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누구야?”
어딘가 낯익은 기운에 재빠르게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 있는 인물을 알아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 하원……?
문 앞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원이 서 있었다. 그가 특유의 까칠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하냐, 여기서?”
하원의 물음에 잠시간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아까 뱀 비린내는 역하니, 물속에만 처박혀 있겠다고 선언한 그가 아닌가.
“하원, 안 돌아갔었어?”
나의 물음에 하원이 인상을 구겼다.
“뭐, 생각보다 뱀 비린내가 역하지 않기도 하니, 겸사겸사.”
그렇게 말하는 하원은 옷 소매로 코를 막고 있었다.
신빙성이 하나도 없잖아, 이 수달아.
그가 왜 돌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하원, 부탁이 있어.”
“뭔데?”
하원이 무심히 답했다. 예전과 달리 거절부터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나랑 은월을 찾으러 가자.”
내 얘기를 들은 하원의 인상이 아까보다 더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의지를 굽히지 않은 채,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내 눈빛에 못 이겨 고개를 돌렸다.
“난 그 꼬마 호랑이랑 안 친해.”
“꼬마 호랑이……?”
설마 은월을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하원이 말하는 꼬마 호랑이는 은월이 맞는 것 같았다.
물속에만 틀어박혀 있던 하원이니, 그가 보았던 은월은 지금보다 상당히 어린 은월이었을 것이다.
은월을 꼬마 호랑이라 칭하는 신수는 너뿐일 거다, 하원아.
“어쨌든, 난 그 꼬마 호랑이 만나러 갈 생각 없다.”
그가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렸다.
“알았어. 그럼 나 혼자서라도 가지, 뭐.”
몸을 돌리던 하원이 우뚝 멈춰 섰다. 뒤에서는 포포와 이랑의 목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왔다.
“안 돼! 가다가 닭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혼자 가는 건 너무 무모해, 아리야.”
포포와 이랑이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
하지만 어쩌겠어, 하원을 제외하면 지금 같이 갈 수 있는 신수는 없는…… 어?
불현듯, 누구보다 은월의 행방을 잘 알고 있을 신수가 떠올랐다.
바로 자타였다.
잠깐, 그럼 자타한테 그냥 내 말을 은월에게 전하라 이르면…….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자타에게 회의 내용을 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어…….
나는 백령과 미호, 그리고 은월이 보호해주겠지만, 자타는 아니었다.
내가 가야 해.
이 일을 전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그럼, 자타는 어때?”
나의 물음에 포포, 이랑, 그리고 하원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다.
“둘이 가는 건 위험해. 자타는 이미 전과가 있잖아.”
이랑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큰일이 날 거 같지는 않은데…….”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자타는 더 이상 내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기에, 작게 읊조렸다.
“우리 어여쁜 아리는 너무 신수를 쉽게 믿어서 탈이라니까.”
이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리는 그래도 똥개는 안 믿어.”
포포가 바랑을 떠올리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똥개는 안 믿지.
“아무튼, 자타와 단둘이 가는 건 난 반대야, 아리야.”
이랑이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작은 똥개의 말을 귀담아들을 리 만무했다.
눈을 굴려 하원의 모습을 흘겨보았다. 자타와 간다는 나의 선언에,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였다.
“하는 수 없잖아. 상관없어. 싫다는 하원한테 계속 부탁하기도 뭐하고…….”
일부러 아쉬운 척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원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무튼, 뒷일을 잘 부탁해, 이랑, 뽀뽀.”
믿을 건 작은 똥개와 여우뿐이다.
“혼자는 위험하다니까.”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해.”
내가 전각에서 나온 지도 꽤 되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석연치 않아 보이는 이랑과 포포에게 옅은 미소를 흘린 후, 자타에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급히 움직였다.
자타가 어디에 있을까…….
정신을 집중해서 자타의 기운을 찾았다.
그는 이곳과 그리 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좋아, 가자, 아리야.
서둘러서 자타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근데, 하원. 넌 안 간다며?”
날 계속해서 뒤따라오는 하원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하원이 고개를 휙, 돌리며 까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마침 할 거도 없으니까.”
“그래?”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가던 길을 마저 갔다.
하원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금방 정신을 차리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시큰둥한 내 반응에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아니, 너는 널 죽이려 한 놈을 뭘 믿고…….”
“나 걱정하는 거야?”
“누가 누굴 걱정해? 됐다, 말을 말자.”
하원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발걸음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 움직인다는 걸,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자타가 눈에 들어왔다.
자타가 눈에 들어오자, 하원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자타.”
“아, 아리 님?”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자타가 화들짝 놀라며 정자에서 일어났다.
“왜 지금 여기에 계신 겁니까? 그것도 하원 님과…….”
자타가 나와 하원을 번갈아 보며 의문을 표했다.
“으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것보다 자타,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뇨……?”
자타가 맹금류 특유의 눈을 크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은월에게로 날 데려다줄 수 있어?”
“은월 님, 말입니까? 아니, 그것보다 지금 말입니까?”
“응, 지금. 한시가 급해. 너라면 은월의 행방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에 자타는 분명 나래 탓에 은월의 행방을 찾은 적이 많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은월의 행방을 찾는 데에 자타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타는 다행히 내가 한 말의 뜻을 금방 알아챈 듯했다.
“……알겠습니다, 아리 님의 명령, 받들겠습니다.”
자타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듯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은월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움직였다. 하원과 자타가 나의 뒤를 따랐다.
호기롭게 출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작은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지금은 청마를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
청마가 오는 건 너무 소란스러워, 남쪽 땅으로 이동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하원과 자타를 번갈아 보았다.
“아리 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자타가 내게 물었다.
“실은, 나는 여태껏 청마를 타고 이동했는데, 지금 청마를 부르는 것은 불가능해서.”
나의 대답에 자타가 이해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제가 이동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자타, 네가?”
“네, 저는 상급 매니까요. 아리 님 정도는 태울 수 있을 거 같습니다만…….”
자타가 매로 변하는 모습을 여태 본 적 없는 나는, 그의 변한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럼, 부탁할…….”
“안 돼.”
하원이 단호하게 말하며 나와 자타의 사이에 꼈다.
……그걸 왜 네가 정해?
“하원, 나는 자타 의견에 동의…….”
“시끄러.”
하원이 내 말을 끊더니, 나를 들쳐 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넌 너대로 와라.”
하원이 나와 마찬가지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자타에게 차갑게 말하곤, 나를 들쳐 맨 채로 어디론가 향했다.
한동안 정신 못 차리던 나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저 새보다 더 빠를 테니까 걱정 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한마디만 더 하면 던진다.”
아니,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다짜고짜 이러는 게 어딨어! 이 수달 녀석!
물론 나는 던져지고 싶지 않았기에 입은 다물었지만, 그를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의 따가운 눈빛에도 타격이 하나도 없는 하원이 도착한 곳은 그가 지내고 있다던 강이었다.
……이 수달이 뭘 잘못 먹은 건가? 왜 날 강으로 끌고 온 거야?
한시라도 빨리 남쪽 땅으로 가야 하는데.
하원이 나를 강 앞, 풀밭에 살포시 내려주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지금 걱정 안 되게 생겼냐고! 안 그래도 예상보다 많이 지체됐는데…….
“우린 물로 이동할 거니까.”
이 수달이 진짜, 남 일이라고 태평하게…… 응? 뭐라고?
물로 이동해?
“그래, 나와 함께라면 물로 이동할 수 있어. 난, 강의 주인이니까. 강은 모든 땅과 연결되어 있지.”
하원의 말투에는 뿌듯함이 묻어나 있었다.
“알았지? 그러니까…….”
“하원.”
“응?”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나 들쳐 매면, 나 너 다신 안 볼 줄 알아.”
하원의 표정에 잠시 당혹감이 드러났다. 이내 머리를 긁적이던 하원이…… 이번에는 나를 안아 들었다.
아니, 이 수달 녀석이 또 허락 없이……!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하원과 내 주위로 강물이 솟구쳤다. 곧이어 하원과 나는, 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속의 풍경이 눈에 오롯이 담겼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국의 물속은, 내 예상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푸른 물결이 반짝반짝 빛이 났고, 물속 생물들이 자유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또한, 물살은 나와 하원을 계속해서 이동시켜 주고 있었다.
어? 근데 어째서 물속인데 숨이 편하게 쉬어지는 거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도 확 트여 있었다.
저번에 하원을 설득하려 물에 빠졌을 때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다. 의식도 잃었었으니까.
나를 안고 있는 하원을 바라보았다. 하원의 주위로 그의 기운들이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아무래도 그의 힘인 것 같았다.
강의 주인, 하원. 그만의 능력인 것이다.
얼마 안 가, 하원이 수면 위로 올라간 후, 내가 안전하게 땅을 디딜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원이 호언장담한 대로, 생각보다 훨씬 일찍 남쪽 땅에 도착했다.
“거봐, 내가 그 새보다 일찍 도착할 거라고 했지?”
의기양양해진 그가 헹,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원.”
“뭐?”
“누가 나 허락 없이 안으랬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적잖게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 분명 들쳐 매지 말라고 했잖아?”
“거기에 안는 것도 포함이었어.”
“하?”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의기양양했던 그의 수달 꼬리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뭐, 인마? 백령도 허락 없이 나 안은 적 없는데, 네가 뭔데 날 맘대로 안아 들어?
“그래도, 물속, 되게 예뻤어.”
나의 말에 하원의 수달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하원.”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허락도 없이 안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준다.
“이상한 녀석이야, 너.”
그리 말하며 하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마 신국에서 제일 정상은 나일 것 같은데.
“꼬마 호랑이나 찾으러 가자고.”
그의 동그란 귀가 오늘따라 유독 귀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