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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95)화 (95/167)

95.

회의를 마치고 몇 주가 지났다.

아침부터 백령의 궁은 시끌벅적했다. 몇몇 하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재잘대기 바빴고, 또 다른 몇몇 하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옮기기 바빴다.

하인들이 바쁜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쪽 땅에서 마무리만 하고 곧 온다던 은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바쁜 진짜 이유는…….

“예쁜 아리야, 잘 잤어?”

그래, 이 녀석 때문이다.

어여쁘게 꽃받침을 하며 아침부터 내 창문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민, 이 작은 똥개, 이랑 말이다.

햇빛을 받은 이랑의 회색 머리가 예쁘게 빛났고, 싱그러운 황금색 눈은 반짝거리다 못해 눈이 부셨다.

완전한 성체가 된 그는 아직 앳된 티가 났지만,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이랑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넋이 나가다 못해 영혼까지 털려 있을 것이다.

“꿈이지?”

“나도 꿈만 같아.”

나의 물음에 이랑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고 쑥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럼 당장 내 꿈에서 나가.”

“하지만 꿈이 아닌걸?”

나도 알아, 이 작은 똥개 녀석아.

“그럼 내 눈 밖으로라도 나가.”

망설임 없이 이랑의 얼굴을 밀어낸 뒤, 창문을 닫았다. 창호지에 가려져 이랑의 얼굴이 더는 보이지 않고, 그의 그림자만 보였다.

이제야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창문 밖에서 이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얼굴 본 것만으로도 만족해, 조금 있다가 또 봐, 아리야.”

조금 있다가 또 보자고? 악몽인가? 그래, 차라리 악몽이면 좋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아리 님, 일어나셨어요?”

“아, 들어와, 여노.”

천천히 문이 열리고, 여노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방에 들어왔다.

여노는 경대 앞에 앉은 내 머리를 빗기며, 경대에 비추어진 내 표정을 힐끔힐끔 보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머, 아리 님, 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계세요? 아침부터 이랑 님이라도 왔다 간 것 같은 표정이신데요?”

“꽃받침하고 있더라.”

“……이랑 님이 이른 아침부터 자하 님의 철통 수비를 뚫고 아리 님을 보러 오셨군요.”

“……철통 수비?”

철통 수비가 무슨 하루아침만에 뚫려? 이건 철통이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하하…….”

떨떠름한 내 표정을 본 여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리 님께서는, 아니, 백령 님의 궁 모두가 대부분 반기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저희로선, 선택지가 없는 사안인걸요.”

“그건 맞아. 하원이 내민 조건이었으니까.”

하원이 내민 조건. 그 당시를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부분의 신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사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나지 못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백령과 미호의 서늘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화가 돌아간 모습을 본 은월은, 마지막 마무리를 짓겠다며 홀연히 사라졌고.

그렇게 회의장엔 백령과 미호, 그리고 나와 하원이 있었다.

미호는 하원을 어찌 바라볼지 몰라, 시선을 괜히 다른 데에다 두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 승낙했던 거야? 난 아리한테 그런 소리 못 들었었는데……. 어쨌거나, 제안을 받아들여줘서 고마…….”

하원은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웃기지 마, 네 말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난 그냥 뱀들의 뜻대로 되는 게 싫었을 뿐이야. 또, 교육자가 되는 대신 조건도 있어.”

그가 미호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며 내건 조건.

첫째, 하원이 어떻게 교육을 하든 그의 일에 관해서 누구도 간섭하지 않을 것.

둘째, 하원이 지명한 몇의 신수를 제외하고, 다른 신수는 하원 근처에도 오지 말 것.

셋째. 교육을 받을 작은 주인인 신수는, 하원이 있는 곳에 직접 와서 교육받을 것.

또한, 조건은 언제든지 하원의 요구에 따라 바꿀 수 있으며, 번복할 수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하원이 있는 곳은 이곳, 백령의 궁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즉, 백령의 궁에 주인 될 자가 온다는 말이고.

그 말은 즉, 이랑이라던가, 이랑이라던가, 이랑이라던가, 작은 똥개가 당분간 백령의 궁에 눌러앉게 된다는, 그런 끔찍한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백령과 미호는 그가 내민 조건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급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물론, 백령은 세 번째 조건을 듣고 한기 어린 푸른 눈으로 하원을 노려보았었다. 하원은 미호만 노려보느라 몰랐을 테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랑은 좋아서 펄쩍 뛰었다고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자하를 비롯한 백령 궁의 하인들은 미치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시간이 흘러, 바로 어젯밤, 마침내 이랑이 짐을 잔뜩 싸 들고 백령의 궁으로 들어와 버렸으니, 궁 내부는 그로 인해 아침부터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이랑의 얼굴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너무나도 각박한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땅 꺼지겠어요, 아리 님…….”

“차라리 땅이 꺼져서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면 좋을 것 같아.”

나의 말에 여노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한동안 치장에만 집중했다.

“여노, 굳이 아침마다 이렇게 힘을 들여 꾸며야 해?”

“아리 님도 이제 어엿한 숙녀신데,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랑 님도 전과는 달리 한껏 단장된 모습이셨죠?”

확실히 나는 전보다 더욱 성장했다. 구슬의 힘 덕분인지,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하고 있으니까. 특히 요즘은 성장이 더 빨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조금 이르긴 하지만, 성년식 얘기도 나오고 있으니까.

신수에겐 정해진 성장 시간이 없다라……. 구슬 덕분인지, 나 또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건 그렇지만…… 여노가 힘들까 봐 그러지. 매번 아침마다 이러는 것도 일이잖아.”

난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하면 되지만, 치장하는 여노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요새 계속해서 여노는 아침마다 나를 치장하는 데에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다.

여노가 온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리 님, 제겐 이 시간이 하루하루의 낙이랍니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몰라요.”

“여노…….”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깐요. 특히 공을 들이고 있답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최악의 날이 아닐까?

“여노, 이 끔찍한 날을 특별하다고 포장하지 말아줘.”

“그, 그래도, 좋은 소식도 있잖아요?”

“좋은 소식?”

요즘 들리는 소식 중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다. 내가 이랑의 얼굴에 너무 충격받아서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나의 반응을 살피던 여노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아리 님, 설마 모르고 계셨어요?”

“응? 뭐가?”

여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그런 그녀의 물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은월 님이 남쪽 땅의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동쪽 땅으로 돌아오시는 날이에요.”

“……뭐?”

은월이 오는 날이라고? 난 전혀 들은 게 없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난 정말로 은월이 오늘 온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또 자하가 까먹은 건가.

틀림없다. 이런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걸 잊을 이는 자하뿐이다.

원치 않았지만, 다시 한번 자하가 바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은월 님이라면 이미 도착했을 수도 있어요. 워낙 발이 빠르신 분이니.”

그렇다는 건…… 지금 청화관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생각을 마친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치장도 거의 마친 듯했으니,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아, 아리 님, 어디 가세요!”

당황한 여노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애써 기분 탓으로 넘겼다.

청화관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마주쳐서는 안 될 상대를 만나고야 말았다.

“어디 가?”

“이, 이랑.”

왜 네가 여기서 나와, 대체!

왜 네 얼굴을 벌써 두 번이나 봐야 하냐고!

그냥 냅다 뛸까? 아, 아냐, 내가 아는 이랑이라면 날 쫓아오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냥, 산책.”

“마침 잘 됐네. 백령 궁 지리를 잘 몰라서. 나랑 같이 산책하는 거 어때?”

거짓말. 저거 순 거짓말이다. 틈만 나면 백령의 궁에 쳐들어올 궁리를 하는 바랑과 그의 조카인 이랑이 백령 궁의 지리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잡아뗄 게 뻔하니, 이대로 가다간 그와 강제로 단둘이 산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럴 땐 상대 안 하고 빠르게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거절할게. 나보다 하인들이 더 잘 알 거야.”

“난 아리, 너랑 걷고 싶어.”

도망가려는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기다렸어, 너를. 줄곧.”

……이러면 내가 널 뿌리치고 어떻게 가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 청화관 쪽을 보았다.

가야 하는데……. 확인하고 싶은데.

은월이…… 정말로 온 것인지.

이랑에게 잡혀 고민하던 찰나,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 니이이이이이임!”

자하는 빛의 속도로 나와 이랑 근처로 오더니, 곧바로 이랑과 나의 사이를 갈랐다.

이렇게 자하의 등장이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이랑 님,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리 님 반경 3척 내로는 접근 금지라고요!”

옳지, 우리 자하 잘한다.

“대체 제 철통 수비를 어떻게 뚫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철통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거 아니다, 자하야.

“아리 님과 단둘이 있는 꼴은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됩니다!”

“아니, 대체 왜 나만…….”

둘이 옥신각신하며 싸우는 사이, 나는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이랑과 자하는 나를 발견했지만, 그들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아, 아리 님, 어디 가시는……!”

***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화관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청화관에 다다르고, 나는 숨을 고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곧이어 느껴졌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그의 기운이.

기운을 쫓아, 청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반가운 뒷모습이 보였다.

그도 내 기운을 느낀 건지, 내 쪽으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햇살이 그의 아름다운 흑색 머리칼을 비추었다. 나를 본 그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오랜만이네, 아리야.”

“……은월.”

그의 미소를 오랜만에 본 탓일까, 아니면 쉬지 않고 달려와 숨이 차오른 탓일까.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이제 돌아온 거야?”

“그래.”

“남쪽 땅 일은…….”

“완벽하게 천강에게 인수인계하고 왔으니까, 이제 더는 내가 거기 머무를 일은 없을 거야.”

은월의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마치 우리를 감싸주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따스한 바람이었다.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내 앞에 당도하자,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입안에 곧장 넣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달콤한 향기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향……과.”

“생각나서 사 왔어.”

불현듯, 예전에 은월이 향과를 주며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가 좋아하잖아, 향과.”

그가 내게 말하곤 눈을 휘며 웃던 모습이 떠올라, 왠지 모르게 그의 회색빛 눈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에 은월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은 후, 향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향과를 먹은 지도 꽤 오래됐구나.

하긴, 은월이 아니면 향과를 접할 일이 잘 없긴 하니까.

왜인지 전에 은월이 입에 넣어준 향과와는 느낌이 달랐다.

내가 그만큼 커서 그런 건가……. 크면서 입맛이 바뀐 걸 수도.

향과를 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못다 한 말이 있었는데.”

“응?”

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를 그가 귀 뒤로 넘겨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신비로운 회색빛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웠다. 그와 오롯이 눈을 마주한 나는 긴장한 채로 그가 할 다음 말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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