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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84)화 (84/167)

84.

“부탁? 허.”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공격적인 말투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리야, 기죽지 말자. 기죽으면 얕보여서 물릴지도 몰라…….

짧게 심호흡을 한 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응, 부탁.”

당돌한 나의 모습 탓인지, 아니면 부탁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여기서 꺼져.”

그가 나와 백령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날카로운 그의 말투에도 백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령의 그러한 모습 덕분에 나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숨을 가다듬은 후, 나 또한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 옆엔 지금 백령이 있으니까…….

다 괜찮아.

그는 그런 나와 백령의 태도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이없어했다.

“허, 다짜고짜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부탁이 있다고? 백령, 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아니, 백령이 아니라 내가 한 말인데 왜 백령한테 그래?

“내가 부탁하는 거야, 하원.”

그러니까 백령에게 뭐라 하지 마.

나의 말에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당황해서 그런 건지, 그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내가 시호를 닮았기 때문인 걸까…….

하원이 시호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수라는 것은, 자하로부터 그에 관해 들은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여태껏 보여준 그의 태도들이 놀랍지 않았었다.

하지만 난 시호가 아닌걸…….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다. 난 시호가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그를 만나기 전에도, 지금도,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해볼 수 있는 만큼, 해볼 거야.

“내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시호뿐이야.”

흔들리는 눈동자와는 달리,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이미 알고 있음에도, 네게 부탁하는 거야.

그의 단호한 말에도 여전히 그의 짙은 남색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마음이, 내 뜻이 그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이내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한동안 적막감이 흘렀다. 흐르는 강물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왔다. 이후,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네가 시호를 따랐다는 건, 여기 오기 전 들어서 알고 있어, 하원.”

시호에게만 충성을 바치던 신수, 하원.

하원은 내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시선 또한 여전히 내가 아닌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난 보다시피 시호가 아니야. 그래서 네게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러 온 거야.”

‘부탁’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며 말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의 구겨졌던 표정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았다.

“부탁이라…….”

그가 혼잣말처럼 낮게 읊조렸다.

“내 부탁을, 한 번만 들어보지 않을래, 하원?”

조금 풀어진 그를 보며 잽싸게 물었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들어보지, 일단.”

그가 팔짱을 끼며 말해보라는 듯, 내게 시선을 두었다. 나는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은월이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갔을까?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항상 은월이 떠올랐다.

은월이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던 탓일까?

그를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가주었으면 해.”

하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교육이니, 뭐니, 말을 꺼낸다면 그는 칼같이 거절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루보다도 낯을 가리는 신수. 그리고 내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신수가, 내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을 교육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의 마음을 조금 열고 나를 따라오게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급하면 안 돼, 오히려 일을 그르칠 테니까.

“네 선택이야. 물론 난 하원, 너의 선택을 존중해. 네가 날 따라올 의무도 없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야.”

“……선택이라고?”

일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여기서 정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하원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꺼져.”

하원이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강물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나, 거절당한 거야?

전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불안해하긴 했지만, 막상 거절을 당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나는 작게 심호흡한 뒤, 백령이 말릴 틈도 없이 하원이 들어간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 오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 같다.

“아리!”

백령이 크게 당황하며 나를 불렀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이미 내 몸은 물속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니까.

물 안에서 눈을 뜨고 하원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몸이 쉽사리 따라주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지.

백령이 구해줄 거라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하, 하워온…….”

물에 막혀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슨 자신감이었던 거야, 나…….

늦은 후회를 해보았지만, 그도 잠시, 더는 생각할 수도 없이 눈이 스르륵, 감겼다.

***

백령이 아리가 들어간 물속을 바라보며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그의 푸른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담겼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백령의 고운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백령은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아리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은 곧, 하원이었으니까.

아리가 들어간 강은 하원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하원의 힘으로 철저한 결계가 처져 있는 곳이었기에 하원이 몸담은 강은 아무 신수나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잘 알고 있는 백령은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리가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아리에게 어느 정도 하원이 마음을 열었다는 것.

하지만 백령에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리를 구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다른 신수의 결계, 그것도 하원 같은 자신의 영역이 명확한 신수의 결계를 깨는 것은, 금기로 명시되어 있는 사항이었다.

특히나 상대가 하원 같은 신수라면 아무리 백령이라도 곱게 넘어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백령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령의 몸을 푸른 기운이 감쌌다. 아까보다 그의 기운이 훨씬 강해졌다. 백령이 결계를 부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강으로 다가가 하원의 결계를 부숴버리려던 찰나, 강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왔다.

백령이 눈부신 하얀 빛에 얼굴을 살짝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내 그 빛 속에서 하원이 나타났다.

양손에는 아리를 안은 채로.

“……아리.”

백령의 눈에 하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안고 있는 아리만 보일 뿐.

“잠깐 기절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그건 좀 거뒀으면 하는데?”

하원이 백령의 주위를 감싸는 강한 푸른 기운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백령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푸른 기운이 사그라들고, 강에서 새어 나오던 빛도 점차 사그라져 갔다.

하원이 천천히 백령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령은 그를 따라 시선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하원이 강 바로 앞, 풀이 무성한 곳에 조심스레 아리를 눕혔다.

겉으로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지만, 백령은 황급히 아리의 상태를 보느라 바빴다. 그러던 와중, 하원이 백령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 정체가 뭐지?”

하원의 물음에 백령이 한동안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말했지 않은가.”

“뭐?”

백령의 말에 하원이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찡그렸다. 백령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그였다.

“‘아리’라고.”

백령의 친절한 설명에도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령의 말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기보다는, 자신의 물음에 저리 대답하는 백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백령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령은 구태여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거지, 하원?”

백령이 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원이 그런 백령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백령은 이미 하원의 답을 알고 있었다. 아리가 강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돌렸다는 뜻이었으니까.

“속셈이 뭐야?”

하원이 백령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의 눈길을 백령은 보란 듯이 무시했다.

“그 아이, 아니, 아리를 내 앞에 데려온 속셈이 뭐냐고.”

하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백령을 원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신수, 시호가 죽은 이후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그였다. 그래서 강에 숨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하원 앞에 시호와 똑 닮은 아이를 백령이 데려왔다. 하원은 도저히 그 아이를 보고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가 말하지 않았나.”

백령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원은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백령의 푸른 눈과 하원의 짙은 남색의 눈이 마주쳤다.

“모든 건 네 ‘선택’이라고.”

백령의 말에 하원이 아리를 바라보았다. 그리운 얼굴, 꿈에서만 그리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리는 그녀가 아니었다.

“……백령, 난 네가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어.”

“동감이군.”

백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원이 말을 맞받아쳤다. 하원은 기가 찼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백령은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았다. 시호의 죽음에 저보다 분노하던 그가 맞는 건가?

“……듣기로는 설산 조사도 포기했다던데.”

“강 속에만 틀어박혀 있으면서, 그런 건 잘도 주워듣는군.”

“물은 어디에서든 소리를 듣는 법이지. 어디에나 있으니까.”

하원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다 들으려 하지 않지만, 시호에 관한 소식만큼은 들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원이 강물을 바라보다 아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난 시호가 아니야.”

“난 아리야. 시호가 아니라, 아리야, 하원.”

제게 당돌히 말한 아리가 떠올랐다. 시호가 아니라, 아리라 말하는 아이는, 당돌한 모습마저 시호와 닮아있었다.

‘나도 안다. 그녀가 시호가 아니라는 것쯤은.’

하원이 아는 시호와, 아리는 닮았지만 같은 신수는 아니었다. 시호는 저리 어린아이의 모습을 제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녀를 만났을 땐 이미 성체가 된 후였으니까.

“……아는데도, 어째서 이리 흔들리는 것인지.”

그가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아리를 보고 마음이 착잡해진 그였다.

그래서 아리와 백령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했다. 그래서 살벌하게 말했다. 꺼지라고.

그런데, 아리는 오히려 제게 뛰어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이 물속으로.

아리가 뛰어든 강을 바라보았다.

아리를 구하고자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백령은 하원이 무슨 고민을 하든,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해볼 만큼 해봤으니, 나머지는 그의 몫이었다.

백령이 풀숲에 눕혀져 있는 아리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혹시 모르니 서쪽 땅에 들러 영아에게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아리의 상태를 살피던 백령은 이 정도면 그냥 바로 궁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서쪽 땅에 들렀다가 바랑을 만나면 아리의 기분이 좋지 않을 터이니.

대신 영아에게 서찰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백령?”

하원이 떠나는 백령을 불렀지만, 백령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관심 없다.”

백령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강가에 울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싫은 하원이었다.

단호한 백령의 말에 하원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그 말을 끝으로 백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사라진 백령을 보며 하원은 어이가 없었다. 부탁하러 와서는, 관심 없다며 자리를 떠나다니.

“마음에 안 들어…….”

하원이 백령이 떠난 자리를 무섭게 노려보며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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