짓지 않은 신수는 신수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그에 이랑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책임한 수업이야, 하원.”
“난 죽지 않아봐서 몰라. 모르는 걸 어떻게 가르쳐? 그냥 노망난 여우가 시키니까 하는 거지.”
그건 맞는 말이지. 그걸 알았으면 하원이 지금 우리 앞에 있을 리가 없지.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자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자하가 고개를 한번 숙이고,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이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원 님, 가실 때 이랑 님도 꼭 끌고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자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동안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오늘 고양이 이상해.”
포포의 중얼거림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하원은 빼고.
“그럴 수도 있지. 저 새끼고양이라면.”
하원이 무신경하게 말했다.
하원은 자하가 왜 저러는지 아는 건가?
“하원, 혹시 뭔가 알고 있어?”
“글쎄다. 그것보다 수업 끝났는데, 이랑 너 안 가냐?”
하원의 시선이 이랑에게로 향했다.
“난 더 있을 건데?”
누구 마음대로……?
뻔뻔한 이랑의 대답에 절로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더 있어라. 백령 부를 거니까.”
“…….”
“셋이서 삼자대면하면 되겠네.”
이랑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뻔뻔한 이랑이라도 백령한테는 못 당하는 모양이다.
이랑이 결국 서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원, 비겁해.”
“잘 가라.”
훠이 훠이, 손짓하던 하원은 이랑이 일어서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리야, 다음에 봐.”
이랑이 나가기 전, 내게 인사말을 건넸다. 나는 미소 지으며 그에 답했다.
“이랑.”
“응?”
“다음에 또 창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백령 부를 거야.”
나의 한마디에, 이랑이 멈칫했다.
뭐? 원래 이런 건 바로바로 써먹는 거랬어.
이랑이 한 번만 봐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게 자비란 없었다.
내 방에서 얼른 나가기나 해, 이 작은 똥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