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그럼, 아리 님의 서찰을 은월 님에게 전해드리죠.”
“부탁해, 자타. 무사히 전해줘.”
자타가 포포의 발 도장이 찍힌 서신을 소매에 넣었다. 그는 바쁜지, 가벼운 묵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자, 그럼 이제 하원에게 가볼까…….
“하암, 아리야, 이제 형님한테 가는 거 어…….”
“잔말 말고 따라와, 뽀뽀.”
포포의 꼬리를 잡고 자리를 이동했다. 꼬리를 잡힌 포포가 이젠 포기한 건지, 얌전히 따라왔다.
하원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는 도중, 팔짱을 끼고 얌전히 따라오던, 아니, 끌려오던 포포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꼬리, 놓으라고 해도 잡고 갈 거지?”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아리, 점점 뻔뻔해지는 거 같아…….”
포포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던 길만 열심히 갈 뿐이었다.
포포를 끌고 간 곳은 언제나 가던 정자였다. 그곳에는 하원이 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수달 이제 매일 매일 오네.”
그러게나 말이야.
포포와 나는 하원에게로 다가갔다. 나와 포포를 발견한 하원은, 예전처럼 경계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포포를 쓱, 한 번 보고는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릴 뿐.
“하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 찾아왔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있냐. 나는 그냥 물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나온 것뿐이야.”
그 물 안에서 몇십 년을 넘게 있었잖아, 너…….
시호가 죽은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들어본 바 없지만, 몇십 년이 지났음은 확실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너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그런 그의 거짓말을 그냥 넘겨주기로 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하지만 눈치 없는 포포는 나와 달랐다.
“뭐가 답답해? 너, 맨날 물속에 있었……. 읍읍.”
황급히 포포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포포가 바동거렸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용해, 여우야.
“많이 답답했어?”
“뭐, 조금.”
나의 물음에 그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거짓말하는 게 너무나도 뻔히 보여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풋.”
참지 못한 채 작은 실소를 터트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있잖아, 하원.”
“뭐.”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의 작고 동그란 수달의 귀가, 흔들렸다. 그의 남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러던가.”
그가 무심히, 아니, 무심한 척을 하며 말했다.
“하원은 예전에 뭘 하던 신수였어? 매일 물속에만 있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랬으면 미호와 백령이 교육자로 그를 떠올렸을 리가 없다.
나의 물음에 하원이 그 당시를 떠올리며, 남색 눈동자의 색이 바래졌다.
“미호와 시호를 도와 신국의 법도를 구축하는 일을 했어.”
미호와 시호를 도와서, 신국의 법도를 구축했다고?
……그를 추천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신국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을 그일 테니.
그런데, 하원을 어떻게 설득하는 게 좋을까…….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원은 백령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호에게 적대감이 심한 거 같으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야…….”
하원의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그럼, 그럼.
“어제랑 다르게,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네.”
“응? 별로…….”
전혀 그렇지 않은데?
“기다려봐.”
“아, 아니…….”
“금방 다녀올게.”
아니, 나 기분 안 좋은 거 아니라니까?
내 말을 모두 무시한 하원이 정자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이내 그의 기운이 궁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뭘까.
나는 그저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푸하, 가버렸네, 수달.”
내가 멍해진 틈을 타, 포포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숨을 고르게 쉬던 포포가 가만히 있는 나를 콕콕, 건드렸다.
“아리야.”
“응?”
“저기, 고양이 온다.”
고양이라면……자하?
그때였다. 반갑지 않은,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아리 니이이이임.”
이건 필시 좋지 않은 신호이다. 자하가 헛소리를 하거나, 나를 귀찮게 할 것임이 분명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보기 드물게 너무나도 맑았다.
왜 또 날씨는 좋고 야단이야……. 눈치 없게.
또 숨바꼭질하자고 할지도 몰…… 어?
그러다, 어제 자하와 숨바꼭질하다가 백령을 보러 갔던 것을 떠올렸다.
“아리 님, 대체 어디 가셨던 거예요? 제가 얼마나, 얼마나 찾았는지 아세요?”
“으응, 내가 너무 꼭꼭 숨었나 봐.”
하지만 난 절대 후회 안 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자하를 피해 꼭꼭 숨고 말리라.
“좋아요, 그럼 이제 다시 숨…….”
“짜하.”
어림도 없어.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숨바꼭질에 ‘숨’ 자도 꺼내지 마, 앞으로.”
나의 말에 자하의 귀가 쫑긋, 솟았다.
“왜, 왜요?”
왜긴 왜야, 너라면 끔찍한 숨바꼭질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니……?
“다른 거 해, 앞으로!”
“저는 아리 님과 사랑의 숨바꼭질 좋은데…….”
그러니까, 하기 싫은 거다, 짜하야…….
나의 완고한 자세에, 이내 자하는 숨바꼭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자하가 막무가내로 몰아붙여서 넘어갔었지만, 다시는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앞으로 숨바꼭질 절대 안 할 거야. 백령이 하자고 해도 안 할 거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숨바꼭질을 포기한 자하는, 이번에 또 이상한 놀이를 생각해 온 것 같았다.
“아리 님, 그럼 우리 ‘동쪽 땅에 백호가 나타났습니다.’ 해요!”
백호가 뭐……?
그건 또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놀이야?
“뽀뽀야, 넌 저거 알아?”
“아니, 처음 들어봐.”
포포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하가 의기양양해져서는, 새로운 놀이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하의 설명은 이랬다. 술래가 나무나 벽에 붙어서 뒤돌아 손으로 눈을 가리고 ‘동쪽 땅에 백호가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하면, 나머지 신수가 천천히 술래에게로 다가가는 거였다.
그리고 술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돌고, 술래가 뒤돌았을 때 나머지 신수는 ‘어흥’하는 자세로 멈춰 있어야 한다고…….
근데, 이거 내가 아는 거랑은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자하에게 이 이상한 놀이를 가르쳐준 자는 이제 불 보듯 뻔했다. 여노임이 틀림없다.
“아무튼, 시작해요! 제가 술래할게요!”
자하가 웬일로 술래를 자처하며 나섰다. 자하가 동쪽 땅 어쩌고를 말하고 난 후, 뒤를 돌았다.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려 ‘어흥’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흥!”
……내가 낸 소리 아니다. 이 놀이에 벌써 심취한 작은 여우가 낸 소리다.
“아리 님! 아리 님은 왜 소리 안 내셔요!”
“그런 건 설명에 없었잖아!”
이 스라소니가 어디서 약을 팔아?
“큼, 있어요! 제가 까먹고 말 안 한 것뿐이에요! 빨리요!”
……이거, 계속해야 하는 걸까?
하원 따라갈걸.
온갖 후회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아리야, 빨리해, 빨리.”
요망한 여우가 옆에서 재촉했다. 꼬리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어, 어흥!”
……죽고 싶다.
한동안 나와 포포는 어흥을 연발하며 자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움직이고 말았다.
“아리 님, 일로 와요.”
자하가 싱글벙글해서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헤헤, 걸어주세요, 아리 님.”
……이 녀석, 이걸 노린 건 아니겠지?
어쩐지, 자하가 술래를 자처한다 했어. 이런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니.
그것보다 자하가 이렇게 머리를 굴렸다는 사실 또한 매우 신기했다. 어쩔 수 없이 자하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자하의 뭉툭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 다시는 이거 안 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하와 나, 포포, 셋이서 놀다 보니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진짜 온종일 자하가 생각해온 이상한 놀이만 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었던 인물이 떠올랐다.
하원, 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쯤 되니 하원의 행방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대체 어딜 갔길래 이 시간까지 안 오는 것인지.
“아리 님, 더 놀아요, 더!”
“맞아, 아리야, 더 놀자.”
……너네끼리 놀아, 이 바보들아. 나는 지쳤어.
두 바보에게 고개를 저은 후, 정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뜻밖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하원……이 아니라 그는 자타였다.
그 많은 서신을 벌써 다 처리한 거야? 자타, 대단해.
“아리 님,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신…….”
자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날아다니는 바보 둘을 가리켰다.
“……그러셨군요.”
자타는 답신들로 보이는 두루마리들을 들고 있었다. 가기 전보다는 확연히 그 수는 줄어 있었다.
“내 것도 있어?”
자타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자타가 고개를 저었다.
응? 없다고?
“은월 님은 그 무엇도 제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바쁘면 답장을 안 할 수도 있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했다. 은근히 그의 답장을 기대한 것 같기도 하다.
시무룩해진 내 모습을 본 자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내게 입을 열었다.
“아, 이 서신들을 백령 님께 전해드리러 갈 예정인데, 아리 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백령에게?
……음, 좋아.
백령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좋으니까.
자타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가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듯했다. 정자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뒤에서 두 바보가 어디 가냐며 소리쳤지만, 그건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집무실 앞에 선 자타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들어와라.”
백령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타가 문을 천천히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 답신들입니다, 백령 님.”
자타가 백령의 책상 위로 두루마리들을 조심스레 놓았다. 그러자, 백령이 답신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미호 님으로부터 전언이 있었습니다.”
“미호로부터?”
백령이 두루마리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두루마리 중에서, 미호의 것을 찾는 것 같았다.
이내 백령이 화려한 겉면이 눈에 띄는 두루마리를 하나 집었다. 그 두루마리는 황금 실로 수 놓여 있었다.
두루마리를 읽은 백령의 인상이 구겨졌다.
“미호가 덧붙인 말은?”
“이걸 전하고, 다시 답신을 달라 하셨습니다. 중앙회의를 할지, 아니면 조용히 처리할지.”
중앙회의? 처리?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미호의 두루마리에 대체 뭐가 쓰여 있었길래…….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미호에게 가서 전해라.”
백령이 차가운 눈동자로 자타에게 말했다. 지금 그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것 같았다.
“사화와 함께 동쪽 땅으로 오라고.”
“……예?”
사화……를 부른다고?
사화의 방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사화를 동쪽 땅으로 부르는지,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랑과 이랑도 부르는 게 좋겠군.”
“백령 님, 어째서 동쪽 땅으로 부르시는…….”
“전해라.”
“……알겠습니다.”
백령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타 또한 한동안 멍하니, 백령을 바라보았으니까.
백령의 명령에 자타가 짧은 묵례를 한 후 곧장 밖으로 나갔다. 중앙 땅과 서쪽 땅, 그리고 북쪽 땅까지 가야 하는 그는 빠르게 사라졌다.
도대체, 저 서신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거야?
영문도 모른 채로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에게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묻는 것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령…….”
다행스럽게도, 내게로 시선을 돌린 백령의 인상이 조금은 풀렸다.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랑이랑 이랑은 안 부르면 안 돼……?”
나의 말에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