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그로부터 며칠 후, 내가 한 말 탓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마음이 변한 건지, 하원이 궁에 왔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찾아왔다.
“……나한테 볼일, 정말 없어, 하원?”
“없다니까 그러네.”
……거짓말.
하원은 내게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다른 데에 두고 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 보러 온 거 맞잖아, 이 수달아!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계속해서 하는 하원을 보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본인이 아니라는데, 내가 뭐 어쩌겠어.
“아리 님, 사방치기 판 다 그렸어요!”
자하가 손을 흔들며 내게 외쳤다.
맞다, 오늘은 자하와 놀아주는 날이었지.
사방치기를 한번 해본 자하는, 이후 사방치기에 완전히 재미 들어 버렸다. 틈만 나면 나와 포포에게 함께 사방치기를 하며 놀자고 애원했다.
그리고 때마침, 오늘은 밖에서 뛰놀기 너무나도 적합하게 맑았다.
“……또 사방치기야?”
포포가 자하가 그린 사방치기 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뽀뽀, 너의 한숨에 동감을 표하는 바이지만…….
숨바꼭질보단 백 배, 천 배 나아, 뽀뽀야…….
사방치기 정도면 할 만한 편이지, 암, 그렇고말고.
“어서 해요, 아리 님!”
자하가 짧고 뭉툭한 꼬리를 흔들며 눈을 빛냈다. 그의 귀는 바짝 솟아오른 지 오래였다.
저렇게나 좋을까…….
나는 뒤를 돌아, 하원을 바라보았다.
“하원, 같이 할래?”
“관심 없어, 저런 시시한 놀이 따위.”
“으응, 그렇구나…….”
하지만 난 보았다. 하원의 예쁜 남색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 것을.
그뿐이랴, 자하가 그려놓은 사방치기 판을 힐끔힐끔 보느라 그는 상당히 바빠 보였다.
“아리 니이이임!”
“알았어, 짜하. 갈게.”
자하가 날 저리 부르는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니, 얼른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렇게 자하와 나, 포포는 셋이서 열심히 사방치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또 사방치기냐며 투덜거리던 포포도 막상 시작하니, 승부욕을 불태우며 열심히 임했다.
그때까지도 하원은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왠지 이번에 같이 하자고 하면 할 것 같은데…….
“하원, 진짜 안 해? 같이 하자.”
“나한텐 명령할 생각은 하지…….”
“부탁이야.”
그의 동그란 귀가 잠시간 부르르, 떨렸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한 번만, 해보도록 하지.”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수달 같으니라고.
하원이 헛기침하며 사방치기를 하기 위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갑자기 끼어든 하원에, 자하가 불만이 많은 얼굴이 되었지만, 그는 하원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 사방치기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무효죠, 하원 님.”
“이게 왜 무효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안 시켰으면 어쩔 뻔했어, 진짜.
자하와 하원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나는, 곧 지루함을 느끼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아리야, 어디 가?”
“그러게.”
두 신수 사이에 낀 포포가 내 목적지에 관해 물었지만, 알려주면 따라올 것이란 것을 잘 아는 나는, 그에게 대충 대답한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뽀뽀, 힘내.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백령의 집무실이었다.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미호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이번엔 미호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가감 없이 백령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창 대화 중이었던 백령과 미호가 동시에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리 왔네.”
미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미호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가 그리 반갑지 않다.
아직 하원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백령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미호가 날 보며 고운 입을 열었다.
“백령에게 하원에 관한 얘기는 들었어, 아리야.”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걱정 안 해도 돼. 그를 아직 설득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하원을 그 강에서 끌어낸 거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거니까.”
“응?”
“그러니까, 무작정 이곳에서 널 데려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고 그를 설득하는 걸 포기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를 설득하란 거구나…….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난번처럼 무작정 날 데려가려 하지는 않아서.
시간이 꽤 지났으니, 미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기에 궁에 방문한 줄로만 알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말에 긴장했던 가슴을 겨우 쓸어내릴 수 있었다.
“오늘 전할 말은 그것뿐인가?”
백령이 미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미호 또한 백령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어깨를 으쓱이며 백령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궁금했어. 영아가 아리 때문에 네 궁에 방문했었다기에.”
영아가 궁을 방문했었다고?
내 탓에……?
저번에 사흘 정도 쓰러져 있었던 날, 그때임이 틀림없었다.
“신경 쓸 정도가 아니라고 그녀가 네게 말하지 않았나.”
“그랬지. 하지만 아리 일이니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오는 김에 겸사겸사 보고도 듣고.”
미호의 서기 어린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아, 미호, 나 뭐 좀 하나 물어봐도 돼……?”
그녀에게 조심스레 묻자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아리라면 내 꼬리가 몇 개인지도 알려줄 수 있어. 난 보이는 꼬리가 다가 아니거든.”
“그런 건 필요 없다.”
미호의 말에 백령이 무심히 그녀를 저지했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 정보긴 해, 미호.
“요즘 남쪽 땅은 어때?”
“남쪽 땅? 이제 안정을 찾아가지. 곧 은월이 청화관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오랜만에 듣는 은월의 소식이었다. 또한, 곧 청화관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건 근래 들은 소식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호, 역시 너였냐.”
그때였다. 백령의 집무실 문이 거세게 열리고 문 앞엔, 미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하원이 서 있었다.
“……하원. 오랜만이네.”
“역겨운 인사는 집어치워.”
아니, 사방치기나 하고 있지, 왜 여기까지 온 거래…….
그것보다 하원, 백령한테도 이렇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미호한테는 극심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기운에 백령의 집무실 분위기가 한순간에 낮게 가라앉았다.
그때도 물론, 백령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기는 했지만, 하원이 저 정도로 혐오감이 담긴 눈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원의 격한 반응에 저번에 자하와 백령의 대화가 떠올랐다.
“차라리 미호 님이…….”
“미호만 보면 토악질이 난다더군.”
그래. 그랬었지…….
하원이 미호를 싫어하는 이유는……, 저번에 이랑이 말한 그것 때문인가.
시호를 이해해주지 못해서? 하지만 그건, 미호와 시호의 성향 차이인 탓이 클 텐데……. 저렇게까지 혐오할 일인가?
내 상식으로는 하원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분.
“백령, 너는 어떻게 미호와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는 거지?”
하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텅 빈 눈으로 백령에게 물었다. 백령은 그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냄새마저 이리 역한데.”
하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원의 말에 미호는 눈을 감았다.
미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하원이 나가려는 듯, 뒤를 돌았다. 더는 미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싫은 것처럼 보였다.
“시호가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원.”
그런 그를 향해. 백령이 낮게 읊조렸다. 그에 하원이 잠시 우뚝,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완전히 집무실을 나갔다.
“다녀올게.”
자리에서 일어나, 하원을 따라가기 위해 발을 바삐 움직였다.
“아, 아리야!”
미호가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나는 집무실에서 나온 후였다.
하원의 기운을 쫓아 그를 따라갔다. 그는 정자에 앉아,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탓인지, 하원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그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하원이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남색 눈동자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 내게 시호의 얘기를 했던 그때처럼.
“하원.”
“…….”
“미호가 왜 싫어?”
그를 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나의 물음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게 말할 의무는…….”
“궁금해.”
그의 말에 칼같이 대답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말해줘. 듣고 싶어.”
내 말을 들은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아무런 소리도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하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호가 죽기 전, 그녀의 구슬을 앗아간 건 미호였으니까.”
……뭐?
이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미호가 시호의 구슬을 앗아갔다고?
하지만 미호는, 시호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던 것 같은데.
“그 구슬이 네게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지.”
그가 날 보며 말을 덧붙였다.
내 안에 있는 구슬이…… 미호가 시호에게서 앗은 구슬이라고?
“시호가, 미호에게 준 거 아니야?”
시호는 자유를 원했으니까.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가 내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호도, 시호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어.”
“…….”
“시호를 많이 사랑한 것 같았어, 미호.”
날 볼 때마다 슬픈 눈망울을 하는 것. 그건 시호를 그리워하는 것이란 걸 나는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시호라는 신수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래, 그녀의 죽음은 미호의 탓만이 아니지.”
그는 덤덤히 말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슬픔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저 눈빛은…….
“네 탓도 아니야.”
“……뭐?”
하원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내게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많이 힘들었구나, 하원.”
하원의 눈이 커졌다. 마치,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네 잘못도, 미호의 잘못도 아니란 건 알고 있어, 하원.”
하원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시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심적으로 힘들어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백령과 미호에게 더욱 날을 세우며 적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원 자기 자신마저도.
그래서 여태껏 누구보다 시호의 죽음에 묶여 있었던 것일 거다.
하원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의 남색 눈동자에 드리웠던 슬픔이, 아까와는 다른 것 같았다.
뭔가, 지금은 좀 개운해 보이는 느낌이랄까…….
“넌 신기하네.”
“응? 뭐가?”
“다른 신수가 말했다면, 그 목을 비틀어버렸을 텐데, 너라서…….”
모, 목?
황급히 내 목을 감싸, 보호했다. 포포가 꼬리를 보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맙다.”
“어?”
방금 하원이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거야?
“그렇다고, 널 인정한 것은 아니다, 아리. 넌 시호가 아니…….”
“으응,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건 그만 말해도 돼, 하원아…….
하원이 흘린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면.”
“응?”
“어쩌면, 네가 준 토끼풀, 정말 효력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는데…….”
응? 토끼풀?
그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가 어제 그에게 주었던, 네 잎의 토끼풀이었다.
……그걸 들고 다녔어, 하원?
사실 누구보다 그 미신을 믿은 게 너 아니었을까……. 뽀뽀는 그거 궁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내팽개치던데.
“하원, 그거 있잖아…….”
그렇게 들고 다니면 금방 시들어버려…….
나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외치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기에.
“아리니이이임, 여기 계셨군요!”
“짜하……?”
“저와 오랜만에 단둘이 사랑의 숨바꼭질 하는 거 어떠세요?”
사랑의 숨……, 뭐?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래, 미호에겐 죄가 없다. 적어도 미호는 저기 달려오는 저 스라소니처럼 자유를 앗아가고, 지옥의 숨바꼭질을 하자며 달려오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자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짜하, 저리 가.”
오면 아주 죽을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