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포포와 나는 바로 청화관에 가려 했지만, 자하의 만류로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은월을 만날 수 있었다. 은월과 나, 그리고 포포는 수업을 위해 정자에 앉아 있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은월, 혹시 구슬의 힘 중에 다른 신수를 변하게 하는 힘이 있어?”
포포가 변한 것처럼……?
뒷말은 일부러 삼켰다.
은월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래? 아니면, 구슬이랑 멀어지면 아프다던가…….”
“처음 듣는 얘기야.”
단호한 그의 대답에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왜?”
은월이 턱을 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엔 장난기와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애써 그의 눈빛을 피하려 했건만, 실패했다.
“벼, 별일 아니야.”
“흐음……. 내가 알면 하늘이 스물두 쪽으로 갈라지기라도 해?”
“…….”
“그럼 별일이지 않을까.”
그의 말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었지, 참…….
쥐구멍 없나……? 나 좀 들어가게.
애석하게도 내가 숨을 수 있는 구멍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평소엔 다과 먹느라 바쁜 포포가 귀를 세우고 있는 걸 보면 너랑 포포의 일인 건 확실한데.”
……눈치 백 단이다. 아니, 관찰력과 머리가 좋은 건가?
포포가 눈치를 보며 다과 하나를 집었다.
이미 늦었어, 뽀뽀…….
어쩔 수 없이 포포가 겪었던 모든 일을 은월에게 털어놓았다. 설명을 들은 은월은, 차분하게 나와 포포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거군.”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
“아니.”
너무나도 단호한 은월의 대답에 다시 한번 입이 닫혔다.
“아까도 말했지만, 처음 듣는 얘기란 말이지.”
그는 사법관이다. 가장 신국의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런 은월마저 들은 적 없는 일이라니……. 대체 어디를 가야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올 때가 됐는데.”
“응? 뭐가?”
“산.”
산?
그때였다. 은월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누군가가 정자의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산이잖아……?
은월의 수행원인 산. 하지만 청아가 은월의 업무는 대부분 도맡은 지금, 산은 비천의 업무를 돕는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산이 여기에……?
“은월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월에게 인사를 하는 산은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은월은 인사하는 산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결했습니다.”
자결?
산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막을 틈이 없었습니다. 마치 주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 망설임 없이 그는 입안에 숨겨둔 독약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몇 초도 되지 않아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자결이라……. 비천이 수를 쓴 건지, 아니면 그 뒤에 또 다른 이가 있는 건지.”
비천이라는 말에 저번에 보았던 흑색 도롱뇽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설마 그 도롱뇽이……?
“보고가 늦어 죄송합니다. 그 후 일을 수습하고 비천 님께서 제게 내린 명을 수행하느라……. 정말 면목 없습니다.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았어야 했는데…….”
은월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는 듯했다.
“……애초에, 비천이 날 방해한 것이 아닌 건가.”
은월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작게 읊조렸다.
“네 탓이 아니다, 산. 정말 주술이 걸려 있었다면, 방도가 없었으니.”
“하지만…….”
“그보다, 비천이 네게 내린 명이라는 것이 뭐지?”
“아, 그것이…….”
은월의 물음에 산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심히 걱정되는 듯했다.
……자리를 비켜줘야 하나.
산의 눈치에 못 이겨, 자리를 떠나려는데, 은월이 그런 내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괜찮아.”
은월의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의 온기가 내게 전해졌다.
산은 잠시간 내 눈치를 살피더니,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상한 명을 내리셨습니다.”
“어떤?”
“평소였다면 은월 님이나, 아리 님에 관한 뒷조사였는데……. 이번에는…….”
잠시 망설이다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은월 님이 보유한 흑기에 관한 자료들을 몰래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은월과 나의 눈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갑자기 왜 비천이 흑기에 관심을 보이는 거지?
분명 비천이 갑자기 흑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비천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절대 주면 안 될 것 같…….
“기꺼이 주지.”
응?
잘못 들었나 싶어 은월을 바라보는데, 그가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
은월이 휘파람을 부르자, 매의 모습을 한 자타가 정자로 날아왔다. 이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타가 은월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 나도 나중에 저거 써먹어야겠다.
“부르셨습니까, 은월 님.”
“산에게 흑기와 관련된 자료를 넘겨줘.”
“흑기에 관한 자료를요? ……알겠습니다.”
자타는 은월의 명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산 님.”
“잠깐만.”
정자를 나서려는 자타와 산을 저지한 건 은월이었다.
“뭐 잊은 게 있을 텐데.”
은월의 말에 자타가 무언가 잊고 있었다는 듯 움찔했다.
자타는 곧바로 소매를 뒤지더니, 두 개의 서신을 각각 은월과 내게 내밀었다.
“수고했어.”
은월이 만족스럽다는 듯 서신을 받아들었다.
은월을 따라 엉겁결에 서신을 받아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타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란이 아리 님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아, 잊고 있었다.
저번에 노군의 저택에 갔을 때, 몰래 란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나래의 행적을 가끔 내게 알려달라는 것. 아무리 그녀가 지금은 죄인 처지라지만, 언제고 또 흑기와 손을 잡을지 모르니까.
감시해서 나쁜 것은 없었다.
“란이라면, 그 너구리?”
포포가 란이라는 소리에 내 옆에 찰싹 붙어, 귀를 세웠다.
싸운 정이라도 든 건지, 란이 어지간히도 반가운 모양이다.
“전해줘서 고마워, 자타. 란에게도 나중에 고맙다고 전해줄 수 있을까?”
“당연한 말씀을. 명 받들겠습니다.”
이후 자타와 산이 나와 은월에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아까 말한 자료를 가지러 간 거겠지.
“빨리 뜯어보자, 아리야!”
포포의 닦달에 금색 자수가 박힌 고급스러운 봉투가 담긴 서신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그곳엔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포포가 내 옆에 붙어서 나와 같이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포포, 너, 글 못 읽잖아. 왜 읽는 척해.
“뭔 내용이야……?”
그럼 그렇지, 포포는 얼마 가지 않아 내게 설명해달라는 눈길을 보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시시콜콜한 안부 인사와 나래의 행적에 관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래의 행적 또한 지극히 평범했다. 여전히 자존심이 센 그녀는, 자주 란과 싸우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노군의 밑이니, 그럴 때마다 노군에게 교육을 받는 듯했다.
자존심이 센 나래이니, 굉장히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저번에 내게 막 대한 것에 대한 사과할 때도 꽤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았으니…….
란과의 마찰로 교육을 받는 건 그녀에게 크나큰 수치일 것이다.
다 읽은 서신을 다시 고운 봉투에 넣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은월은 아직 서신을 읽고 있었다.
누구에게 온 거지……?
잠시 은월이 서신을 마저 읽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가지 않아 은월이 다 읽은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누구한테 온 거야, 은월?”
“천강.”
아,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두루마리라고 생각했는데, 천강의 궁에서 온 서신이었구나.
은월의 반응을 보니, 안 좋은 소식인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내용이야?”
“남쪽 땅의 정치에 관한 거랑 쓸데없는 얘기.”
“쓸데없는 얘기?”
천강이 쓸데없는 사족을 붙일만한 신수는 아닌 거 같은데.
곧이어 은월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음에 답했다.
“천강의 즉위식이 곧 열린다나 뭐라나.”
……그거 좀 중요한 얘기지 않아?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난 관심 없어. 걔가 즉위식을 하든, 은퇴식을 하든. 내게는 쓸데없는 사족이지.”
……천강은 나름 은월을 아끼는 것 같던데.
천강이 은월을 계속 쫓아다녔다는 말이 떠올랐다. 당시 상황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난 원래 다른 신수의 사정 따윈 관심 없어. 그 신수가 뭘 하든, 이상할 정도로 궁금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사법관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다른 신수에게 관심이 없다고?
내가 아는 은월의 성격과 조금 다른 거 같은데…….
“그래서 신국의 신수들은 날 대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해. 냉정하다고도 하고.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나.”
그가 무심히 말했다.
그러고 보면 가끔 그런 얘기가 들려올 때가 있다.
은월이 냉정하고 무섭다는 이야기. 나는 그것을 과장된 소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은월을 만나기 전, 그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내용이 많았지.
“나는 과장된 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 반대야. 오히려 소문보다 다른 신수에게 관심이 없을걸.”
“하지만 내가 본 은월은 따뜻한 신수인걸?”
내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언제나 그랬듯, 참 예뻤다.
“네게만 그런 거야, 아리야.”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일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왜?”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틈을 타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 근데 은월, 비천한테 쉽게 자료를 넘겨줘도 돼?”
“상관없어. 어차피 저걸 넘겨도 비천은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래도…….”
“비천이 내 자료를 탐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응?”
비천이 은월의 자료를…….
아, 은월의 의도가 뭔지 알 것 같다.
“비천은 자신의 앞밖에 못 본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런 비천이 산에게 흑기의 자료를 가져오라 했다는 건…….”
나의 대답에 은월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천이 지금 흑기한테 눈 돌아갔다는 거지.”
“그렇다는 건, 지금 비천은.”
은월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못 하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단 거야.”
비천이 흑기에 관한 정보를 캐려는 게 우리에게 위협될 일은 아니라는 거구나.
자료를 넘기면서 은월은 비천의 반응을 살필 테고.
그리고 은월이야, 그런 자료들은 이미 수백 번도 더 살펴본 후일 테니, 우리가 갖는 손해는 하나도 없었다.
비천과 흑기라…….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일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