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날, 회의에서 내가 자리를 비운 후 일어난 일들을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백령과 비천, 그리고 미호. 그들 사이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고 갔는지.
백령은 내가 아닌 포포인 걸 눈치채고 시간을 끌어주었다는 것, 감정적으로 변한 비천이 백령과 미호를 도발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백령과 시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을.
둘이 연인 사이라고 가정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항상 백령이 움직이는 건 시호라는 신수에 관한 일이었기도 하고, 하원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저번에 네게 시호에 대해 알려주며 나는 몇 가지 사실만 알고 있다고 말했었지?”
“응.”
“그중 하나가 시호와 백령이 연인관계였다는 거야. 나도 정확히 알고 있던 게 아니라서, 그 당시 네게 말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막상 이랑을 통해 들었을 때, 얼떨떨함을 감출 수 없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이랑, 그런데 예전에 시호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신수가 없었다고 했잖아.”
“응. 그랬었지. 그런데, 서로를 만나고 많이 변했다고 들었어. 시호도, 백령도.”
“……그랬구나.”
백령은, 죽은 자신의 연인과 똑 닮은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한 걸까…….
원망했을까, 아니면, 나를 통해 시호를 그리워했을까.
어느 쪽이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령이 자꾸만 날 떠나보내려 했던 이유는,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너무 슬펐다.
내 표정을 힐끔, 살핀 이랑이 걱정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나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속에 감춰둔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랑, 시호는 왜 죽은 거야?”
“그건…….”
이랑이 대답을 망설였다.
내게 알리기를 꺼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무거운 주제라, 감히 입을 함부로 열 수 없는 것 같았다.
“혹시, 흑기랑 연관이 되어있는 거야?”
“…….”
이랑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에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정자를 떠나려는 내 손목을 다시금 이랑이 잡았다.
“아리야.”
이랑의 황금빛 눈이 작게 흔들렸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마 아무도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할 거야. 당시 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더 할 뿐이지.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어.”
“배신?”
“그녀의 죽음에 흑기가 관여한 건 맞지만, 흑기 탓에 죽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시호도.”
이랑이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리야, 넌, 나를 포함한 신수들을 믿어?”
“뭐?”
“너도 알다시피, 네 땅의 주인 중 누군가가 흑기들과 내통하고 있어. 어쩌면 주인뿐만 아니라 다른 신수도 가담하고 있을지도 몰라. 어떤 신수는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이랑이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아리, 넌 신수를 있는 그대로 보니까.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의 순수한 그 푸른 눈망울이 너무 좋았어.”
“이랑, 나는…….”
“그래서 난 네게 반한 거야.”
이랑이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길이 이토록 따스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이랑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평소처럼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아무도 믿지 마, 아리야. 그 누구라도.”
그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누구보다 더 부드럽고 자상한 음성으로.
“이랑, 그 누군가가 너라도?”
밀착된 그를 살짝 밀어낸 후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랑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이랑과의 대화 이후 포포와 이야기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머릿속만 그저 복잡할 뿐.
“어려워…….”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빛이 창틈에서 흘러들어왔다.
마치, 백령과 처음 만난 그날처럼.
창을 열어 멍하니 달을 바라보다, 갑자기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흠칫했다.
이건…….
백령의 기운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기운.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의 기운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기운을 따라 도착한 곳은 익숙한 정자였다. 은월의 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내가 자주 쉬던 그 정자. 백령은 그곳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옆모습은 황홀하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은발과 푸른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다.
정자의 뒤편에 있는 연못의 물고기들조차 백령을 보려는 듯, 정자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에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흐르는 물소리에 감성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나는 백령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해보니 너무 무턱대고 나온 것 같다. 백령에게 큰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잠시 고민하다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너무나도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가는 것이냐.”
……들킨 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닌 건가?
백령의 혼잣말로 치부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게 하는 말이다, 아리.”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엔 내가 있는 곳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백령 또한 내 기운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을 거란 것을.
……나 바보인가 봐.
결국, 심호흡을 가다듬고 백령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평소와는 달리 조금 흐트러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은 것이냐.”
백령이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야밤에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신경이 쓰인 것 같았다.
“그냥, 달빛이 너무 예뻐서…….”
나의 대답에 백령은 잠시 사색에 잠긴 듯하더니, 한동안 날 천천히 응시했다.
“혹, 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라도 있는 것이냐.”
그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어. 굳이 고르자면, 이랑이 궁에 있다는 정도……?”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백령이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실소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백령, 너는……?”
그래서일까, 나는 백령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백령, 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
나의 물음에 정자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나의 물음에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특유의 덤덤함을 내비치며 나를 보고 있을 뿐.
그럼에도 백령의 신성하고도 아름다운 푸른 눈망울이 슬퍼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이겠지.
“백령, 내 생일을 기념하던 축제 날, 넌 내게 신국을 떠나도록 도와주겠다 했어.”
“……그래.”
“난 네게, 어떤 존재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히 그에게 물었다. 여태껏 몇 번이고 그에게 물을 수 있었던 질문이었지만, 무서워서 꺼낼 수 없었었다.
하지만, 왜인지 지금 꼭 물어보고 싶었다.
“내게 넌…….”
백령이 좀처럼 쉽게 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지켜야 할 존재다.”
“지켜야…… 할 존재?”
고심 끝에 나온 대답에, 나는 시원하다는 느낌이 아닌, 의문이 먼저 들었다.
지켜야 할 존재인 나를, 왜…….
낯선 땅에, 낯선 이들과 낯선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백령, 네 생각엔 나를 지키는 방법인 거야?
“난, 떠나고 싶지 않아.”
어째서인지,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나는, 너에게서도, 신국에서도, 떠나고 싶지 않아, 백령.”
잠시간 백령과 나의 사이에는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태껏 한 번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던 백령이, 조금은 위태로워 보였다.
이것 또한 나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네 뜻이 그럴 줄 몰랐군…….”
그가 작게 되뇌었다.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넌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백령?”
“…….”
백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령, 나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그의 모습을 본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정자에서 벗어났다.
***
아리가 떠난 후, 백령은 한동안 정자에 머무르며 사색에 잠겼다. 그는 아리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은월이 아리의 생일 축제 날, 자신을 찾아왔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백령과 은월은 처음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이어갔었다.
“예전에 그랬지. 아리는 네가 보호해야 할 존재라고.”
“그래.”
“이러는 게, 아리를 보호하는 거라……, 난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널 이해시켜야 할 이유는 없는데.”
백령은 이후,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나가주었으면 좋겠군.”
백령의 말에 은월이 눈을 곱게 접으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재수 없는 놈.”
백령이 아리를 떠나보내려 한 건 아리가 싫어서도, 진정으로 떠났으면 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리의 말을 들은 후에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느 쪽이 맞는 길인지.
아리를 지키기 위해서, 백령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러겠노라고 다짐했으니까.
“내게, 쉬운 길은 주지 않는구나.”
백령이 달을 보며 읊조렸다.
‘하긴, 그게 내가 받을 벌인가.’
그가 체념한 듯 숨을 삼켰다. 달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난 네게 어떤 존재야?”
“난 네게 어떤 신수야, 백령?”
아리와 그녀의 목소리가 겹쳐 백령의 머릿속을 울렸다.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와 그의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
그가 정자 옆에 놓인 수국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잠시간 수국을 바라보며 백령은 사색에 잠겼다.
“내겐…….”
백령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한 것처럼.
백령이 손에 들고 있던 수국을 미련 없이 연못에 던졌다. 이내 수국이 떨어지고, 주변으로 잔물결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