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백령의 집무실 안. 아리가 떠난 후, 백령과 미호는 한동안 미뤄두었던 네 땅의 업무에 관련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회의에 가까웠지만. 미호가 백령을 찾아와, 다른 주인들의 눈을 피해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미호는 갑자기 대화를 멈추더니, 아리가 떠난 자리를 보며 턱을 괴곤, 한숨을 쉬었다.
“아리, 안 오네. 오랜만에 만난 거였는데.”
그녀가 많이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백령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미호 또한 혼잣말일 뿐, 백령에게 답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 터라 서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내 미호가 고개를 돌려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 너도 알고 있지? 하원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다른 땅들도 다 느끼고 있을 거란 것을.”
“알고 있다.”
백령의 대답에 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흑기들도 눈치챘을 거야. 전보다 더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움직이려 하겠지…….”
미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미호는 말을 다 끝맺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지만, 백령은 그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령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그들 사이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미호였다.
미호는 잠시간 망설이다가 떨리는 입술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령. 그날,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과 조금은 달랐을까?”
두리뭉실하게 그녀가 물었지만, 백령은 그녀의 말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원과의 갑작스러운 만남, 그리고 그가 텅 빈 눈으로 보내는 혐오 때문임을.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미호의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고, 슬픔이 어려 있었지만, 그렇기에 백령은 오히려 모질게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란 걸, 미호도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백령의 그런 의도를 미호는 금방 알아차렸다.
“맞아, 쓸데없는 생각이지…….”
그녀가 품고 있던 푸념을 놓았다.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백령, 만일…… 내가 아리에게 구슬을 주지 않았다면, 넌 어떻게 했을 거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백령 또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못 할 것도 없었다.
그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으니까.
“아리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힘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궁을 떠나도록 했겠지.”
백령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미호는 그의 대답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백령, 아리가 성체가 되고, 어느 정도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면, 궁을 떠나게 할 작정이야?”
미호의 물음에 백령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저 눈을 감고, 미호의 다음 말을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신국을?”
백령이 인상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 미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백령, 과연 네가 아리를 보낼 수 있을까?”
미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그에 백령이 오랫동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아리는 이곳에 있을 아이가 아니다.”
백령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그의 특유의 말투.
“백령.”
미호의 자색 눈동자가 백령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리를 잘 부탁해.”
미호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다른 말들은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삼켜버렸다.
***
하원과의 시간을 보낸 후, 애달프게도 자하와의 끔찍하고 혐오해 마지않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자하가 손을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그의 뭉툭하고 짧은 꼬리도 좌우로 흔들렸다.
“아리 님, 이번엔 제가 술래해볼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자하야. 안 그래도 불만이었어. 왜 항상 나만 술래야! 이 나쁜 놈아!
자하가 나무 앞으로 가더니 눈을 가리고는, 나무에 머리를 콕, 박았다.
“자, 시작합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진짜 자하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들어가서 평생 꼭꼭 숨고 싶다…….
어휴, 내 팔자야.
스라소니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지금 정말 희귀하게도 자하가 술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지금 날 구해줄 수 있는 건 백령뿐이야.
집무실에 거의 다다랐을 때 즈음, 안에서 어렴풋이 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령, 과연 네가 아리를 보낼 수 있을까?”
……둘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가,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백령의 대답이 궁금한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아리는 신국에 있을 아이가 아니다.”
이곳에…… 있을 아이.
문에서 귀를 떼고, 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백령의 기가 담긴 수호석 덕분에 호랑이 귀로 보이는 나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닌데 왜 이리 섭섭하게 느껴지는지.
이제 타격이 없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자하랑 숨바꼭질이나 열심히 할걸.
처음으로 백령의 집무실에 온 것을 후회하며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았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안에서 백령이 나타났다.
“……아리?”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냐.”
백령이 양손으로 나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평소였다면, 자상한 그의 모습에 감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내색하기에는, 그가 날 싫어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으응, 그냥. 미호는 갔어?”
“방금 떠났다.”
어쩐지,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미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와라, 아리.”
백령이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내게 말했다.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나였지만, 그의 말을 따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불안하고, 걱정돼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백령이 시녀를 시켜 차와 다과를 내오게 했다. 나는 항상 입에 잘 대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집무실에 올 때면 백령은 언제나 나를 위해 준비해주었다.
이 정도면 사실 백령이 먹고 싶은 게 아닐까…….
그의 성의를 봐서 다과 한두 개를 집어먹었다. 백령은 턱을 괴고 다과를 먹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하원과 어떤 얘기를 했지?”
“으, 응?”
갑작스러운 백령의 물음에 사레들릴 뻔했다.
“미호에 대해서 얘기해써어…….”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으응…….”
백령이 책상에 앉아서 일하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의자에 앉아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백령.”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일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웠어…….”
경황이 없어서 백령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까먹었다. 나를 안전하게 궁에 데려와준 것도, 편히 쉬라고 그의 방을 빌려준 것도, 친히 영아를 불러준 것도, 전부 고마웠다.
“……네게는.”
“응?”
“네게는 무엇도 아깝지 않아.”
……응?
놀란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과 나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그러니 고마워할 것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백령이 다시 일에 집중했다. 나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령, 백령은……. 백령에게는 나는 어떤 존재야?
나랑 있으면 좋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집어삼키고, 가만히 그의 모습만 눈에 담았다.
……나를 보내지 마.
내가 이 말을 내뱉는다면, 백령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밖에서 너무 뛰어놀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백령의 일하는 모습만 보고 있어서 그런 건지,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절로 하품이 나왔다. 이제 버티는 게 한계인 것 같았다.
꾸벅꾸벅 졸던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정신이 아직 희미하게 있을 무렵, 내 몸을 무언가가 덮었다.
백령의 향이 느껴졌다.
익숙한 이 느낌은, 그의 도포인 것 같았다.
***
눈을 뜨니, 너무나도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 방이었다.
나, 백령의 집무실에서 잠들었었지, 참.
백령, 이 매정한 놈. 잠들었다고 나를 냅다 방에다가 데려다 놓다니.
창문을 열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얼마나 잔 건지,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
……나 반나절은 잔 거 아니야?
분명 어제 해질 때 즈음 잔 거 같은데……. 반나절도 넘게 잔 거 아닐까.
내, 내 나이는 원래 잠이 많은 거야. 암, 그렇고말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향하는 길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서 있었다.
“자타?”
“아리 님, 오랜만입니다.”
나를 발견한 자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손에는 두루마리들이 가득했다.
“이게 다 뭐야?”
“아아, 제가 전달해야 할 서신들입니다.”
“서신?”
아, 그러고 보니 자타는 빠르구나……. 그쪽에 특화되어 있다고 했었지.
“아리 님이 보낼 서신은 없으십니까? 바랑 님이라던가, 이랑 님이라던가…….”
왜 하필 예를 들어도 그런 똥개들을 예로 드는 거니, 자타야.
내가 그 둘한테 서신 같은 걸 보낼 리가 없잖아……. 받는 것도 싫은데.
“아니면 은월 님도 계시고요.”
아, 은월!
은월도 참 나쁘다. 서신으로 연락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어떻게 한 통도 보내지 않을 수가 있지?
……바쁘니까 그런 거겠지? 내가 먼저 보내볼까?
“음……. 잠시만 기다려.”
나는 도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도착한 나는, 방을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다.
저번에 여노가 분명히 여기에 뒀던 것 같았는데…….
아, 찾았다!
서랍 안에서, 종이와 붓이 나왔다. 곧장 나는 붓을 들고 생각에 빠졌다.
흐음……. 무슨 얘길 써야 할까?
고개를 갸웃했다. 막상 글을 쓰려니, 무엇을 써야 할지 도통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나는, 정성을 기울여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그때였다.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야, 뭐해?”
“아이, 깜짝이야!”
하지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붓을 떨어트릴 뻔했다.
“뽀뽀, 갑자기 말 걸면 어떡해!”
“아까부터 건드렸는데, 대답을 안 한 건 너잖아, 아리야!”
……내가 그랬나?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편지 써? 혹시 싸부한테?”
갑자기 포포의 붉은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복슬복슬한 그의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도 쓸래, 나도!”
“글자 알아?”
“몰라, 다 까먹었어.”
……뽀뽀는 바보야.
“아리, 네가 대신 적어주면 안 돼?”
“뭐라고 적어줬으면 하는데?”
“뽀뽀, 아, 아니, 아씨, 네가 자꾸 내 이름을 뽀뽀라고 부르니까 나도 헷갈리잖아!”
그건 네가 바보라서 그래, 뽀뽀야…….
그리고 포포나, 뽀뽀나.
포포가 귀를 바짝 세우며 무어라 소리쳤지만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아무튼, 포포가 싸부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적어줘! 뽀, 아니, 포포는 싸부를 정말 많이 동경한다고도! 아, 그리고 올 때 포포 먹을 과자도 가져와달라고 전해줘, 헤헤.”
“응, 알았어.”
“진짜? 고마워, 아리야.”
그걸 믿어? 순진한 뽀뽀 같으니라고…….
대충 포포가 보고 싶어 한다고만 적었다.
하지만 글자를 모르는 포포는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종이가 어느 정도 가득 채워졌다. 종이를 곱게 접었다.
이걸 이제 자타에게 건네줘야겠다.
포포와 함께 방을 나와, 자타에게로 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터인데도 자타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루마리들을 들고.
“아, 오셨습니까, 아리 님.”
자타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자타, 미안해.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기다려줘서 고마워. 이거, 은월에게 전해줄래?”
조심스레 종이를 내밀자, 자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리 님, 겉에 아리 님의 서신이라는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만……. 도장 같은 거 없으십니까?”
응? 도장? 그런 거 없는데…….
아!
반짝이는 영감이 떠오른 나는 방으로 후다닥, 달려가, 붓을 가져왔다.
“뽀뽀, 여우로 변해봐.”
“응? 갑자기? 왜?”
포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빨리, 빨리.”
“아, 알았어…….”
포포가 한번 뽁, 하고 튀어 오르더니 작은 여우로 변했다.
“앞발!”
포포에게 앞발을 내밀라는 듯, 손짓을 하자 그가 떨떠름해 하면서도, 내게 앞발을 내밀었다.
나는 빠르게 그의 앞발을 붙잡고 발바닥에 붓으로 먹을 칠했다.
“아아, 아리야, 가, 간지러, 아아!”
많이 간지러운 건지, 그가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눈가에 눈물도 맺혔다.
“다 됐다.”
붓질을 멈추자, 포포가 겨우 진정했다.
“아, 아리 너 나한테 왜 그래…….”
“뽀뽀, 다시 한번 손.”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내 말에 포포가 앞발을 내밀었다.
포포를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 앞발을 잡아, 내 서신 겉면에 꾹, 찍었다.
작은 여우의 발바닥이 선명하게 찍혔다.
됐다, 됐어.
“이 정도면 되지?”
“예? 아, 예, 아리 님…….”
자타가 ‘방금 뭘 본 거지……?’ 하는 표정으로 나와 발자국 도장을 번갈아 보았다.
“아리, 미워, 내 발바닥은 도장이 아니란 말이야아……!”
“헤헤, 고마워, 뽀뽀!”
환히 웃으며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뽀뽀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