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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85)화 (85/167)

85.

푸른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호화로운 방. 하지만 몇백 년 동안 이 방은 주인이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백령의 방, 넓은 침대에는 아리가 곤히 자고 있었다.

백령이 자신의 방에 아리를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리의 방은 백령의 방보다 신수들의 출입이 잦을 수밖에 없으니, 신수들이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 자신의 방에 데려온 것이다.

“그래서, 아리의 상태는 좀 어떻지?”

백령의 옆에는 그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온 영아가 서 있었다.

늦은 달밤에, 찾아온 자타를 보고 영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찰에는 아리가 쓰러졌으니 약을 지어달라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아리의 상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녀가 약을 지을 수는 없었기에 직접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영아가 아리의 몸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령 님도 아시다시피, 그냥 잠시 기절하신 겁니다. 저번보다 기력이 많이 쇠하신 것 같아요. 그간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영아가 아리의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열도 있으시고요. 탕약을 올릴 테니, 꾸준히 먹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영아의 말을 들은 백령이 잠시간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 물을 맞은 것이 원인인가.”

백령은 하원 탓에 물벼락을 맞아 덜덜 떨던 아리가 떠올랐다. 또한, 아리는 물속으로 뛰어들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백령은 그 탓에 열이 나는 것이라 짐작했다.

이미 자초지종을 들은 영아였기에, 백령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영아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영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가 안타까워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아리는 구슬의 힘을 하사받은 자였다. 그런 자가 물 좀 맞았다고 이리 열이 오르며 기절을 할 리가 없었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마음고생’이 심하셨다고. 마음이 좋지 않으니 그런 작은 추위에도 열이 나는 거지요.”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 영아는 굳이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

영아가 옅은 미소를 띠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아리 님을 너무 몰아넣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백령 님.”

‘몰아넣는 다라…….’

영아의 말에 백령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아리의 의견을 항상 존중했다고 생각했기에.

영아 또한 백령이 이런 쪽으로는 감각이 매우 둔하다는 것을 알기에, 구태여 설명을 해보았자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더 설명 드려볼까…….’

“아리 님은, 생각이 많으신 분이세요, 백령 님.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매우 여린 분이시기도 하고요.”

영아가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기에 더는 그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백령이 깨달아주기만을 바랄 뿐.

영아를 보던 시선을 돌려 아리를 바라본 백령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그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모습을 영아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약재는 두고 가겠습니다. 서화원을 율이에게만 맡겨 놓은 터라, 제가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요.”

“이만 가봐도 좋다.”

백령이 아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에 영아는 백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 참, 백령 님.”

그녀가 방을 나가기 전, 잊고 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기에 방문을 열다가 뒤돌아 그를 불렀다.

백령은 그녀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아리만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영아는 그냥 말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곧 설산에 약재를 구하러 가게 되는데, 혹,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필요 없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령이 단칼에 거절했다.

영아가 백령의 답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잠시 아리를 쳐다보았다.

“예, 그리 알겠습니다.”

영아가 백령의 방에서 완전히 나갔다. 백령은 흔들림 없는 푸른 눈으로 아리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영아가 나간 백령의 방 안엔, 아리와 백령, 둘만이 존재했다.

아리를 보던 백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도 힘든 것이냐, 아리야.”

그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다정히 물으며 아리의 머리에 자신의 큰 손을 얹었다.

달빛이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왔다. 아리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선명히 백령의 눈에 들어왔다.

백령의 아름답고도 신성한 푸른 눈은, 그런 아리를 따뜻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그에게서 찾기 힘든 따뜻함이었다.

***

행복한 꿈을 꾸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이 그리도 좋았는지는 누군가 먹을 칠해버린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느껴졌다.

그 꿈이 깨어나기 싫을 정도로 달콤했지만, 더는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나의 시야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여긴……?

한순간에 잠이 확 깨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방이었다.

푸른 장식들…….

하지만, 동쪽 땅, 백령의 궁임은 틀림없었다.

이토록 호화스러운 방은…… 백령의 방인가?

유일하게 이 궁에서 내 방보다 호화스러울 수 있는 방. 그것은 백령의 방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방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어.

그랬다. 백령의 방은 마치 주인이 없는 방처럼 누군가 살아온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백령은 항상 집무실에만 있었으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몸이 찌뿌둥했다. 너무 잠을 잘 잔 탓이리라.

내가 어쩌다 이곳에서 잠을…….

하원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그의 강으로 뛰어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 수 없다. 알 방법 또한 없다.

……일단 백령을 찾아가 보자.

몸을 움직였다. 방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궁의 풍경이 보였다.

열심히 백령의 집무실로 향하던 중, 되게 오랜만에 보는 듯한 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리, 너 대체 어디 갔었어?”

그는 포포였다.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며 작고 짧은 다리로 내게 총총, 뛰어오고 있었다.

“으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러고 보니 뽀뽀한테 하원을 만나러 간다고 말을 안 했구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얼씨구, 요망한 여우가 내 걱정도 다 하고, 웬일이래.

“사흘이나 사라지면 어떡해!”

……사흘?

이상하다, 사흘일 리가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포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사흘이라니? 분명, 우리 어제도 만났…….”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사흘이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고. 고양이랑 강아지도 네 행방을 모른다고 걱정했어.”

“응……?”

자하랑 여노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고?

나는 분명 백령의 방에…….

“형님은 그저 우리한테 ‘신경 꺼라.’ 라는 말만 했다고. 그것도 엄청 차갑게. 하지만 멋있으셨어.”

백령이 감춘 거구나. 나 편히 쉬라고 그런 건가?

“하여간, 고양이 녀석은 사흘 내내 눈물바다였어. 너 보면 한 사흘 밤낮은 붙잡고 울어댈 기세였다.”

……자하는 최대한 마주치지 말자. 마주쳐도 백령과 함께 자하와 마주하도록 하자. 단둘이 마주치는 건 가급적이면 피해야 해.

아리야, 정신만 차리면 스라소니한테 붙들리지 않을 수 있다…….

굳은 다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본 포포는, ‘뭐야, 아리 이상해졌어…….’라며 나를 보며 기겁을 했다.

그것보다 사흘이나 내가 쓰러져 있었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오래 잠들었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흘이라니.

“그것보다, 너 어디 있었어? 궁 안에 있긴 했잖아.”

응? 기운을 잘 느끼지도 못하는 포포가 그걸 어떻게 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네가 사라졌다면 내 가…….”

“응?”

“아, 아니야! 어쨌든 너 어디 있었어!”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이 요망한 여우가.

“어디 있었냐며언…….”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포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포가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응, 어디에 있었는데?”

“흥, 안 알려줘.”

포포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 포포가 적잖게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망울이 크게 떨렸다.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너야 말로다, 이 녀석아.

팔짱을 끼고 포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의 복슬복슬한 여우 꼬리가 긴장한 것처럼 바짝 솟았다.

“너부터 말해봐. 내가 사라지면 네가 뭐?”

“왜,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요것 보게, 자기가 하는 건 괜찮고, 내가 하는 건 안 된다?

이 여우, 사고방식이 영 글러 먹었어.

“뽀뽀, 그거 나쁜 버릇이야, 고쳐.”

입을 삐죽, 내밀며 포포에게 말하자, 포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리, 미워!”

포포가 등을 돌리고는 열을 냈다. 그의 귀 또한 바짝 솟아서는, 붉게 물든 것 같았다.

하여간, 어리다니까.

“나, 백령 보러 갈 건데……. 내가 밉다니까 뭐,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가는 수밖에…….”

“뭐, 혀, 형님?”

한동안 열을 내던 포포는 어느새 가만히 멈춰서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뽀뽀야.

이미 난 포포의 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물론, 나의 예상대로 포포는 고민을 멈추고 쫄래쫄래 나를 따라왔다.

……단순한 여우 같으니라고.

포포와 함께 백령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어? 이 기운은……?

백령의 집무실에서 백령뿐만 아닌, 다른 신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익숙하진 않지만, 분명 알고 있는 기운.

확실해, 이 기운은……!

망설이 없이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나의 등장에, 이야기를 나누던 백령과 또 다른 신수가 나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하원……?”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익숙하지 않은 기운의 주인, 하원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나, 그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한 거야?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작고 짧은, 동그란 귀. 귀의 끝은 연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또한, 짧고 굵은 털들. 그리고 길고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꼬리.

이제야 그가 어떤 신수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웬 수달……?”

포포가 하원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다. 하원, 그는 수달이었다.

그래서 강 안에 숨어 있었던 거구나…….

“네 부탁대로 이곳에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널 인정한 건 아니야.”

그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그래, 하원아…….

어째서일까, 그가 수달인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귀여워.

문득 자하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강 앞에 시체가 나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건, 그냥 수달의 습성이잖아…….

자하, 바보.

“대답은?”

“응?”

아, 맞다. 하원이 수달이란 것만 생각하느라 그에 대한 답을 안 했구나.

“응, 알고 있어.”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남색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백령, 그럼 하원은 이 궁에서 지내는 거야?”

백령을 보며 물었다. 나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원은 물이 있는 곳을 좋아하지.”

물? 아, 수달이니까?

그렇다면, 궁 근처 강에서 지낸다는 거구나…….

“……일단은 지켜보겠어. 너와 백령,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하원이 나와 백령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하원의 말에 겁먹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대하지.”

백령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를 데려온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지, 참…….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그가 교육자로서 네 땅의 주인이 될 자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

……그러려면 그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은데.

“하원.”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날을 세우며 나를 노려보았다.

무섭진 않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그를 대할 수도 없었다.

“고마워.”

나의 말에 그가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렸다.

“넌 시호가 아니야. 내게 명령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으응, 그럴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왠지 앞으로도 평탄치만은 않을 거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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