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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92)화 (92/167)

92.

나와 하원이 남쪽 땅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멀리서 매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나는 새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매가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했다.

“자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매의 모습으로 변해있던 자타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리 님. 일찍 도착하셨군요, 역시 하원 님입니다.”

“이제 도착한 거냐? 매치고는 많이 늦은 것 같은데.”

자타의 말에 하원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남쪽 땅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왔습니다만…… 용케 알아차리셨군요.”

“그야, 매와 함께 움직이는 건 처음이어도, 독수리랑은…… 뭐, 그건 됐고. 꼬마 호랑이 녀석은 어디 있냐?”

“그게, ……저도 행방을 모르겠습니다.”

“뭐?”

하원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자타,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은월의 행방을 모른다니.”

“분명 은월 님이 자주 가시는 모든 곳을 살펴보았지만…… 은월 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은월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은월 님의 행방을 아실만한 분이 계시니, 그쪽으로 가죠.”

“아, 은월의 행방을 아는 자라면……!”

“네, 천강 님입니다.”

천강.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자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강은 어디 있어?”

“노군 님의 저택에 계십니다.”

노군의 저택?

그렇다는 건, 나래도 함께 있다는 건데.

“가도 괜찮겠어?”

“상관없습니다.”

자타는 무던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노군의 저택으로 향했다.

노군의 저택에 발을 들이기 전, 저택 안에서 익숙한 고함이 들려왔다.

“욘석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언제나 그랬듯, 란이 노군의 지팡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헐떡이고 있었다.

“노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노군이 다급히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 아리 님? 아리 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행차를…….”

“아리 님!”

란이 눈에 띄게 반기며 폴짝 뛰었다. 그의 너구리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오랜만이야. 천강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 천강 님을 뵈러 오셨군요.”

“내가 지금 좀 급해서 그런데……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 천강에게로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나의 말에 눈치 빠른 노군이 바로 몸을 움직였다.

“천강 님은 나래 님, 아니, 나래와 면담 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래가 노군의 밑으로 온 이후, 노군이 나래에게 존칭을 쓰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내 앞이라 무심코 존칭을 붙인 것 같긴 하지만, 평소에는 이보다 자연스럽게 나래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노군을 따라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노군을 따라 도착한 곳은, 예전에 나와 은월, 그리고 포포가 함께 묵었던 곳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천강과, 그 앞에 앉아 있는 나래가 눈에 들어왔다.

“아리, 무슨 일이지?”

천강이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문을 연 게 무례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내겐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천강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천강. 지금 내가 좀 급해서. 혹시, 은월이 어디 있는지 알아?”

나의 물음에 천강보다 나래가 먼저 반응했다.

“그걸 네가 왜 알아야 하는데?”

“나래.”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나를 톡,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게 맞다 생각해?”

“뭐?”

“지금의 네가, 나한테 그렇게 하대할 신분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노군, 천강?”

나의 물음에 노군과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치밀어 오른 듯한 나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더는 내게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 예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그녀였는데, 이번은 달랐다.

“……미안해.”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낮게 읊조린 사과를 건넸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나는 나래가 사과라는 것을 했다는 것, 그 자체가 놀라웠다.

노군의 영향인가, 아니면 천강이 옆에 있기 때문일까.

“미안하면 됐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천강, 그래서 은월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려줄 수 있어?”

천강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이번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천강의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와 눈을 마주했다.

“은월의 말이 맞았군.”

“응?”

이해되지 않는 천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천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은월이. 혹 누군가가 자신이 위치를 묻거든, 그게 동쪽 땅의 작은 주인과 관련된 자라면 알려줘도 된다고 하더군.”

“은월이?”

그렇다는 건, 은월은 우리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어떻게?

내 표정을 본 천강이. 가감 없이 말을 이어갔다.

“은월은, 지금 서화원에 있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되묻기도 전, 천강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모든 볼일을 마쳤으니, 이만 내 처소로 돌아가야겠군.”

그의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방을 나가려는 그를 급히 불렀다.

“천강, 잠까…….”

“기별도 없이 찾아올 정도로 급한 일인데, 날 붙잡을 시간에 1초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어떤가, 아리.”

그의 말에 나는 그를 붙잡으려 올리던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은월이라면, 너에게도 설명해주겠지.”

……그래, 맞아. 자초지종은 은월을 만나고 나서 들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은월을 믿어야 해…….

천강이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나와 나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문이 열려 있었기에, 모든 얘기를 들은 자타와 하원은 어서 움직이자는 듯, 내게 눈짓을 했다.

“서화원으로 가자.”

***

서쪽 땅의 아름답고 호화로운 궁, 그런 궁은 비단 바랑의 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작을지언정, 웅장함에서 밀리지 않는 서화원이 있었으니.

신국에서 서화원은, 가장 큰 약방이며, 모든 약과 약재들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반수생동물들로만 이루어진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의 주인, 영아의 허락을 맡은 자만 방문하고 볼 수 있는 곳.

하지만 현재 영아는 예기치 못한 자의 방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은월 님.”

영아의 맞은편에는 사법관인 은월이 앉아 있었다. 은월은 서화원 하인이 내온 차를 마시기만 할 뿐, 영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영아는 은월의 이런 태도에,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은월 님이 친히 서화원까지 들르셨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신호.’

영아는 그 연유를 당장이라도 은월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은월에게서 풍기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결국, 영아는 조용히 그의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영아.”

한참 동안 말없이 차만 마시던 은월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긴장한 그녀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네, 은월 님.”

영아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영아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은월이 무언가를 탁자 위로 던지듯이 놓았다. 영아가 조심히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으, 은월 님, 이것은…….”

은월이 내민 것에 영아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은월은 그녀와 상반된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걸 왜 제게…….”

영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은월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신국에서 금기라 여겨지는 ‘흑초’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흑초’는 향보다 더 강한 마약성 풀이었다. 그렇기에 향과로 가공하는 향과 달리 재배 자체가 금기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런 흑초를 은월이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랍시고 내미는 것이 영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내 은월이 무언가를 하나 더 꺼내었다. 그것은 경단처럼 생긴 약이었다.

그 약을 본 영아는 그제야 은월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영아가 고개를 들어 은월을 바라보았다.

“영아, 네 반응을 보니 이 일을 몰랐던 것 같군.”

“네, 상상도 못 한 일입니다. 어찌 제 서화원에서 이런 일이…….”

영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근, 흑초에 중독된 신수들이 남쪽 땅에 나타나기 시작했지. 덕분에 동쪽 땅에 돌아가는 일이 더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은월이 탁자 위에 놓인 흑초를 들었다.

“얼마나 비밀리에 진행했던 건지, 출처를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더군.”

그의 어조는 매우 무덤덤했지만, 영아는 그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남쪽 땅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가, 흑초 때문에 더 바빴을 테니.

은월이 흑초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보랏빛이 그의 손을 감쌌다. 이내, 흑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빨리 찾는 게 좋을 거야, 비천의 끄나풀을.”

은월의 말에 고개를 숙인 영아는 곧바로 문밖의 하인을 불러 무언의 지시를 내렸다.

은월은 차를 마시며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하원과 자타, 그리고 나는, 현재 서화원 앞에 당도한 직후였다.

도착과 동시에 서화원의 커다란 대문이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개 사이로 처음 보는듯한 낯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내, 안개가 걷히고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남자가 보였다. 서화원의 하인, 또는 약사 중 한 명인 것으로 보였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영아 님과 은월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의 안내를 따라, 서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서화원 안의 신수들은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서화원이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건 처음 보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하원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나는 안내를 해주고 있는 신수를 올려다보았다.

“왜 다들 저렇게 바쁜 거야?”

“아……, 영아 님께서 서화원의 신수들을 모두 집합시켰기 때문입니다.”

“왜?”

“죄송합니다만, 제게는 그 일을 언급할 권리가 없는지라…….”

그가 말끝을 흐리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서화원 내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은월이랑 관련된 일이…….

그렇다는 건, 곧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바쁘게 지나치는 서화원의 신수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의 공통점이 눈에 보였다.

전부, 반수생동물뿐이네.

“넌 어떤 신수야?”

“네? 저 말입니까?”

그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에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자라입니다.”

거북이에 도롱뇽, 거기에 이어 자라라…….

서화원 신수의 생김새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자라 신수가 어느 방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 이 방입니다. 이곳에서 은월 님과 영아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라 신수가 설명을 마침과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자라 신수의 말대로, 방 안에서는 은월과 영아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은월을 보는 것이라 그런지, 살짝 긴장되는 듯한,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그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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