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저번에 보낸 서한.”
서한?
아, 그동안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자타를 시켜 은월에게 서신을 보냈고, 아직 그 답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읽었어?”
“응.”
근데 답장을 안 했다는 거야?
은월의 뻔뻔한 대답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런 내 표정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듯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남은 진지한데, 뭘 잘했다고 웃어!
“그래, 은월. 잘 돌아왔고, 우린 다음 생에 보든가 말든가 하자.”
나의 말에 은월이 실소를 터트렸다.
어쭈, 웃어?
분한 마음에 그를 노려보았다.
“은월, 내가 얼마나……!”
……답장을 기다렸는데.
평소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항상 자타가 서한들을 들고 돌아올 때면 내 것이 있나 없나 확인했었다.
근데 보고도 답장을 안 했다 이거지? 이런 불한당 같으니라고.
……때릴까?
억울한 마음에 무게를 실어 살짝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데,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어? 여기서 넘어지면 진짜 큰일인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음성만이 귓가에 들려올 뿐.
“많이 화났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아, 아니야……!”
은월이 기우는 내 몸을 재빠르게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고, 덤으로 은월과 얼굴이 가까워졌다.
“난 이번 생에도 아리 널 볼 일이 많이 남은 거 같은데.”
그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급히 중심을 잡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 갈 거야.”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등을 돌렸다.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자, 은월이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았다.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야.”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다시 돌아보았다. 그의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만나서 대답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피, 핑계 대지 마!”
“그럼 내 대답 안 들어도 돼?”
은월의 물음에 나는 잠시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반칙이야.”
나의 대답을 들은 은월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아리야.”
다시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말에 한동안 무슨 말을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우물쭈물했다.
근데 잠깐만, ‘나도’라니?
“내, 내가 서한에다가 보고 싶다고 적었어?”
“응.”
은월에게 썼던 서한을 떠올렸다. 내용이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진짜 그런 내용을 썼다고……? 미쳤었나?
설마, 뽀뽀가 전해달라는 말을 잘못 적은 건가?
“아리야……?”
잠시간 멍을 때리던 내게, 은월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이 오롯이 날 비추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 눈을 계속 봐…….”
“응? 뭐가?”
“은월, 나 급한 일이 생긴 거 같아.”
물론 그런 일 따윈 추호도 없다. 한가로운 대낮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없어도 있어야만 했다.
“급한 일? 그게 뭔데?”
은월이 즐겁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로 날 내려다보았다.
“이, 있어, 그런 게.”
“난 알면 안 되는 건가?”
“응, 은월이 알면 하늘이 스물두 쪽으로 갈라진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아 빠르게 궁으로 향했다. 혹여나 은월이 쫓아올까, 한 번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스물두 쪽이라……. 그건 좀 너무한데?”
그래서 나는 그런 은월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치며 흘리는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
“아리, 너 어디 갔었어!”
청화관에서 돌아온 후, 꽁무니 빠지게 나를 찾아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포포와 마주쳤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저 짧은 다리로 날 찾아다니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어, 어? 왜 웃어!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그냥.”
“치. 근데 너 어디 아파? 아까부터 얼굴이 빨개.”
아, 아까 달아올랐던 볼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아냐, 괜찮아.”
“흐응?”
괜찮다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포포는 내 몸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정말 아무렇지 않자 시선을 거두었다.
“아, 싸부 소식은 들은 거 없어? 전에 금방 돌아온다고 그랬잖아.”
은월의 얘기를 하는 포포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쓸데없이 촉 좋은 여우 같으니라고.
평소였다면 은월이 청화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의 나는 흥분한 포포에게 붙잡혀 은월을 또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 아니. 만날 수 없다.
“아리, 너도 몰라? 청화관에 한번 가볼까?”
“으응……? 아니. 오늘은 하원이나 보러 갈까 싶은데. 물어볼 게 있어서.”
“그 수달? 흐음……. 하지만 요즈음, 허탕만 쳤잖아?”
포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포포의 말대로 회의 이후 하원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그를 찾아갔지만, 그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형님한테는 왜 요즘 안 가?”
“아, 백령은 요즘 자주 궁을 비워서…….”
요즘 백령의 얼굴을 보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백령이 항상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여노와 자하에게 그 이유에 관해 물었지만, 전혀 수확이 없었다.
“은월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청화관에 혼자 가봐도 돼.”
포포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안 돼. 너랑 안 가면 안 된단 말이야.”
“뽀뽀, 어린애야? 청화관 정도는 혼자 가도 충분…….”
“그런 게 아니야!”
포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어찌나 그 소리가 컸던지.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하인들도 깜짝 놀라 포포를 쳐다보았다.
“……아리, 넌 아무것도 몰라.”
그의 음성이 떨렸다. 마치 내가 원망스럽기라도 한 듯이.
당황한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자리를 떠나는 포포를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포포가 갑자기 왜 저러지?
여태껏 한 번도 이렇게 진지하게 화를 내는 포포를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은월과 있었던 일도 까먹을 정도로 멍해졌다.
내가 포포한테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오늘 포포와 나눈 대화는 지극히 평범했다. 평소에도 자주 나누던 대화. 하지만 오늘은 무엇 때문인지 포포가 내게 화를 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을 들어보아야 했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포포가 향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뗐다.
“아리 님! 여기 있으셨군요.”
포포에게 가던 도중, 자하가 나타났다.
“포포요? 아까 본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부터 아리 님은 다시 수업을 받아야 해요.”
“응? 뭐라고?”
“은월 님과의 수업 말이에요.”
“……뭐?”
은월은 서쪽 땅에서 오늘 돌아왔다. 그런데, 곧바로 수업을 시작한다고?
내 반응이 예상과 달랐는지, 자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표정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아리 님?”
“자하, 수업은 내일부터 하면 안 돼?”
“내일부터요?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왜냐니, 오늘은 은월을 볼 자신이 없거니와, 포포와의 일을 해결해야 하니까.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대답을 망설이며 자하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 그래도 남쪽 땅 일로 은월 님이 자리를 비우시느라 진도가 늦었잖아요. 아리 님 곧 있으면 성체가 되실 텐데, 그전까진 구슬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미호 님께서…….”
“아리, 오늘 수업받기 싫어?”
자하는 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표정이 굳어졌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이랑이 특유의 해맑은 눈웃음을 지으며 나와 자하의 사이에 끼어든 탓이었다.
이랑은 혼자 들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두루마리들을 품에 안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로 인해 상황을 파악한 자하가 눈살을 찌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랑 님, 제가 분명 아리 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자하, 넌 이거 백령한테 좀 갖다 줘. 급한 거야.”
이랑이 품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들을 자하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두루마리들을 건네받은 자하는 두루마리들 탓에 움직이기 버거워 보였다.
“이, 이랑 님, 이건 하인들에게 시켜야지, 왜 저에게……!”
“나한텐 너도 하인이야. 우린 사랑의 도피를 떠나볼까, 아리야?”
꿍얼거리는 자하의 말을 무시한 이랑이 곧바로 내 손을 낚아챘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당황한 나는 그를 따라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랑 님 미쳤어요? 감히 아리 님을……! 아리 니이이이이임!”
멀리서 자하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랑이 나를 끌고 간 곳은 신수들의 발길의 끊긴 정자였다. 백령의 궁 구석진 곳에 있는 탓에,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하고 조용했지만,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스산했다.
얘는 왜 맨날 나를 데리고 도망을 치는 거야……?
“자하가 너 미쳤냐고 묻던데.”
자하의 후환이 두렵지 않아?
이랑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긴, 이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내일부턴 서로 바빠서 이렇게 얘기할 시간도 많지 않을 텐데, 나한테 시간 좀 써줄 수도 있지 않아?”
자하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나 또한 그렇고.
“난 갈래.”
지금은 맘 편하게 작은 똥개와 수다나 떨 시간이 없다. 가서 포포와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돌아서서 자리를 떠나려 하자, 이랑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전해줄 물건이 있어.”
“나한테?”
“아니, 그 하급 여우한테.”
이랑이 소매에서 보라색 주머니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주머니의 모양과 박힌 수를 살펴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문양. 잠시간 문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깨달았다. 이건 서화원의 문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약?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포포가 약에 관해 얘기했었지.
“영아가 전해주라고 하더라고.”
“이걸 왜 이제…….”
나의 물음에 이랑은 그저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빌미로 나랑 만나려고 했던 거였어. 이런 작은 똥개 같으니라고.
“백령은 여전히 안 보이던데, 아리 너도 행방을 몰라?”
“응.”
“그때 비천이 한 말 때문에 짜증이 좀 났나 보네.”
“비천?”
회의 때 일을 말하는 건가? 포포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비천이 백령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고 하긴 했는데.
……그리고, ‘시호’ 얘기가 나왔었다고.
포포는 당시 경황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기억 못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랑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겠지.
“아, 넌 그때 없었구나. 그, 하급 여우가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알려줘,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랑이 정자에 가서 앉았다. 그가 자신이 앉은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나는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은 뒤, 그의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