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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00)화 (100/167)

100.

“아리야.”

뭐지, 악몽인가? 며칠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창문 사이로 싱그러운 이랑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저번과 같이 꽃받침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늑대 귀가 오늘따라 쫑긋 솟아 있었다.

……틀림없어, 이건 악몽이야.

꿈이면 빨리 깨어나길 기도하며 애써 이랑을 외면했는데, 불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현실임을 자각해버렸다.

“대체 왜 아침부터 내 방 창문에 있는 거야?”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눈을 접으며 환히 웃었다.

“보고 싶어서.”

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멈칫했다.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이랑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나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싱긋, 예의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응, 안 보고 싶었어.”

“아쉽네.”

애초에 아침부터 남의 창문에 있으면 누가 반겨주냐고, 이랑.

이랑이 아쉬움에 꽃받침을 내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랑 산책 가지 않을래?”

“응, 않을래.”

“날씨가 너무 좋은데?”

이랑이 밖을 가리키며 미소지었다. 그 순간,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한동안 나와 이랑의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하늘도 우리를 방해하네.”

정적을 깬 건 이랑의 한탄 섞인 읊조림이었다.

“들어가도 돼?”

쏟아지는 비를 보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비가 저리 쏟아지는데. 매몰차게 내쫓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고마워.”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창문을 닫으려는데, 동시에 이랑이 재빠르게 좁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이랑과 부딪혔다.

“어…… 어?”

아니, 왜 거기로 들어와!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던 이랑 탓에 나와 그는 나란히 바닥에 엎어졌다.

넘어지기 직전,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러자, 코앞에 보이는 이랑의 얼굴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 다쳤어?”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이랑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싱그러운 황금빛 눈동자, 예쁜 회색빛 머리칼, 옅은 숨결까지 모든 게 새롭게 느껴졌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상황을 파악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응?”

이랑 또한 현 상황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응……. 응?”

나는 이랑의 양 볼을 한 손으로 잡았다. 부드러운 그의 피부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감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대체 왜 멀쩡한 문을 두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편이 빠르니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이랑이 얼굴을 찡그리며 진지하게 답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무엇이 이상하냐는 듯한 이랑의 표정은 나를 열 받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부드럽게 이랑의 멱살을 잡았다.

……때릴까?

싸우면 내가 질까?

“왜 내 옷을 잡는 거야?”

이랑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태평한 그의 물음에 한마디 하려 그를 올려다보다, 붉게 물든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대체?

이랑의 반응에 한마디 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에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놀란 표정의 자하와 포포가 서 있었다.

바닥에 깨진 것은, 자하가 내온 것처럼 보이는 차와 다기였다.

자하는 넋이 나간 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포포가 나와 이랑을 손가락질하며 번갈아 보았다.

“두, 둘이 뭐 하는 거야?”

……충분히 오해받을 만한 자세긴 하다. 아니, 안 받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미리 말하지만, 오해받을 만한 그런 상황이 아니…….”

“아리야, 그건 이 손부터 풀고 말하는 게 좀 더 신빙성 있지 않을까?”

이랑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옷소매를 잡은 내 손을 가리켰다.

넌 뭘 잘했다고 웃어!

어쨌거나, 이랑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멱살을 잡았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자세도 바로 했다.

“이건 그냥 넘어진 거야. 절대 그런 상황 아니야…….”

“거기서 어떻게 넘어지면 그렇게 돼?”

포포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지만, 난 상당히 억울했다.

그거야, 이 늑대 놈이 창문으로 들어왔으니까!

“진짜라니까! 설명하자면 긴데,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일절 없었어!”

포포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랑을 가리켰다.

“그럼 쟤 얼굴은 왜 저렇게 빨간 건데……?”

“조용해. 이랑은 내가 웃기만 해도 빨개져.”

이랑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포포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포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털썩.

자하가 쓰러질 뻔한 걸 작은 체구의 포포가 열심히 받들고 있었다.

“무, 무거워, 고양아, 일어나!”

포포가 낑낑대며 자하를 불렀지만, 그는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리 님이, 우리 아리 님이, 저런 불경한 똥개랑…….”

아니라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포의 애달픈 외침에 겨우 자하가 정신을 차렸다. 이후, 방에 자리한 탁자에 앉아 이랑과 있었던 일에 대해 자하와 포포에게 대충 설명했다.

그에 자하가 크게 애통해하며 이랑을 노려보았다.

“아리 님 문 앞만 지키면 될 줄 알았는데……. 역시 이랑 님은 영악하기 그지없군요! 제 철통 방어가 무서워서 그런 비겁한 수를!”

“고양아, 너 복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잖…….”

자하가 황급히 포포의 입을 막았다.

이내 입이 막힌 포포가 자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통 방어가 왜 맨날 손쉽게 뚫렸는지 알 것 같다.

뭐, 어쨌거나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다만…….

자하가 목을 가다듬고, 이랑을 툭툭 쳤다.

“암튼, 비도 그쳤으니 이제 나가주시지요. 이랑 님.”

쏴아아-

참고로 비는 한 번도 그친 적이 없었다. 자하의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이랑이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가리켰다.

“비가 저렇게 오는데?”

“글쎄요, 제 눈엔 너무 맑아 보입니다만.”

그때였다. 모두의 귀에 천둥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럼 네가 가.”

이랑의 말에 자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싫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아리 님과 단둘이서 다도를 즐길 예정이었다고요!”

우리가 언제 단둘이 다도를 즐겼다고 그래?

기가 차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하를 바라보는데, 포포가 자신을 가리키며 꼬리를 세웠다.

“야, 나는?”

“넌 당연히 쫓아낼 예정이었지.”

“이 나쁜 놈아.”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시녀가 새로 내온 차를 이랑이 따르고 있었다.

이랑은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따른 차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자, 아리야.”

향긋한 찻잎의 향에, 불편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이랑은 그런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자하가 포포와 말장난을 그만두고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아아, 아리 님! 이랑 님이 따른 차 마시지 마세요, 부정 타요!”

“시끄러워.”

이랑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게 보였다. 자하는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하의 저 용기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랑이 더 높은 신수인데.

흐음…….

뭐, 언제는 자하가 이해된 적이 있기나 했는가.

“그러고 보니 이랑 님, 하원 님과 수업할 시간이 한참 지나지 않았습니까?”

“조용해.”

뭐야, 이랑. 농땡이 치고 여기 온 거였어?

“비 왔으니까 수업은 취소야.”

이랑이 단호히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누군가가 거세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누가 그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문 앞에는 회의 이후 본 적이 없던 하원이 서 있었다.

하원이 무표정으로 이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이랑이 입에 넣었던 차를 도로 뱉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알았대?”

“서쪽 땅의 도련님이 갈 곳이야 뻔하지.”

그의 짙은 남색 눈동자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화날 만도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원을 응원했다. 하원은 그런 내 응원을 안 건지 당장이라도 이랑을 끌고 갈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원, 비도 오는데 오늘은 좀 쉬는 게…….”

“난 비 오는 날 집중이 더 잘 되는데.”

하원은 수달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것보다 하원이 수업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곧 죽어도 싫어할 것 같았는데.

이랑을 제외한 모든 이는 평온히 하원과 이랑의 대화를 감상했다.

“뭐해? 안 일어나고?”

하원이 이랑을 노려보며 말하자, 이랑이 일어나려던 몸을 멈칫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내 이랑이 내 방을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이 멈췄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턱을 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기서 수업하는 게 어때? 차와 다과도 준비돼있고, 괜찮지 않아?”

이랑의 발언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랑이 일어나자 신나하던 자하의 표정 또한 급격하게 썩어들어갔다.

누구 맘대로?

하원이 이랑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힐끗, 한번 보았다.

“흠…….”

“비 오는데 굳이 자리를 옮겨야 할까? 나 서책도 준비해왔어.”

도대체 언제,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서책이 정말로 이랑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번 한 번만 그러도록 하지.”

아니, 내 방인데 왜 둘이서 결정하는 거야?

나는 둘의 대화에 상당히 어이없었다. 주객전도도 정도가 있지, 이건 도저히 용납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나가, 이놈들아.

“이랑, 하원, 여기는 내 방이야!”

“오늘 배울 게 뭐였더라…….”

나의 외침을 무시한 채, 이랑이 서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히 괘씸했다.

이랑, 너 괘씸죄 추가…….

“아, 찾았다. 신수의 탄생과 죽음.”

어……?

조금, 아니, 상당히 관심이 가는 내용인데……?

신수의 탄생과 죽음. 은월의 수업에서 배운 적 없는 내용이었다. 은월의 수업은 내게 신수의 힘을 가르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외엔 기본적인 것만 알려주었으니까.

“나 여기서 수업해도 돼, 아리야?”

자하가 눈짓으로 절대 반대를 외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미 호기심이 생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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