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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94)화 (94/167)

94.

비천이 곁눈질로 아리를 잠깐 바라보더니, 백령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시호가 죽은 건 백 년도 더 된 일인데, 말이죠.”

비천의 말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의아하게 여긴 일이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도, 건드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리는 어릴 적부터 백령의 기운을 흡수했기에, 그 사실을 모르는 신수들은 아리에게서 풍기는 백령의 기운에 아무도 토를 달 수도, 의심할 수도 없었다.

또한, 신수들은 아리가 백령의 기운을 흡수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기운을 마시게 하는 것은 신국의 법을 어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강한 신력을 자랑하는 백령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자하.”

백령이 덤덤히 자하를 불렀다. 멍하니 있던 자하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백령의 곁으로 다가갔다.

“네, 네, 백령 님.”

“비천의 말보단 네 얘기가 더 웃길 것 같군.”

백령이 대놓고 비천의 말을 비웃었다. 그러자, 비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백령.”

“그만하지. 그 이상 입을 떼면 네 목이 먼저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백령을 부른 비천을 만류한 자는, 차가운 표정의 미호였다.

미호의 화난 어조에, 비천은 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난 더 듣고 싶은데. 감히 또 어떤 소리가 나올지.”

‘감히’라는 단어에 비천이 흠칫했다. 백령이 자신을 낮은 존재로 의식하는 것이라 느낀 탓이었다.

그런 백령을 비천이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전각 안에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천이 무엇을 하든, 무슨 도발을 하든 전혀 반응하지 않던 백령이었다. 그런데, 먼저 비천에게 시비를 걸며 상황이 끝나감에도 다시 비천에게 불을 붙였다.

이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백령이 아리가 아니라 것을 눈치채 일부러 비천의 심기를 거스르며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비천이 백령을 노려보다 더는 못 참고 입을 뗐을 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전각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네, 다들.”

그는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보이는 듯한 곳에 착석했다. 그의 행동거지는 매우 여유로웠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못 올 곳을 온 것도 아닐 텐데.”

은월이 눈을 휘며 미소 짓자, 비천과 사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직되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리로 둔갑한 포포는 아무도 몰래 아리를 만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은월을 먼저 백령의 궁으로 들여보낸 후, 나는 밖에서 포포를 기다렸다.

지금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 들키고 말 테니까.

사실 은월을 불러온 후라, 사화나 비천이 내게 해코지를 하진 못하겠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리야아아아.”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멀리서 나로 둔갑한 포포가 달려오고 있었다.

포포가 달리면서 서서히 둔갑이 풀리고, 이윽고 내게 도달했을 땐 평소의 콩알만 한 포포로 돌아와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포포가 폴짝, 뛰어오르더니 내 품에 안겼다.

포포의 귀가 축, 처졌다. 그로 인해 그의 고충을 어느 정도 가늠한 나는, 손을 뻗어 부드러운 포포의 물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약이 조금 남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

“약? 너 어디 아파? 설마 저번처럼 아팠던 거야?”

약이라니. 나는 포포를 들어 올려, 황급히 포포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흔들어 보기도 하고,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흐음…….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영아가 저번에 준 약을 먹어서 그런가.

포포의 말랑한 볼살을 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벼, 별것 아니야, 놔!”

포포가 발버둥 치며 내 손에서 벗어났다.

“그것보다 너도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

아, 맞다.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참.

포포의 말을 들은 나는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하원이 뒤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것을 들었지만, 이미 전각 안에 발을 들인 이후라, 그에 답하지 못한 채, 내 자리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은월의 등장 탓일까, 전각 안은 아직 술렁이고 있었기에, 혼란을 틈타 다른 신수들 눈에 띄지 않게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내가 듣기론 투표권이 없는 미호를 제외한 사법관과 행정관에게 2표가 주어졌다던데.”

웅성거리는 신수들의 소리를 들으며 딴청을 피우던 은월이 턱을 괴고 입을 열자, 모두가 그에게 집중했다.

“내가 어디에 투표할지는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은월의 말에 사화는 물론, 비천 또한 그저 찢어 죽일 듯이 은월을 노려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 회의가 더 필요한가?”

조용해진 전각에 백령의 음성이 낮게 울렸다. 모든 계획이 틀어진 사화와 비천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입을 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나는 찬성한단 말도, 반대한단 말도 한 적 없는데?”

바랑이 가벼운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모든 이가 바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랑의 발언에 이랑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래, 바랑. 넌 찬성한다고 말 한 적은 없지만, 반대한다고도 안 했었지.”

미호의 한숨 섞인 말을 내뱉으며 바랑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끝날 수 있는 회의에, 그가 불을 지핀 격이니, 미호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런, 내 얼굴 뚫어지겠어, 미호. 난 그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뿐이야.”

“무슨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걸까, 바랑?”

미호는 여전히 아니꼽다는 듯 날카롭게 되물었다.

“난 뭐, 사화가 교육자가 되는 걸 썩 반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화가 교육자가 될 자질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 안 하거든.”

바랑의 말을 들은 사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참 꼴 보기 싫었다.

후, 내가 몇 개월만 어렸어도 저 낯짝에 침을…… 실수인 척 고의로 뱉었을 텐데.

나는 똥 씹은 표정으로 바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표정을 본 바랑이 황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내 말은 그냥 그거야. 사화가 아니면 누가 주인 될 신수들을 교육할 수 있냐는 거지.”

그가 전각 안에 있는 신수들을 둘러보았다.

“백령과 은월은 너무 바쁘고, 남쪽 땅은 지금 남쪽 땅 일만으로 벅차고, 그렇다고 미호 네가 할 거야? 아니잖아?”

그러더니, 갑자기 바랑이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아님. 내가 할까?”

“개소리하지 마.”

바랑의 말에 은월이 특유의 미소와 함께 빠르게 답했다.

“뭐, 어쨌든, 내 말은, 사화가 아니면 누가 하냐는 거지.”

“……생각해둔 신수가 있어.”

미호가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원? 하원이 한다 그래?”

바랑은 마치 하원이 거절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미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한대.”

보다 못한 내가 말했다.

바랑에게 꽂혀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일부러 또박또박 다시 한번 말했다.

“한다고 했어, 하원이.”

나의 말에 사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도 안 돼, 하원이 시호 님 말고 다른 신수의 말을 들을 리가……!”

물론, 하원은 한다고 한 적 없다.

하지만, 썩 틀린 말은 아니야. 앞으로 한다고 할 때까지 꼬여내면 되니까.

속으로 되뇌며 양심의 가책을 덜어냈다.

암, 어찌 되었든 하게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

“믿을 수 없군요. 하원이 시호가 아닌 다른 이의 말을 듣다니.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여태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던 비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뱀 눈동자를 마주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눈.

비천의 말에 힘입어, 사화 또한 나의 말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고, 전각 안은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끄럽군.”

전각 안에 낮은 백령의 음성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모든 신수는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아리가 그렇다는데, 설명이 더 필요한가?”

백령의 물음에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백령을 노려보던 비천이었다.

“백령, 아무리 당신이 아리를 신뢰한다지만, 우리까지 아리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순 없는 노릇이죠.”

비천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안 그렇습니까, 아리?”

그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림과 동시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확인만 해주면 되겠군.”

백령이 비천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확인? 어떻게?

……설마 하원을 불러서?

안돼, 백령, 나 사실 아직 하원 설득 못 했단 말이야.

마음속으로 백령에게 간절히 외쳤지만, 그가 나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백령이 옆에 서 있던 하인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내용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원을 불러오라는 것.

하인이 밖으로 나가자, 사화가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아리 님의 말이 사실일지, 기대되는군요.”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사화와 눈을 마주했다. 사화는 그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사화와 나의 신경전에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하원이었다.

……쓸데없이 하원은 왜 이리 빨리 온 거야?

발만 동동 구르며 하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내 하원의 시선 또한 나를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하원 님.”

사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그러자 하원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하원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사화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난 뱀이랑 대화 안 해.”

하원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사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마치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어? 잠깐만. 이걸 잘 이용하면 어쩌면…….

하원은 어째서인지 뱀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가 아는 신수중에 아마 하원만큼 싫어하는 신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나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하원만을 응시했다.

그러자, 사화가 먼저 나서서 하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원 님, 주인 될 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정말로 하원 님께서 한다고 하셨습니까?”

하원은 사화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원이 선뜻 긍정하지 않자, 사화와 비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내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미소가 상당히 기분 나빴다.

하원은 긍정하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어, 사화.

“역시, 아니지요? 하원 님께서 그러실 리 없…….”

“난 뱀이랑 대화 안 한다니까?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먹냐, 너는?”

그런 사화의 말을 끊은 이는 무표정으로 사화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하원이었다.

사화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원이 사화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지, 그 일.”

“……네?”

당황을 감추지 못한 사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한다고. 교육자인가 뭔가, 그거.”

하원의 단호한 한마디에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번 회의는 정말 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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