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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90)화 (90/167)

90.

잠깐 다녀온다던 하원을 만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정자에 앉아 있는 하원의 옆에는, 나와 포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하원, 어제는 어디에 간 거야?”

나의 물음에 하원이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가다듬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네 잎의 토끼풀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내민 네 잎의 토끼풀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걸 찾으러 간 거야?”

하원이 시선을 돌리며 인상을 구겼다.

“이건 그냥 간 김에 눈에 밟혀서 꺾어온 거뿐이다.”

웃기지 마, 수많은 토끼풀 사이에서 이걸 바로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잖아.

이번에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내민 토끼풀을 받았다.

“나 주려고?”

“넌 이게 소원을 들어준다는 미신을 믿는 것 같으니까.”

……아니, 소원이 아니라니까.

하원에게 받은 토끼풀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가 토끼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눈에 불 켜고 찾았을 것을 생각하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근데, 너, 오늘은 기분이 좀 괜찮은 것 같잖아?”

난 어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하원아.

무턱대고 사라진 건 너야…….

어쨌든, 그에게 받은 네 잎의 토끼풀은 고이 간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늘은 궁에 있기 싫은데.”

뜬금없이 하원이 턱을 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언제나 있기 싫은 척하고는 했잖아, 너.

“왜?”

“오늘 물의 흐름이 영 이상하단 말이지.”

“물의 흐름?”

그가 찝찝하다는 투로 말했다. 수달의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고, 작고 동그란 귀는 쭉 뻗어 있었다.

물의 흐름이 많이 이상한 건가?

“오늘 동쪽 땅에 누가 방문하기라도 하는 건가.”

하원의 말에 어제 백령이 자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호에게 가서 전해라. 사화와 함께 동쪽 땅으로 오라고.”

하지만 백령이 이 말을 한 건 불과 어제였다. 정말 어지간히 긴박한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신수들이 모일 리가 없었다.

“하원, 물의 흐름이 이상하면, 꼭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야?”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어.”

하원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그럼 정말 오늘 신수들이 모인다고?

나의 경직된 얼굴 탓인지, 하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신수들이 동쪽 땅에 모일 거 같아.”

수달의 귀가 쫑긋, 하고 세워졌다.

“신수 누구?”

“아마 미호, 바랑과 이랑, 그리고…… 사화.”

나의 말을 듣던 하원이 사화라는 말에 아까보다 더 인상을 구겼다. 그의 남색 눈동자에는 불쾌감이 어려 있는 듯했다.

“사화가 온다고?”

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낮게 읊조렸다.

“오늘은 물속에만 처박혀 있어야겠군.”

“응?”

말을 끝마친 하원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그는 기지개를 한 번 키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이대로 가 버리는 거야?

“하, 하원!”

“왜.”

다급히 그를 부르자, 그가 하품하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는 거야?”

“응.”

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왜?”

나의 물음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미소가 아니었다. 살의가 담겨 있었으니까.

“뱀 비린내는 너무 역해서, 맡으면 토할 것 같거든.”

하원은 그 말을 끝으로 궁을 떠났다.

빨라…….

하원이 사화를 싫어하는 건 왜일까? 아니다, 그는 사화를 싫어한다기보단 뱀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시호의 죽음이, 혹시 뱀과 연관돼있는 걸까?

여러 가지 고민하는 사이, 포포가 다리로 볼을 긁으며 하품했다.

“하암. 오늘은 나도 과자나 먹으면서 방에 박혀 있어야겠다. 절대 그 뱀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은 참아, 뽀뽀.”

너 요즘 살쪘어.

요즘 들어 튀어나온 포포의 볼록한 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 님, 여기 계셨군요.”

그때, 자타가 내게로 다가왔다.

마침 잘 됐다. 물어볼 거 있었는데.

“자타, 오늘이야?”

“네?”

“오늘 미호가 와?”

굳이 다른 신수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미호가 오냐, 안 오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미호의 명령이 아닌 이상, 그들 전부가 한꺼번에 움직일 리는 없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자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호 님의 명으로 다른 땅의 주인들도 오실 겁니다.”

역시 그랬구나…….

“이번에 모이는 목적은 뭐야?”

“그건, 제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안인지라…….”

“아, 알았어.”

자타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많은 신수가 엮인 사안인 것 같으니, 그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은 맞는 것 같았다.

“아리 님도 금방 알게 되실 겁니다. 회의가 곧 시작될 테니까요.”

자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자타의 말은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곧, 동쪽 땅에 그들이 도착했으니까.

***

회의가 시작된 곳은 평소에는 발붙일 일이 없던 아무도 쓰지 않는 전각이었다.

그곳에는 무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백령과 미호,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즐기고 있는 바랑과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랑.

그리고, 사화를 제외하면 아무도 반기지 않을 비천이 앉아 있었다.

쟨 또 왜 온 거야?

비천의 등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안 그래도 달갑지 않은 얼굴이 더욱 싫어졌다.

하지만 백령은 그의 등장에 딱히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전각의 공기는 무거웠다. 아마 백령과 미호의 기운 때문인 것 같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연 건, 백령도, 미호도 아닌, 사화였다.

“미호 님과 백령 님의 반응을 보니, 제 제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네요.”

……사화야, 다시 한번 미호와 백령의 얼굴을 봐봐, 별로의 수준이 아니야.

사화의 말에 백령과 미호는 그녀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네 제의가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

미호의 도도한 음성이 전각을 울렸다.

미호의 말에 사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왜 말이 안 되는 거죠?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 제가 하는 것일 뿐인데요.”

“이미 적임자가 따로 있는 일이야.”

“그래서 하원 님이 하시겠답니까?”

사화와 미호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갔다.

두 신수의 대화를 듣던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 미호와 백령이 무엇 때문에 사화를 노려보고 있는지 알아차려 버렸으니까.

하원이 적임자인 일, 교육자. 사화는 본인이 그것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군, 사화.”

백령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백령의 말에 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진 않겠어요. 백령 님 말씀대로 전 그것은 노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

그것이 뭔데?

사화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으니까.

“주인 될 자들을 교육하는 것 또한 신국의 주 직책이 되겠죠. 그렇다는 건, 네 땅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특권이 생긴다는 말이죠. 네, 저는 그것을 노리는 게 맞습니다.”

그녀가 부드럽고, 단아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미호와 백령의 표정은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오, 사화, 대단한걸? 백령과 미호를 상대로 그런 호기로운 자세라니.”

너무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바랑이 감탄하며 즐거워했다.

……어째, 저 똥개는 안 본 사이에 더 미친 것 같아.

비천 또한 흥미롭다는 듯, 사화의 말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쟨 더 미쳤고.

“사화, 그런 불순한 의도로…….”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은 없죠, 미호 님.”

미호의 말을 끊은 사화가 여유롭게 말했다.

사화를 바라보는 미호의 자색 눈동자에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눈을 풀고 사화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지, 사화?”

속상하다는 듯한 투였다. 이전에 둘을 함께 봤을 때를 떠올려보면, 미호는 사화에게 나름 사근사근 대해주었었다.

“전 그저, 제가 갖고 싶은 걸 갖고 싶다고 말할 뿐입니다.”

아무도 그에 반박하지 않자,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으니, 가질 수 있는 것부터 한 번 가져보려 합니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확신에 차 있었다.

가질 수 있다고, 어째서 확신하는 거지?

그 이유는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전 사화를 교육자로 임명하는 게 옳은 것 같군요.”

상황을 흥미롭게 감상하던 비천이 소름 끼치게 웃으며 미호를 바라보았다.

“신국의 법도에 따르면, 누군가의 직책을 결정하는 건 사법관과 행정관, 미호, 그리고 네 땅의 주인이 함께 결정하기로 되어 있죠.”

그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건에서 미호, 당신은 빠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전에 은월을 사법관으로 임명할 때, 멋대로 하셔서 투표권이 없지 않습니까.”

비천의 말에 미호가 눈을 감았다.

“……그땐 급했으니까.”

그녀가 낮게 읊조렸다.

“백령과 바랑이 반대하고, 사화와 제가 찬성을 한다면 표가 갈립니다. 표가 갈릴 시 신국에서는, 어찌 하고 있죠?”

비천이 일부러 여유롭게 모두에게 물었다. 아무도 그에 대답하지 않자, 비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었다.

“미호와 행정관, 그리고 사법관에게 2표가 주어지죠. 하지만 은월은 참석하질 않았으니, 무효표 처리가 되고, 그렇게 되면…….”

3대 2로 사화가 임명되는 거야…….

“참고로 은월은, 오늘 절대 참석하지 못할 겁니다.”

비천의 표정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증거는 없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비천, 저 더러운 변태 놈이 은월의 일을 또 방해했다는 것을.

이 일은 사화의 직책이 하나 더 붙는다는 것이, 그녀의 권력이 더 세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비천의 권력도 더 강해질 것이다. 사화 또한 비천에게 은혜를 갚을 테니까.

지금 상황에 믿을 건 은월밖에 없는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은월을 데려올 수 있을까?

비천이 무어라 부연설명을 덧붙였지만,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 님, 어디 가세요?”

내가 일어나는 모습을 본 사화가 내 동향에 관해 물었다.

“으응……, 화장시일.”

나의 대답에 그녀가 의심쩍은 눈빛을 보냈지만, 애써 무시하고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내가 향한 곳은 포포의 방이었다.

누워서 꼬리를 흔들던 포포가 방 안에 들어온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입가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 아리야, 무슨 일…….”

“뽀뽀.”

“으, 응?”

“부탁이 있어.”

안 좋은 예감이라도 든 건지, 포포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뭐, 뭔데?”

“나인 척하고 저기 가서 앉아 있어.”

회의 중인 전각을 가리켰다. 그러자, 포포가 기겁하며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둔갑 같은 거 못해?”

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거 못 해!”

포포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나는 두 손으로 내 귀를 막았다.

“소리가 커, 뽀뽀.”

포포가 씩씩거리며 날 올려다보았다.

“왜 자꾸 이상한 거 시켜, 난 그런 거 절대 못 한단 말이…….”

“아니, 중, 하급 여우 신수는 둔갑할 수 있어.”

포포의 말을 끊은 건 내가 아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문 앞, 그곳에는 포포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랑이 서 있었다.

“할 수 있어, 넌.”

이랑이 포포의 앞으로 걸어왔다.

얘가 왜 여기 있지?

멍하니 걸어오는 이랑을 바라보자, 이랑이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하고 감았다 뜨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시간이 없으니까, 이번엔 내가 이 아일 도와줄게. 아리, 넌 은월을 찾아갈 생각이지?”

“으, 으응…….”

어떻게 알아챈 거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랑을 보자,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화한테 교육받는 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리고 백령이랑 미호가 화내는 것도 무섭고.”

이랑이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눈치 없는 삼촌 때문에 미호한테 밉보이긴 싫어.”

사화의 호기로운 태도에 즐거워하던 바랑이 떠올랐다.

그래, 서쪽 땅은 이랑이 물려받을 텐데, 미호한테 밉보여서 좋을 거 없지…….

“어서 가. 최대한 나랑 이 여우가 시간을 끌 테니까.”

이랑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는 내게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다.

“고마워, 이랑.”

그에게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이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포포와 이랑에게 뒷일을 맡긴 채, 은월을 만나러 가기 위해 움직였다.

꼭, 은월을 데려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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