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날이 밝자마자 나는 정자로 끌려와, 은월에게 수업을 받았다. 처음엔 청화관에서의 일 탓에 집중이 안 됐지만, 그가 의연하게 수업을 진행한 덕분에 나 또한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예전엔 신국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르쳐주었던 그였지만, 이젠 신력과 구슬을 다루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 듯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은월이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수업 중 가장 빨리 마치는 것이었다.
이, 이렇게 빨리?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은월, 너무 일찍 끝난 거 아니야?”
“나머진 네가 이해하고, 느껴야 할 문제니까. 내가 가르칠 건 없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은월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이 이상은 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이해해야 하니까.
그래도 이대로 가버리는 건…….
“바빠?”
“일이 좀 많긴 하지.”
하긴, 아무리 은월이라도 남쪽 땅 일을 해결하느라 사법관 일을 미뤄놓은 게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그의 상황을 이해한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자리에 앉더니, 턱을 괴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왜?”
은월이 부드럽게 내게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월, 넌 힘들지 않아?”
나의 물음에 은월이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갑자기 뻘쭘해진 나는 황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남쪽 땅 일을 해결한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 힘들었을 것만 같아서…….
항상 은월은 쉼 없이 흘러가는 일상을 보내니까.
남쪽 땅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더욱이 나와의 수업을 빨리 마치기 위해서 무리하면서 일을 마쳤겠지.
“아무튼, 조금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가 살짝 놀란 듯, 멈칫했다. 이내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신비롭고 오묘한 회색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마치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리, 넌 항상 날 걱정하네.”
“응?”
“유일해.”
“으, 응?”
은월이 눈을 휘며 미소지었다. 그의 고운 미소에 나는 계속해서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신국의 신수들 중, 날 걱정하는 이는 네가 유일하다고.”
그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그의 큰 손이,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부드럽네.”
……네 손이 더 부드러워, 은월.
애써 상기된 볼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
“오늘은 다과가 잔뜩 남았네요.”
자하가 정자에 놓인 다과 접시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에 나도 자하를 따라 다과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게…… 응?”
다과가 잔뜩 남았다라……. 아, 그래, 포포!
그러고 보니 은월과 수업을 할 때 내오는 다과는 전부 포포의 입속으로 들어갔었다. 그렇기에, 다과가 많이 남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포포가 출석을 하지 않았으니, 다과가 잔뜩 남았던 것이었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네? 뭘요?”
자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나는 지금 그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여유가 없었다.
“아, 아리 님! 또 어디 가세요!”
“좀 이따 봐, 자하!”
“아, 아리 님, 저희 방금 만났……, 아리 님?”
나는 자하의 볼멘소리를 무시한 채 정자에서 벗어나 포포의 방으로 향했다.
“뽀뽀!”
도착하기 무섭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에 잠시 놀란 포포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눈을 굴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찰나의 순간 그의 꼬리가 바짝 솟아올랐던 것을 이미 봐버렸다.
“큼큼, 무, 무슨 일이야?”
포포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어제의 일로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했다.
“너와 얘기하고 싶어서 왔어.”
포포의 귀가 두어 번 팔랑였다. 승낙의 의미로 간주한 나는, 포포의 옆에 앉았다.
“생각해봤어. 네가 나한테 화낸 이유에 대해서.”
포포는 내게 얼굴을 비추지 않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잘 안 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지?”
포포의 귀가 다시 두어 번 팔랑였다. 포포가 천천히 내게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아리야…….”
그가 힘겹게 울음을 참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응, 포포, 말해줘.”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의 귀가 축, 처졌다. 그에 나는 소매에서 약이 든 주머니를 포포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 약에 관해서 설명하는 건 어떨까?”
포포가 약 주머니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아팠던 건, 너랑 싸운 날…… 그러니까, 청화관에서 쓰러진 나를 네가 발견한 날이었어.”
“응.”
“너를 만나고,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닌데, 그중 하나가 너와 떨어지면 아프다는 거야.”
“나랑 떨어지면 아프다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포포가 아픈 이유가, 나 때문이었다니?
“응. 이상하지? 나도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어. 그런데 정말 너랑 떨어지면 약 없이는 버틸 수가 없었어.”
포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영아는, 뭐라고 했어?”
“영아라면…… 그 약방 신수를 말하는 거지? 그 신수는 내가 아픈 이유에 대해 모른다고 했어. 그래서 주기적으로 약을 전해주는 거고. 저번에 형님에게도 약을 전해 받은 적이 있어.”
포포가 아팠을 때, 분명 영아도 처음 보는 일이라며 놀랐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도 영아가 약을 주기적으로 챙겨줬었구나…….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너를 만나고 달라진 것이 많았어.”
“응?”
포포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내가 싸부를 쫓아다닌 건 맞지만,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청화관에 들어갈 수도 없었어. 그런데……. 너를 만나고 모든 게 가능해진 거야.”
“나를 만나고…… 가능해졌다고?”
“응. 처음엔 너랑 같이 들어가서 그런 줄 몰랐어. 그런데, 너랑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면 청화관에 나 혼자 들어갈 수가 없었어.”
아, 그래서 어제 청화관에 혼자 가라는 말에 발끈했던 거구나.
……포포는 혼자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제야 어제 포포가 내게 화를 낸 이유가 이해됐다. 아무리 내가 포포의 상황을 몰랐었다지만, 그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테니.
“……미안해.”
“응?”
“미안해, 포포,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 그리고, 네 얘기를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포포가 말한 이야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상당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포포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게 먼저였다.
포포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내가 좀 더 챙겨줘야 했는데……. 그의 상황과 입장을 헤아려주지 못했다.
나의 사과를 들은 포포는, 고개를 저었다.
“아리야, 나는…….”
그의 눈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웠어.”
그의 귀가 축, 처졌다. 나는 서럽게 울고 있는 포포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포포의 등을 토닥였다.
“나, 또 혼자가 될까 봐, 아리, 네가 나 버리면, 나는 정말 혼자니까…….”
“포포…….”
“나는, 동족에게도 버림받았으니까.”
눈물을 삼키려 애쓰던 포포가, 이제는 아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포포의 눈물에 내 저고리가 흥건해졌지만 개의치 않은 채 포포를 다독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포포를 생각하니 나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서웠어, 아리야…… 흐어엉.”
우느라 힘겨워 보이는 포포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울던 포포는 갑자기 내 품에서 쏙, 빠져나와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손수건으로 코도 풀고, 다리로 턱도 긁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암튼 그랬어.”
방금 내 품 안에서 울었던 게 부끄러웠던 것인지, 포포가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참고로 나 안 울었어.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뿐이야.”
대체 얼마나 큰 먼지가 들어가야…….
터무니없이 귀여운 포포의 거짓말이었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긴 걸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포포는 나와 떨어지면 불안정해진다는 것이다. 청화관에 들어갈 수도 없고, 신력이 흐트러져 약을 복용해야 한다.
어째서 포포에게만 그런 증상이 나타난 거지?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있어서? 아니다. 포포의 말에 의하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고 하니까.
대체 무엇 때문에…….
설마, 구슬 때문인가?
일리가 있다. 구슬이 다른 이에게 하사된 건 처음이라고 했었으니까.
“아리야?”
“어, 어?”
“무슨 생각해?”
“그냥. 무엇 때문에 네가 바뀐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
영아도 포포가 아픈 원인을 몰랐던 걸 보면, 아무도 모르는 걸 수도.
하지만, 그렇다고 구슬 탓으로 치부하고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있다.
구슬 탓이라고 하더라도, 어째서 포포에게만 이런 증상이 일어나는 거지?
계속되는 물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포포와 머리를 맞대고 있어 봐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포포, 이거 나 말고 누구한테 말했어?”
“음…….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거 같은데……. 영아라는 신수는 내가 아픈 것만 알고, 너랑 떨어지면 아프다는 건 모를 거야, 아마.”
갑자기 포포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꼬리를 세웠다.
“아, 형님이 저번에 약을 주실 때, 말한 적 있어!”
대체 백령과는 언제 그렇게 대화를 나눴던 거야?
저런 요망한 여우 같으니라고.
“그때 백령이 뭐라 했어?”
나의 물음에 포포가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전혀. 형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어. 아마 형님도 모르시는 거 아닐까?”
백령이 모르는 일이라면, 미호에게 물어봤자 아무런 수확이 없을 것 같았다.
포포가 이렇게 된 이유……. 은월이나 하원이라면 뭔가를 알지도 몰라.
“은월한테 가볼까…….”
“싸부한테 가는 거야?! 싸부, 돌아왔어?!”
눈물을 글썽이던 포포는 온데간데없고, 그는 신나서 꼬리를 양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그뿐이랴, 충혈되었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 빛나는 탓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저, 저런 간사한 여우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