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얼마 안 가, 나의 불길한 예감이 단순한 착각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호, 뭐,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난 하원이라는 신수를 본 적도 없고, 만난 적 또한 없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미호가 곤란하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원을 설득하는 걸 말하는 거야.”
하원? 그자를 나보고 설득하라고? 왜?
왜 내가 설득을 해?
알 수 없는 말들에 멍하니 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하원의 일이 해결되면 연락 부탁해.”
아니, 지금 가겠다고?
설명을 더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미호!
나는 미호가 내게 조금 더 설명해주길 바랐지만, 슬프게도 돌아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아리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그걸 왜 미호, 네가 정하냐고오…….
내 의견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미호야?
처음으로 그녀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눈빛을 애써 모른 체하며 궁을 떠났다.
“……갔네요, 미호 님.”
“갔어…….”
자하와 내가 떠나간 미호의 자리를 보며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령 님, 근데 정말 아리 님이 하원 님을 설득하시는 겁니까?”
자하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백령에게 묻자, 백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군.”
자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아리 님이라도, 하원 님은…….”
하원이 왜……?
어떤 신수길래 자하가 저런 반응인 거지?
자하의 말투에는 걱정과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말투는 내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나, 괜찮은 거 맞을까?
“하원 님은 그날 이후로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날 이후?
아까부터 하원과 ‘그날’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날’이 어떤 날을 말하는 것일까?
여태껏 들은 바로는 신국에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시호가 죽은 날이겠지만.
그렇다면 하원도 시호와 관련이 있는 신수라는 건가?
아니, 시호라는 신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신수와 연관이 되어 있는 거야!
……그래서 미호가 나라면 가능할 것이라 말한 건가.
“백령 님, 다시 한번 생각을…….”
맞아, 백령. 다시 한번 생각해봐…….
자하의 말에 백령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애잔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의 눈동자는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말에 자하의 귀가 축, 처졌다. 나 또한 자하를 따라 맥이 빠져버렸다.
“아리에게는 절대 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내게 하는 말인지, 자하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자하의 뾰족한 귀가 다시 솟아올랐다.
“네? 그렇다는 말씀은……. 백령 님이 아리 님과 함께 가겠다는 겁니까?”
자하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백령을 바라보자, 백령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하원 님은 백령 님을 죽도록 싫어하잖습니까?”
뭐? 죽도록 싫어한다고?
그, 그 정도로 악연이라고?
자하가 백령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하원 님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 백령 님께 욕을 무지막지하게 했다고…….”
……어쩌면 백령과 함께 가는 게 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 아니야, 백령을 의심하지 말자.
백령은 자하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
“차라리 미호 님이…….”
“미호만 보면 토악질이 난다더군.”
백령의 말에 자하가 탄식을 내뱉으며 납득했다.
아니, 대체 뭐 하는 신수이길래 신국의 최고 권력자들을 배척하는 거지?
이쯤 되니, 하원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만나볼 만한 모든 신수를 다 만나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다.
“……진퇴양난이네요.”
자하와 백령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여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내, 자하는 무언가를 굳게 결심하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얜 또 왜 이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리 님. 아리 님을 미호 님에게 보낼 바엔 이 자하, 한 몸 바쳐 함께 하원 님을 뵈러…….”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얜 또 왜 헛소리를 하는 거야!
볼을 크게 부풀리고 자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자하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자하.”
자하의 헛소리에 백령이 그의 말을 끊었다. 자하는 백령이 부르자, 부담스러운 눈빛을 거두고는 백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남아라.”
백령의 말에 자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렇대, 자하.”
“그렇대요, 자하 님.”
여노와 나는 굳어버린 자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자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공허한 눈망울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자하, 바보.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백령의 집무실에서 나온 이후에도 자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번에 나를 쏙 빼고 가실 수가…….”
온종일 칭얼대는 자하 탓에, 뭘 하든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리 님, 흐엉.”
“짜하, 뚝.”
몇 번째 자하를 토닥이며 달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온종일 우는 그를 달래는 것도 이제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아니, 울어도 울어도 왜 눈물이 또 나는 거니, 자하야…….
스라소니가 원래 눈물이 많은 걸까? 아니면 자하가 독특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자하의 상황이 심각한 것일까…….
난 정말 알 수가 없다.
“……대체 아리 님이 아이인 건지, 자하 님이 아이인 건지…….”
여노가 그런 자하의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여노, 이건 중대한 사안이라고. 하원 님이 우리 아리 님을 맘에 안 들어 하시면 어떡해. 해를 끼치실지도 몰라, 하원 님이라면.”
자하가 울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여노가 얼굴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하원 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깐요……. 들은 바도 없고요…….”
여노가 어깨를 들썩였다.
“하긴, 하원 님은 낯을 많이 가리셔서 우리한테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
“아루 님보다도 심하신가 보군요?”
“아루 정도면 양반이지.”
아루가 방문할 때면 주위에 여노와 자하를 제외한 궁의 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다들 낯을 가리는 아루를 피해서 다니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런 아루보다도 낯을 더 가린다니…….
“아루. 그 자식은 재수는 없어도 공격적이진 않잖아. 하원 님은……. 어휴, 말을 말자.”
자하가 하원을 떠올린 듯,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여노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하조차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신수를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짜하.”
“네, 아리 님, 흐엉.”
내가 그를 부르자, 자하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니, 네가 애냐고!
“……하원이라는 신수, 어떤 신수야?”
“하원 님은, 흑, 신국에서, 흑…….”
……뭐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짜하, 울지 말고 천천히……. 뚝.”
“아리 님이 제 눈물을 보면 마음이 쓰라리시다니, 최대한 흐르는 눈물을 멈춰 보겠습니다, 흑.”
……아니, 그런 적이 없긴 한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계속해서 자하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하원 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자에게 굉장히 난폭한 신수에요.”
……그런데 교육자를 맡는다고? 가능할까?
“얼마나 난폭한데?”
“물어버릴걸요. 강으로 끌고 가 버릴지도 몰라요.”
“응……?”
강으로 끌고 간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에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 무러?”
당황해서 발음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나의 물음을 용케 알아들은 자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 앞에 시체가 나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람?
이해가 안 되는 자하의 말에 내 귀가 쫑긋, 했지만 곧 이어지는 자하의 말에 귀가 바짝 솟았다.
“아리 님이 거기에 나열되어 버린다면 저는, 흑…….”
무슨 그런 불길한 소릴 하냐고!
솔직히 말해, 자하. 너 내가 싫지?
자하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볼을 최대한 부풀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자하가 큼큼, 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하원 님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평생 그 신수만 지키고 그 신수에게만 정을 베푼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예전에도…….”
한 신수에게만 충성을 맹세한다고?
대체 정체가 뭘까?
자하의 말만 들어보면 정신이 상당히 이상한 신수임이 틀림없는데, 또 멀쩡한 구석이 있다니…….
백령은 불안해 보이는 그를 왜 교육자로 선택한 거지?
“근데, 짜하, 그런 하원을 왜 미호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자하는 그래도 알아들은 건지, 곧바로 내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래도 하원 님이 능력상 적임자이긴 하거든요……. 게다가, 충성을 맹세한 신수의 말이라면 잘 들으시니까요.”
오로지 충성을 맹세한 신수의 말만 듣는다, 이 말이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자하의 말을 가만히 듣던 여노가 무언가 말하기를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하 님은 하원 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여노가 의외라는 듯, 자하를 보며 물었다. 그에 자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예, 예전에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계속해서 하원 님에 관해서 알아봤었어.”
어딘가 엉성한 느낌이 들었다. 자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에 여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음……. 글쎄.”
자하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여노의 물음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여노도 자하의 반응에 굳이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이 이상은 잘 몰라. 하원 님에 관한 정보는 정말 얻기 힘들었어.”
자하의 뾰족한 귀가 긴장이라도 한 듯, 바짝 솟아 있었다. 그에 여노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런데 하원 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는 신수가 있을까요?”
“아마 아루 녀석이 알지 않을까?”
아루? 아루라면 확실히 신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신수니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쳇, 아루 녀석한테 아리 님을 맡기다니. 영 찝찝한데…….”
……그 말이 자하, 네 입에서 나올 줄이야.
아루 알면 억울해하겠다. 야…….
“그래도 아루 님이 자하 님보단……. 아, 아니에요, 자하 님.”
여노 또한 나와 생각이 일치한 것인지,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알아들은 듯한 자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노를 바라보았다.
뭘 잘했다고 우리 여노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자하!
“아리 님이 잘 해내실 수 있을까요?”
여노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글쎄다……. 일단 하원이라는 신수가 상당히 궁금하긴 한데.
고민하는 나와 그 옆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이가 있었으니, 자하는 내가 하원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을 상상한 것인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나 안 죽었다고, 자하야.
“미호 님과 백령 님이 아리 님이라면 하원 님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에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긴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야…….”
“하지만 백령 님이 결정하신 일이니, 아리 님에게 절대 해가 가지 않을 거예요.”
여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하의 말에 반박했다.
백령, 백령이라…….
백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백령의 속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보내려 했다가, 또 잡았다가, 이번엔 하원이라는 신수를 설득하기 위해 나와 함께 그를 찾아가다니.
애초에 미호의 고민에 큰 관심이 없던 백령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했다.
미호가 찾아온 날, 시큰둥했던 백령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하원을 만나면, 그 답을 알 수 있을까?
그를 만나면 지금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원과 만남이 한편으론 기다려지기도 했다.