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문을 열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날 향해 있었다. 그 두 얼굴 중,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내가 애타게 찾던 그였다.
“……은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은월이었다.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신비롭게 반짝였다.
“오랜만이야, 아리야.”
은월이 나와 눈을 마주하자, 그 특유의 미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하원 덕인 건가.”
은월이 내 옆에 서 있는 하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하원이 은월의 시선이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 네 녀석은 뭔데 이리저리 옮겨 다녀서 일을 귀찮게 만드는 거냐?”
하원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은월은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옆에 놓인 의자를 뺐다.
“일단 와서 앉아. 곧 시끄러워질 테니까.”
능청스러운 은월의 말투에 하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은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자, 은월이 영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아,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은월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영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영아가 문을 열자, 포박된 채로 끌려오는 도롱뇽 신수가 있었다. 도롱뇽 신수라 하면, 율이 떠올랐지만, 율과 달리 그의 머리와 꼬리는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 자입니다, 은월 님.”
“확실해?”
“네, 저는 서화원의 주인이자, 서화원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신수. 이 안에서 벌어진 일만큼은, 제 직감이 틀릴 리 없습니다.”
“뭐, 그건 확인해보면 알게 되겠지.”
확신이 가득한 영아의 말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나와 하원, 그리고 자타는 그저 은월과 영아의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은월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포박된 신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탁자 위의 다관을 들더니, 그대로 신수에게 차를 들이부었다.
“흑초를 만진 적이 있다면 백차(白茶)가 조금만 닿아도 손이 검게 물들어버리지.”
이내 은월의 설명과 동시에, 신수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은월이 기지개를 한번 켜곤, 입을 열었다.
“배후가 누구냐?”
“…….”
어째서인지 은월은 가벼운 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하건, 대답하지 않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은월의 물음에 도롱뇽 신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월은 예상했다는 듯이, 몸을 앉혀 턱을 괬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비천이 네게 일을 맡겼다는 건,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란 걸 확신하고 있다는 거겠지.”
은월의 말에 포박된 신수가 눈을 감았다. 마치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비천이라고?
흑초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갔다. 흑초는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법을 어기는 것.
그런데 비천이 이 일과 관계가 있다고?
“참고로 은월은, 오늘 절대 참석하지 못할 겁니다.”
순간, 비천이 자신만만하게 은월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
“끌고 가.”
은월이 서화원의 하인들에게 명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그자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은월 님, 저자의 처벌을 미루시는 겁니까?”
“처벌은 청아와 산에게 맡겨도 충분해.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네?”
영아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은월을 바라보자, 은월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아리가 날 찾아온 이유. 그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거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 그래, 아리야?”
그의 물음에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 보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 네가 필요해. 그래서 찾아왔어. 나랑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지금 너무 급해서…….”
“아리야.”
“응?”
“그런 표정으로 부탁하지 않아도 난 네 뜻에 따를 거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맑고 푸른 눈에 은월의 모습이 온전히 담길 수 있도록.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급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잔뜩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월. 비천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은월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리 위에서 그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설명은 움직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은월의 말에 은월과 나, 그리고 하원과 자타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동쪽 땅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이랑과 뽀뽀가 시간을 잘 끌어주어야 할 텐데…….
부디 늦지 않게 궁에 도착하길 바라며, 서화원을 나섰다.
***
아리가 떠난 후, 포포의 방엔 이랑과 포포, 단둘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건 아리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이랑이었다.
이랑이 고개를 내려 자신보다 훨씬 작은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아리가 그를 부르던 이름을 떠올린 이랑은, 덤덤히 말했다.
“뽀뽀, 라고 했나?”
“포포야!”
“아무튼, 하급 여우 신수가 둔갑술을 모르다니, 의외네. 대부분 부모 신수로부터 교육받는 것 같던데.”
이랑의 말에 포포가 고개를 숙였다.
“……난 어렸을 때 동족들에게 버림받았으니까.”
포포의 반응을 보던 이랑이 무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뭐, 거기까진 딱히 궁금하지 않고, 요령만 알려줄게, 잘 들어.”
“무슨 요령?”
“둔갑술. 여우 신수의 둔갑술에 관해서 일전에 들은 적이 있으니까.”
이랑은 자신이 일전에 들었던 둔갑술의 요령에 관해 포포에게 차근히 알려주었다. 둔갑이 처음인 포포는 조금 헤맸지만, 정확한 이랑의 가르침 덕분에 금방 둔갑이 가능해졌다.
아리의 모습으로 변한 포포를 보던 이랑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뭐, 얼추 됐겠지.”
“헥, 헥. 힘이 너무 많이 소모되잖아, 이거.”
하급 여우 신수의 둔갑술로는 인간형의 모습인 신수처럼 변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포포는 힘들어하기는 하나, 아리의 모습으로 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 포포를 본 이랑은 의구심이 일었다.
‘이 하급 신수의 정체는 대체 뭐지?’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이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의구심을 접고, 지금 상황에 집중했다.
“둔갑술 자체가 여우 신수들이 천적으로부터 도망칠 경우에나 잠깐 쓰는 용도니까.”
포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랑은 이대로라면 금방 들통나 버릴 것 같았지만 시간이 없었고, 다른 방법 또한 없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아리가 올 때까지 무조건 시간을 끌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화나 비천의 눈에 띄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잘 들어, 네 겉모습이 지금 아리라고 해서, 네게 느껴지는 기운까지 아리인 것은 아니야.”
아리의 모습을 한 포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포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리의 대역을 잘 해내야 한다는 것.
“회의장에 들어가면 넌 내 옆에 앉아. 어차피 강한 신수들만 모인 자리니까, 특별히 네가 의심되는 행동을 보이는 게 아닌 이상,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이랑이 말을 마치며, 포포의 방문을 열고 나섰다.
포포가 이랑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어……?’
순간, 포포는 현기증에 몸을 휘청였다.
포포가 나가려던 몸을 돌려, 방안을 뒤지더니,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일전에 영아에게서 받은 약이었다.
주머니에 담긴 경단 모양의 약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 아리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이 약을 꼭 먹어야 한다는 것을.’
포포가 약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곧바로 삼켰다.
아리의 대역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몸을 추스르고 이랑을 따라갔다.
이랑과 포포가 도착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나가서 소꿉놀이라도 하신 건지, 꽤 오래 걸리셨네요, 두 분.”
사화가 비아냥거리며 말했지만 이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포포를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백령과 미호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기에, 이랑은 아직 비천과 사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대로 회의를 마치게 둬선 안 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이랑이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을 때, 회의 내내 무표정이던 백령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재밌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비천.”
그의 듣기 좋은 중저음이 회의장 안을 울렸다. 모두가 하는 일을 멈추고 일제히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흑초가 요즘 남쪽 땅에서 비밀리에 유통이 되었다더군.”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내게 꺼내는 이유가 뭐죠?”
“듣기로는 은월에게 붙잡힌 밀수범은 네가 배후라고 실토를 했다더군.”
비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비천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그 일은 아직 해결이 안 됐을 텐데요?”
억지로 여유를 부리며 비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일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나 보군.”
백령의 말에 비천이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왜 그리 당황하지? 일부러 은월의 일을 방해하려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백령이 무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저 농담 한 번 던진 것뿐인데.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놀랍군.”
“농담치고는 지나치군요, 백령. 그저 행정관이라는 직책을 맡은 신수로서, 들은 게 있을 뿐입니다만…….”
“그런 것치곤, 은월이 올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백령이 계속해서 비천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비천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비천의 흑색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지만, 백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요. 제가 이 일을 꾸미기라도 했다는 건지.”
백령은 그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비천이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한쪽 입꼬리를 다시 올렸다.
“시호가 살아 있었으면, 참 재밌었을 텐데 말이죠.”
비천의 입에서 나온 ‘시호’라는 이름에 백령의 푸른 눈에 한기가 서렸다.
그 모습을 본 비천이 즐겁다는 듯 한껏 달아오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 내가 말실수를 했군요.”
그가 고의로 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천은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리기 위해 손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시호를 미칠 듯이 사랑했었다는 걸 잠시 잊어버렸었지 뭡니까.”
비천의 거침없는 발언에 모두가 크게 당황했다.
그와 편을 먹은 사화조차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
“당신이 시호의 전 연인이었다는 걸 잊어버리다니, 제 실수인 것 같군요.”
백령과 비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신수들은 둘의 신경전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참, 웃기지 않습니까?”
전각 안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시호를 똑 닮은 아이가, 지금 백령의 아이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