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흐음…….”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아리 님?”
여노가 내게 다정한 투로 물었다.
“응?”
“요즘 들어 꼭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한숨만 자꾸 내쉬잖아요.”
요즘 들어……?
“……나 요즘 계속 이랬어?”
“네, 아주, 틈만 나면 그러십니다.”
아, 그랬었구나…….
요즘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단 말이지……. 나에 대해서도, 백령에 대해서도,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하원에 대해서도.
하원은 백령의 집무실에서 내게 인사 아닌 인사를 한 이후로, 궁에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뭘 하려 해도……, 하원이 찾아와야 말이지…….
하원과 친분을 쌓는 것도, 그의 마음을 조금씩 여는 것도, 모두 그와 만나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제게 한번 털어놔 보는 건 어떠신가요?”
여노가 눈을 접으며 미소지었다.
흐음……. 그래, 여노의 지혜를 조금 빌려볼까? 요즘 자하랑만 붙어 놀아서 바보력이 옮은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여노니까.
“있잖아, 여노. 하원이 궁에 왜 안 오는 걸까?”
“하원 님이요? 음…….”
하원이라는 말에 여노가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이내 여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 님은, 평소엔 똑똑하셔도 이런 부분에선 항상 둔감하세요.”
여노, 그거 내 욕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여노를 바라보자, 그녀가 활짝 미소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작은 한숨을 뱉었다.
웃는 낯에 어떻게 침을 뱉겠어…….
“하원 님은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응? 뭐를?”
“아리 님을요.”
무슨 소리야, 그게.
하원은 나를 전혀 반기는 기색이 없었는걸……. 강에서도 그랬고, 백령의 궁에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하원은…….”
“아리 님, 하원 님은 우리와는 달리,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시는 분이셔요.”
“응?”
“그분을 여기로 끌고 온 건 아리 님이시잖아요.”
여노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리 님은 자신을 조금 더 믿으셨으면 좋겠어요.”
여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노는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하원한테 갔다 올게!”
여노에게 통보한 후 바삐 발걸음을 움직였다.
“아, 아리 님! 잠깐만요!”
여노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하원을 찾아가는 게 더 급했다.
나중에 말하자, 여노야.
일단 바로 옆 방으로 들어가서, 여우의 모습으로 엎드려 과자를 먹고 있는 포포의 꼬리를 잡고 무작정 달렸다.
“뭐, 뭐야! 아, 아리야, 이거 놔, 갑자기 왜 그래?”
됐어, 넌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돼, 뽀뽀야.
“내 꼬리이……. 흐엉.”
포포가 볼멘소리를 꼬리 타령을 하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분명, 여기 어딘가였는데…….
저번에 미호가 준 빛을 따라갔더니, 백령이 있었던 그 강.
흐음…….
저번엔 빛에 집중하여 쫓아갔기에, 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아리야, 나 좀 놔주면 안 돼……?”
“아, 맞다.”
포포가 울먹이며 나를 올려다보자, 그제야 아직까지 포포의 꼬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신폭신한 포포의 꼬리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포포가 꼬리를 부여잡으며 콩, 하고 착지했다.
“아리, 너 미워…….”
“미안해, 뽀뽀. 대신 이거 줄게.”
소매 안에 넣어두었던 포포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포포가 눈을 반짝이며 양손으로 과자를 집어갔다.
……단순한 뽀뽀.
그러고 보니 이거 은월이 나한테 했던……. 아, 아니야, 난 저렇게 단순하지 않았어!
“어? 근데 여긴 또 어디야?”
과자를 먹느라 바쁘던 포포가 반 정도 먹었을 때, 주위를 둘러보며 내게 물었다.
“하원이 있을 만한 강을 찾아야 하는데, 통 모르겠어서…….”
“응? 아리 너는 그냥 기운으로 찾으면 되잖아.”
기운으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헤매고 있겠냐, 이 여우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포포를 노려보았다.
“왜, 왜…….”
“안 느껴지니까 그렇지!”
나의 말에 포포가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했다.
“아, 혹시 하원이라는 애가 그 수달이야?”
포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하원이 들으면 포포 물벼락 맞을 것 같은데…….
“수달이면, 물 안에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물의 흐름에 집중해봐, 아리야.”
포포가 자신의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말했다.
물의 흐름……?
눈을 감고 구슬의 힘을 느끼며 물의 흐름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 물의 흐름이, 그곳에 있을 하원의 기운이 느껴졌다.
“……찾았어!”
눈을 뜨고 포포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포포가 헛기침을 하며 눈에 띄게 뿌듯해했다.
그의 폭신한 꼬리가 살랑이고 있었으니까.
“근데, 뽀뽀.”
“응?”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았어?”
나의 물음에 포포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도 모르겠어, 헤헤. 저번에 싸부한테 주워들은 것 같아.”
“그래?”
“아리야, 싸부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도 궁금해 죽겠는데.
은월을 못 만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어서 남쪽 땅의 일이 해결되면 좋겠는데…….
잠시 든 은월의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은월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도 내가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미호한테 안 붙잡혀 가려면, 말이지.
“어서 가자!”
다시 한번 포포의 꼬리를 잡고 내달렸다. 그에 포포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내 귀에 들리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저번에 백령과 불꽃놀이를 관람한 강이 나왔다. 밤에 달빛을 받은 그 강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햇살을 받는 지금의 강도 매우 아름다웠다.
강 앞에 도착한 나는 두리번거리며 하원을 찾느라 바빴다.
“흐음……, 분명 여기 있는 것 같은데.”
“하원, 걔 수달이라며. 그럼 물속에 있겠지, 아리야.”
그런 나를 본 포포가 옆으로 누워서는, 혀를 차곤, 지루한지 하품을 했다.
아니, 내가 물속을 어떻게 보냐고! 그러니까 기운 찾아 두리번거리는 거지! 바보 여우!
우씨, 바보 여우한테 바보 취급받으니까 열 배로 기분이 나쁘네.
“포기해, 아리야. 수달들은 고집이 세서 잘 안 튀어나와.”
그때였다. 강물이 소용돌이치더니, 그 속에서 하원이 등장했다.
“어? 수달 녀석 나왔다!”
포포가 하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원의 등장 이후에도 강물은 여전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거, 분명 저번에도 겪은 것 같아…….
지난번의 악몽을 떠올린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어디 가?”
촤아악!
포포의 머리 위로 물벼락이 쏟아졌다.
……내 저럴 줄 알았어.
포포가 고개를 흔들며 털에 붙은 물기를 털어내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물벼락이지.
“야! 너 왜 나한테 물을 들이부어!”
……네가 한 언행을 돌아봐봐, 뽀뽀야. 아무리 물속이라도 하원이 못 들었겠어?
열 받은 포포가 앞발로 하원을 손가락질하며 물었지만, 하원은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거기 있으래?”
하원의 대답에 바동거리는 포포를 저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 이!”
포포의 손에 들려있던 나머지 과자를 입속에 넣어준 후에야, 그는 진정했다.
어쨌든, 뽀뽀 덕분에 하원을 불러냈으니…….
이 여우를 데려온 게 잘한 일이긴 한……거겠지?
얌전해진 포포를 안아들고 하원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을 느낀 하원 또한 내 쪽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뭐지. 아리?”
그가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흐음…….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하원, 네가 궁에 안 오길래 그냥 내가 온 거야.”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여기 오는 것도 내 맘인데?”
나의 말에 맞받아칠 말을 찾지 못한 하원은, 그저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전히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수달의 귀와 꼬리를 한 그는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 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빤히 쳐다볼 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기 싫으면 말고.”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어차피 그가 얌전히 내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 여기 토끼풀 있네.
그저 눈앞에 보이는 토끼풀에 구미가 당길 뿐.
“아리야, 뭘 그렇게 봐?”
풀밭을 빤히 바라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품속에 안겨 있던 포포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 또한 고개를 숙여 포포와 눈을 마주쳤다.
“토끼풀.”
“토끼풀?”
“뽀뽀, 우리 네 잎으로 된 토끼풀 찾아볼까?”
포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잎으로 된 토끼풀은, 행운을 가져다준대.”
“누가 그래? 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몰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정작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찾아볼래?”
“흐음……. 좋아. 거기다가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거지?”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과, 소원을 이뤄주는 건 조금 다르지 않아, 뽀뽀야……?
포포의 이해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품속에 있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폴짝, 뛰며 본래의 인간형으로 변한 포포는 토끼풀을 찾느라 바빴다.
나도 어서 토끼풀이나 찾아야지.
나와 포포는 바닥에 앉아서 풀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네 잎으로 된 토끼풀을 찾기 바빴다.
그 광경을 멀찍이 서서 멍하니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안 가?”
“토끼풀 찾는 중이야.”
“그걸 왜 여기서…….”
“그야……, 토끼풀이 여기 있으니까?”
그에게 시선을 줄 새는 없었기에, 여전히 무성한 토끼풀들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잎으로 된 토끼풀 찾는 거, 은근 힘들구나…….
“네 잎으로 된 게 있기는 한 거야?”
포포가 인상을 찌푸리곤 짜증을 내며 말했다.
얼마나 찾았다고, 벌써 짜증을 내?
하여간, 간사한 여우 녀석.
“아리, 이제 그만 네 궁으로 돌아가. 여긴 당분간 내 영역…….”
“어, 찾았다!”
그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수많은 토끼풀 사이에서 네 잎의 토끼풀을 본 내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조심히 네 잎의 토끼풀을 꺾었다. 모양도 예쁘고, 상처도 하나 없이 깨끗한 토끼풀이었다.
“뭐? 나도 볼래, 나도!”
포포가 내 쪽으로 폴짝, 폴짝 뛰어왔다.
“헐, 정말 네 잎이네?”
“봐봐, 그렇다니깐.”
“나도 찾을래, 나도!”
포포가 다시 한번 열정을 불태우며 토끼풀을 찾기 바빴다.
하원의 말을 전부 무시한 탓일까, 그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천천히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그래 보았자, 수달이었지만.
“아리, 다시 한번 말하는데, 여긴 내 영역…….”
“이거, 너 줄게.”
하원에게 방금 꺾은 네 잎의 토끼풀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적잖게 당황하며 나와 토끼풀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누가 이런 풀을 받고 좋아한…….”
“행운을 가져다준대.”
“미신이야, 그거.”
“그래서?”
“뭐……? 그러니까, 그런 건 필요 없…….”
“미신이면 뭐 어때? 정말 행운이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하원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원, 남이 준 성의는 무시하는 게 아니야.”
나의 말에 그가 다시 여전히 토끼풀을 내밀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가져가, 주는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데.
“……넌 시호가 아니야. 내게 명령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부탁이었는데?”
“…….”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가 내민 토끼풀을 받았다. 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내게 항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게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는 건 알지만, 받아두도록 하지.”
……아니,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니까?
포포에 이어, 하원의 이해능력에 감탄한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얘도, 바보야…….
“나도 찾았어, 아리야!”
“축하해, 뽀뽀.”
네 잎의 토끼풀을 찾더니, 기쁨에 폴짝폴짝 뛰는 포포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제 볼일이 끝난 것 같으니까, 궁으로 돌아가 볼까?
하원이 내가 준 네 잎의 토끼풀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하원.”
“…….”
“궁에 놀러 와, 자주.”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조금은 내게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아서.
솔직히 나는 하원이 바로 강가에 떠내려 보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하원아, 널 조금 오해했었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